소설리스트

34화. 내 심장에 별로 안 좋아 (34/145)


34화. 내 심장에 별로 안 좋아
2022.05.28.


단둘이 앉아 있는 서재에 적막이 흘렀다.

나는 책상에 앉아 서류를 확인하는 나타니엘을 눈으로 좇았다.

대체로 집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달리 나타니엘은 혼자 있을 수 있는 장소를 선호했다.

모두 중간에 용으로 변할까 봐서였다.

남들의 눈을 피해 일을 하던 그는 결혼 후, 서재에 주로 머물렀다.

거기에 나를 불러 놓고 일을 했다.

처음에는 살짝 반항했지만, 소용없었다.

자신이 갑자기 변하면 뒤처리를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나?

그럴듯한 이유였고, 지난 몇 달간 별 탈 없이 잘 지냈다.

문제는 어제는 맞았고, 오늘은 틀렸다는 데에 있었다.

16583655503175.png

‘불편해.’

그래, 불편했다.

나타니엘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신경 쓰인다면 믿기는가?

그렇다고 방에서 쫓아낼 수도 없고.

16583655503175.png

“하아…….”

나도 모르게 길게 한숨 소리를 내서 힐끔 그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나타니엘은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애써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책을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다시 그의 행동에 시선이 끌렸다.

16583655503175.png

‘와.’

책상 위에 긴 다리를 쭉 뻗어 올리고 앉아서 서류를 넘기는 나타니엘의 길고 예쁜 손가락에 자꾸만 눈이 갔다.

하얀 손가락이 종이를 넘기는 모습이 꼭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나는 손등에서부터 근육이 바짝 잡힌 팔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얇은 셔츠 너머로 보이는 근육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얼마나 탄탄한지 한 번 정도는 만져 보고 싶었다.

16583655503175.png

‘대체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거야!’

나타니엘을 넋 놓고 바라보던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정신 집중! 이너 피스!

속으로 소리를 지르며 글자를 노려보았다.

집중해야 한다. 집중.

저 예민한 남자는 내가 자기를 어떤 눈으로 보는지 금방……!

1658365550319.png

“뭐가 문제야?”

16583655503175.png

“으아아아악!”

갑자기 훅 다가온 나타니엘 때문에 나는 들고 있던 책을 집어 던졌다.

책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반듯한 이마에 붉은 자국을 남기고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16583655503175.png

“헉!”

툭, 가벼운 소리를 내며 책이 떨어졌다.

나는 재빨리 그의 얼굴을 살폈다. 역시나 나타니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16583655503175.png

“괜찮아요? 안 아파요?”

말하고 나서 다시 한번 책의 두께를 확인했다.

손가락 두 마디쯤 되어 보이는 두툼한 책등이 굉장히 위협적으로 보였다.

1658365550319.png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타니엘은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부딪힌 이마가 빨갛게 부어 있었다.

나는 손수건을 물에 적셔서 그의 이마에 올려 주었다.

16583655503175.png

“미안해요.”

1658365550319.png

“무슨 문제라도 있나? 요즘 유난히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군.”

16583655503175.png

“아뇨,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에요.”

나는 은근슬쩍 그의 시선을 피했다.

문제라면 내가 나타니엘을 너무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데에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일들에 너무 크게 반응을 했다.

뭐랄까, 유난히 잘생겨 보인다고 해야 하나.

16583655503175.png

‘내 심장에 별로 안 좋아.’

나는 책을 고르는 척 멀찌감치 떨어졌다.

눈에 콩깍지가 씐 것도 아닌데 갑자기 왜 이렇게 잘생겨 보이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타니엘이었다.

쭈그리고 앉아서 그를 힐끔거리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두들겼다.

16583655521323.jpg

“황태자비 전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16583655503175.png

“손님?”

나타니엘이 아니라 날 찾는다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 만나러 올 사람이 없는데?

16583655521323.jpg

“예, 막시밀리안 윈터스 소공작이 찾아왔습니다.”

16583655503175.png

“오라버니께서?”

의외의 이름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놈, 영지로 다시 돌아간 거 아니었어?

16583655521338.jpg

 

* * *

나는 따라오겠다는 나타니엘을 만류하고 막시밀리안이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거지꼴이 따로 없는 막시밀리안이 앉아 있었다.

