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평생 당신 곁에 있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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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평생 당신 곁에 있을게요
2022.05.25.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 말에도 그는 고개를 돌려 호수를 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본 사람은 손에 꼽아. 이제는 돌아가신 어머니, 그리고 어릴 적 날 돌본 유모 정도겠군.”
“폐하께서도 못 보셨다고요?”
“비밀리에 보고는 받으셨다고 하던데, 어머니께서 날 숨기셨으니 실제로 보진 못했을 거다.”
아기니까 도망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자식에게 아무리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자식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때 두 집 살림으로 꽤 바쁘셨거든.”
세상에.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이제 막 태어난 자신의 아이에게 관심조차 없는 아버지라니.
‘아니지…….’
하지만 곧 아나이스 황녀에게 보인 황제의 태도를 떠올렸다.
언제나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던 황제는 제국의 이득 앞에서는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꿨다.
그리고 그 책임을 은근슬쩍 나타니엘에게 떠넘겼다.
비록 아무도 믿지 않을 것 같은 억지였지만, 공식적인 발표는 그랬다.
‘그러고 보니 자기는 이 일에서 쏙 빠졌네.’
욕은 윈터스 가문이 먹고, 아나이스의 명예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나타니엘과 나는 갑자기 세기의 연인이 되어 욕도 먹고 결혼도 했다.
하지만 황제는 인자함과 배상금을 얻어 갔을 뿐.
황제만 아니었다면 벌써 쌍욕을 날려 주고도 남았을 것이다.
“어머니도 보여 주고 싶어 하지 않으셨어. 지금이야 꽤 제대로 된 용의 모습이지만, 그때는 거의 도마뱀에 가까웠거든.”
충격적인 가정사에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 상태를 모르는지 나타니엘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게다가 어렸을 때는 인간의 모습이었을 때보다 용의 모습이었던 시간이 길었다. 어머니께서는 자신이 낳은 아이가 사람인지 아닌지 헷갈리셨던 것 같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나타니엘은 사람이었고, 아직 보호가 필요한 아기였다.
강아지만 한 크기의 지금보다 더 작고 연약한 나타니엘이라니.
“처음에는 외면하셨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습이 변한 나를 악마라고 생각하셨지. 한 번은 정말 죽을 뻔했으니까.”
“황제 폐하께서는 그걸 그냥 두셨단 말이에요?”
발끈하는 내 말에 나타니엘은 피식 웃었다.
“말했잖아. 두 집 살림하느라 바쁘셨다고. 그때쯤엔 아나이스가 태어났지. 아버지의 진짜 사랑은 지금의 황후였으니까.”
나타니엘의 어머니는 여러 가지 일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그걸 용으로 변한 나타니엘에게 풀기 시작했다.
때리거나, 창밖으로 집어 던지는 행동은 금세 유모에게 발각되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황후였고, 그녀의 성에서 벌어지는 일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아나이스를 떠올렸다.
“그래서 용의 모습으로 변하면 언제나 이곳으로 도망쳤다. 유모가 시간을 벌어 주고, 그사이에 탈출해서 찾은 곳이 여기야. 이 근처는 연회가 열려도 아무도 찾지 않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나타니엘을 보았다.
호수를 보는 그의 얼굴이 어쩐지 씁쓸해 보였다.
어쩐지 남의 일이라면 관심도 없던 그가 아나이스 황녀의 문제에 협조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어머니도 유모도 죽었으니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지만, 가끔은 나도 헷갈릴 때가 있어. 내가 인간인지, 아니면 용의 모습을 한 마물인지.”
자조하듯 말하며 웃는 그의 모습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느낌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의 붉은 눈동자가 천천히 내게로 향했다.
“나타니엘은 나타니엘이라고요. 용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도, 사람의 모습일 때도요.”
비밀을 털어놓아 좀 더 홀가분해진 탓일까.
짙어졌던 그의 붉은 눈이 아까보다 맑고, 반짝거렸다.
‘힘이 되어 주고 싶어.’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그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힘을 가진 나였지만, 적어도 나타니엘을 지탱해 주는 작은 부목 정도는 되어 주고 싶었다.
나는 단호하게 그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용으로 변하는 걸 들키고 싶지 않다면, 내가 도와줄게요. 앞으로 평생 당신 곁에 있어야 하잖아요.”
“평생…….”
“그래요, 우린 부부잖아요.”
“제이나, 넌 나와의 결혼을 후회하지 않나?”
나타니엘과의 결혼 생활이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다.
그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동분서주한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귀족의 결혼은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의 정략결혼이 대부분이었다.
오라버니인 막시밀리안이 태중 약혼을 했으니, 나는 철저하게 가문을 위해 결혼했어야 할 것이다.
“별로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그렇군.”
나타니엘은 희미하게 웃었다.
한낮의 열기를 식히듯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자유롭게 흩날리는 나타니엘의 머리카락마저 우아하게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내게 손을 뻗었다.
“그만 일어나지.”
“어…… 네.”
이상하다.
아까보다 커진 심장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분명 무섭지는 않은데.
* * *
다이애나는 바짝 긴장해 있었다.
‘이번 생은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기회가 생길 줄이야.’
다이애나는 얼마 전 자신의 삶에 들이닥친 재난과도 같은 사건을 떠올렸다.
오라버니인 아닉스는 좋은 사람이었다.
가문도 잘 이끌고, 사업도 척척 해내는.
이번에 새로운 사업을 하겠다며 수도로 올라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번듯한 사업가였다.
물론 여자 문제가 조금 있긴 했다.
하지만 원래 잘난 남자에게는 흠이 하나씩 있는 거 아닌가?
다이애나는 자신의 오라버니가 좋은 여자를 만나기를 바랄 뿐, 그런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파혼한 주제에 오라버니를 꼬신 그년을 비호해 주겠다고 황태자비가 나선 것이다.
소문은 일파만파 퍼졌고, 다이애나는 사교계 모임 어디에도 발을 디딜 수 없었다.
- 이건 권력 남용이야! 우리 그로반 가문이 이 제국에 얼마나 헌신했는데 이럴 수가 있어!
오라버니는 매일 밤 울부짖으며 술만 마셨다.
다이애나 역시 같은 그로반 가문이었기에 그 어디서도 초대받지 못했다.
두 남매는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던 어느 날.
신께서 그로반 가문을 버리지 않은 것인지 황실 인장이 박힌 편지가 도착했다.
아닉스는 혹시 자신에게 내려진 부당한 처사를 거둬 줄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희망을 가지고 봉투를 열었다.
애석하게도 편지는 황후에게서 온 것이었다.
하지만 아주 솔깃한 제안이 들어 있었다.
아닉스는 당장에 다이애나를 불렀다.
- 오라버니, 무슨 일이세요?
- 우리에게 기회가 왔어, 다나.
그는 다이애나에게 편지를 건넸다.
거기에는 황후가 다이애나 그로반의 후견인이 되어 줄 것이니 면접을 보러 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어째서 황후가 이런 가문에 신경을 써 주는지는 둘 중 그 누구도 관심 없었다.
그저 눈앞에 내려온 동아줄에 달려들었을 뿐.
다이애나는 오라버니의 환송을 받으며 황궁으로 향했다.
“황후 폐하께서 안으로 들어오시라 하셨습니다.”
다이애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아름답고 화려한 내부의 모습에 다이애나는 정신이 없었다.
“자네가 다이애나 그로반인가?”
중년의 나이임에도 고아한 미녀인 황후가 다이애나를 빤히 보았다.
그녀는 뒤에 있는 시녀장의 눈치를 보며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예, 폐하.”
“자리에 앉아 얼굴을 들어 보거라.”
다이애나는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들었다.
황후와 시녀장은 마치 물건을 살피듯 꼼꼼히 다이애나를 훑었다.
“외모가 조금 아쉽지만, 그럭저럭 쓸 만하구나.”
생전 처음 듣는 지적에 다이애나는 얼굴을 붉혔다.
그로반 남작령에서 그녀는 꽤 예쁜 편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폐하. 원래 남자란 여신과 결혼해도 추녀와 바람난다 하지 않습니까?”
시녀장의 말에 실망했던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다이애나를 향해 물었다.
“내가 편지를 보내 이 일에 목숨을 걸 수 있냐고 물었었지. 할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시켜만 주시면 뭐든지 해내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만일 성공한다면 내 너를 후원해 주고, 그로반 남작가를 비밀리에 도와줄 것이야.”
황후의 말에 다이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무엇인들 할 자신이 있었다.
설령 그것이 범법 행위라 하더라도.
“이제 곧 법이 바뀔 것이야. 황실의 사람이라면 후처를 들일 수 있도록 말이야.”
“후, 후처라 함은…….”
제국은 기본적으로 일부일처제였다.
정부를 두는 한이 있어도 부인을 여럿 둘 수는 없었다.
첫 번째 부인이 죽어 재혼을 하더라도 고운 시선을 받기란 어려웠다.
그런데 후처라니.
“황실은 손이 귀한 편이지. 설령 있다 하더라도 일찍 죽는 편도 잦고. 황손의 숫자는 황실의 기반. 지금까지 너무 안일했던 게야.”
다이애나는 커다란 눈만 깜빡거렸다.
“그래서 내가 널 황태자의 후처 자리에 앉힐까 해.”
황후의 말에 다이애나의 얼굴이 굳었다.
결혼을 시켜준다 해서 올라왔다니 황태자의 후처 자리라니.
비록 다이애나가 엄청난 남편을 원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알콩달콩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다.
표정이 굳은 다이애나를 보며 황후는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황태자의 후처라면 황태자비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릴 수 있단다. 게다가 이 황궁의 안주인인 내가 너의 뒤를 봐줄 터인데, 감히 황태자비 따위가 널 우습게 볼 수 있겠느냐?”
황후는 다이애나를 살살 구슬렸다.
그녀가 앞으로 온갖 금은보화와 이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그로반 남작가의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라는 말까지 하자 다이애나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만일 성공만 한다면 내가 널 황태자비로 만들어 주마.”
꽤 어려운 일이지만, 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만일 다이애나가 끝까지 나타니엘의 마음을 얻어 내지 못한다면, 그녀의 가문에 역모죄를 뒤집어씌워 폐위시키면 될 일이었다.
“어떻게 하겠느냐? 그저 그런 남자의 정실이 되느니,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황태자의 후처가 되어 일국의 황후 자리까지 올라가는 게 낫지 않겠느냐.”
아마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다이애나 역시 거절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그녀가 말한 대로 황후가 된 밀리아가 있었다.
후처도 아니고 정부로 살아남아 권력의 최정점에 선 여자가.
다이애나는 어쩌면 자신도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예, 하겠습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보였으나, 황후의 눈에는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밀리아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녀장은 그로반 영애에게 방을 내어주도록 해. 촌티 나는 옷은 버리고, 머리도…… 금발로 염색시키고. 아, 예절 교육도 처음부터 전부 다시 시켜.”
“예, 폐하.”
황후의 말에 시녀장은 다이애나를 채근해서 방을 나왔다.
둘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응접실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밀리아는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말은 전부 준비되었다.
이제 실행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