16583655503175.png

“오…… 오라버니?”

16583655521347.png

“비 전하.”

눈 밑이 시꺼먼 게 꼭 살아 있는 시체처럼 보였다.

게다가 옷도 제대로 입지 않은 상태였는데, 얼마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상태가 안 좋았다.

16583655503175.png

“대체 무슨 일이에요? 그리고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세요?”

저 상태로 어떻게 정문을 통과한 걸까. 정말 미스터리였다.

16583655521347.png

“일단 뭐라도 마실 걸 좀 줄래? 내가 며칠 쉬지 않고 달려와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파리한 안색이 막시밀리안의 말이 사실임을 말해 주었다.

16583655503175.png

“일단 좀 씻고 와요. 누가 보면 산적인 줄 알겠어요.”

내 말에 막시밀리안이 얼굴을 붉히며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씻으러 간 사이에 하녀를 불러 샌드위치와 차를 가져오라 말했다.

16583655503175.png

‘자기 관리에 철저했었는데.’

막시밀리안은 자신의 잘난 외모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미모를 이용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고, 그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철저하게 관리했다.

그런데 그런 막시밀리안이 저런 꼴이라니.

16583655503175.png

‘파혼당한 게 충격은 충격이었나 보네.’

곧 차와 샌드위치가 나왔고, 씻고 나온 막시밀리안이 도착했다.

여전히 피곤해 보였지만 씻으니 그나마 나아 보였다.

16583655503175.png

“드세요.”

천천히 우물거리는 모습이 처연하게 보였다.

그의 옆에 서 있던 하녀가 그 모습에 뺨을 붉혔다.

나는 길게 한숨을 쉬며 주변을 물렸다.

그가 식사를 마치고 한숨을 돌리는 것까지 기다리고 난 후,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16583655503175.png

“그래서 며칠간 말을 달려서 절 찾아온 이유가 뭐죠?”

16583655521347.png

“그게…….”

막시밀리안은 그답지 않게 망설였다.

언제나 자기 위주로만 생각하며 개소리를 마음껏 하던 남자답지 않았다.

나는 침착하게 그의 대답을 기다려 주었다.

16583655521347.png

“혹시 테레사한테 별일 없지?”

16583655503175.png

“고작 그런 거 물어보려고 영지에서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16583655521347.png

“아니야. 고작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막시밀리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테레사가 걱정돼서 연회장에 몰래 왔다고 말했던 그였다.

딱히 걱정할 일이 없다고 무시했었지만.

16583655503175.png

‘결과적으로 오라버니가 온 게 다행이었지.’

이상한 일이었다.

과연 그 누가 단순히 불안하다는 이유로 그 먼 거리를 달려와 사랑하는 사람의 안부만 살필 수 있을까?

막시밀리안에게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16583655503175.png

“그럼요? 대체 뭐 때문인데요?”

막시밀리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16583655521347.png

“내가 이상한 꿈을 꿔서 그래.”

16583655503175.png

“꿈이요?”

16583655521347.png

“응. 분명 길게 꾸긴 하는데 기억이 잘 안 나. 그런데 가끔 어떤 부분이 선명하게 기억이 나기도 하거든.”

16583655503175.png

“그게 지난번이었군요.”

16583655521347.png

“응…….”

막시밀리안은 그러면서 꿈이 일부들을 내게 설명했다.

전부 테레사와 관련된 이상하고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원작에서 벌어졌던 일들도 아니었다.

어쩐지 등이 오싹해졌다.

마치 오늘 그가 이곳에 온 이유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에게 물었다.

16583655503175.png

“그럼 오늘은 왜 온 건데요?”

막시밀리안은 잠시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는 꿈을 기억해 내는지 미간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16583655521347.png

“꿈에서 테레사가 병으로 죽었어.”

막시밀리안의 말에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16583655574604.png

 

* * *

필립스는 제 손에 놓인 문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16583655521323.jpg

“이게…….”

16583655521323.jpg

“보시는 대로입니다, 폐하.”

필립스는 다시 한번 문건을 확인했다.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주변을 살폈다. 그의 손에 들린 건 수년 전, 트레비아 후작이 자신의 딸을 위해 만든 법안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밀리아가 황후가 되면서 재빨리 취소한 건이긴 하지만.

16583655521323.jpg

“무엇 때문에 이 법안을 통과시키겠다는 겐가?”

16583655521323.jpg

“이전과 같습니다. 황실의 안녕을 위해 황손을 하나라도 더 늘릴 방법을 만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필립스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트레비아 후작을 바라보았다.

대충 의도가 무엇인지 뻔히 보였다.

아마도 자신이 아닌, 나타니엘의 후처 자리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아직 정치적으로 전면에 나서지 않은 나타니엘을 귀족들은 그저 성격 더러운 황태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16583655521323.jpg

‘뭐, 이제 슬슬 상대할 때도 되었지.’

제이나를 황태자비로 들이면서 사실상 중립파의 수장인 윈터스 공작가가 나타니엘의 편을 들어 줄 것이 보였다.

게다가 윈터스 공작가의 힘이 너무 커질 때를 대비하여 균형을 이룰 후처를 들이는 것도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16583655521323.jpg

“좋다. 그대들이 그리 원하니 이 안건을 통과시키도록 하지.”

황제의 선언에 안건을 가져온 귀족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급하게 만든 회의에 몰래 끼워 넣은 탓에 큰 반대 없이 통과되어 다행이었다.

귀족들은 서로 눈짓을 하며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 * *

뿔뿔이 흩어지는 것처럼 보였던 귀족들은 수도의 클럽 하우스로 다시 모였다.

모두 손에 술 한 잔씩 들고 오늘의 수확을 자축했다.

16583655521323.jpg

“뭐,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폐하께서는 쉽게 허락하시는군요.”

16583655521323.jpg

“폐하께서는 여자를 좋아하시니, 당연히 두 팔 벌려 환영하시지 않겠습니까?”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던 귀족들은 뒤늦게 불편한 기색인 트레비아 후작의 눈치를 보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 법안은 통과되기 힘들었을 것이었다.

황제의 바람기는 꽤 유명했으니까.

16583655521323.jpg

“흠흠, 일단 이 자리에 모인 이유부터 생각합시다.”

젊은 귀족 하나가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다들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바로 앉았다.

16583655521323.jpg

“그럼 어느 가문의 여식을 황태자 전하의 후처로 들이는 게 좋겠습니까?”

16583655521323.jpg

“더스틴 가문의 첫째 딸은 어떻습니까?”

16583655521323.jpg

“너무 방계 가문 아닙니까? 황실에 들어갈 사람인데 너무 밀리면 좀…….”

서로 자신의 연을 황실에 대기 위해 은근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후작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16583655521323.jpg

“황후 폐하께서 염두에 둔 아이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16583655521323.jpg

“폐하께서요?”

16583655521323.jpg

“예. 이미 데려와 얼굴도 보았다고 하니 더는 논의가 필요 없을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한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작은 반쯤 넋이 나간 귀족파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는 나가 버렸다.

그가 나가자 방 안에는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16583655521323.jpg

“이, 이게 말이나 됩니까!”

16583655521323.jpg

“허! 처음부터 전부 트레비아 후작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둘씩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 모두 단시간 내에 일을 도모할 수 있던 것은 다음 대 황후 자리를 노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미 후처 자리에 들어갈 후보를 후작가에서 정해 두었다니.

귀족들은 자신들이 들러리와 다를 바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분노에 부르르 떨었다.

16583655521323.jpg

“그렇다고 이제 와서 황제 폐하께 가서 물리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16583655521323.jpg

“차라리 윈터스 공작에게 하소연을 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다들 어떻게 해서든 한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었으나 뚜렷한 방법이 없었다.

시작하기도 전에 꼬여 버렸다는 사실에 그들은 신음을 삼켰다.

* * *

나타니엘은 제 앞에 놓인 권고장을 내려다보았다.

1658365550319.png

“이게 대체 뭐지?”

16583655521323.jpg

“황제 폐하께서 보내셨습니다.”

시종장은 겨우 입을 열었다.

나타니엘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무지렁이인 그가 신을 찾을 지경이었다.

황태자가 고갯짓으로 밖으로 나가라 하자 시종장은 부리나케 밖으로 도망쳤다.

두꺼운 나무 문을 닫는 순간,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구겨졌다.

16583655521323.jpg

“히, 히이이익!”

살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최대한 빨리 도망쳐야 했다.

16583655613802.pn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