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가져 본 적 없는 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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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가져 본 적 없는 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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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가져 본 적 없는 애정
2022.05.21.
나타니엘이 아무리 걱정하지 말라 했지만, 한 번 달라붙은 불안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며칠 내내 고민했다.
이대로 주저앉아 걱정만 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대비해야지, 대비를.”
일단 디에스 기사단에 대해서 알아내야 했다.
하지만 비밀 결사단이라 그런 건지 자료가 거의 없었다.
황태자이자 초월자에 가까운 나타니엘이 찾지 못한 걸 내가 더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럼 남은 것은 불치병이었다.
원작에서와 달리 이번에는 약간의 힌트가 있었다.
나타니엘의 어머니가 겪은 병.
나는 궁의를 불러 자세한 증상을 확인했다.
“책에서 테레사가 겪었던 증상이랑 똑같아.”
처음에는 기운이 없는 정도다.
그러다 고열에 시달리는 횟수가 많아지고, 점점 움직임이 어려워진다.
결국 침대에 누워서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
“치료법이나 원인은 그때도 찾지 못하였다고.”
“예, 비 전하.”
“알려 주어 고맙구나. 그만 돌아가도록 하거라.”
궁의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 나갔다.
나는 궁의를 돌려보낸 뒤 생각에 잠겼다.
지나치게 거창한 목적을 지닌 비밀 결사대가 평범한 아가씨인 테레사를 노리는 이유가 뭘까.
“진짜 알 수가 없네…….”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 * *
호화로운 응접실.
밀리아는 여전히 우아한 얼굴로 자신의 아버지를 응시했다.
여전히 깐깐해 보이는 트레비아 후작이 나긋하게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후 폐하.”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 늙은이를 여기까지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밀리아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남몰래 쓰게 웃었다.
원래도 친밀한 부녀지간은 아니었지만, 밀리아가 황후가 된 이후로 더욱 거리감이 느껴졌다.
미혼의 몸으로 아이를 가졌을 때 보였던 아버지의 반응을 생각하면 이렇게 서로 마주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지난번에 만들다 만 법안 때문에요.”
“무슨 법안을 이야기하시는 건지요?”
“제가 아직 황후가 되지 못하였을 때 만드시려 했던 법안 말입니다.”
밀리아의 말에 트레비아 후작은 잠시 말을 잃었다.
망설이는 듯 보이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제의 후처를 허락하는 그 법안 말입니까.”
“예.”
지금의 황제, 필립스는 젊은 시절부터 바람기로 유명했다.
강력한 권력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그에게 몸을 던지는 여성도 많았다.
그중 하나가 밀리아였다.
미혼의 몸으로 황제의 아이를 품었으나 아무런 자리를 받지 못하였다.
법적으로 황제의 부인은 오직 한 명, 황후뿐이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전 황후와 외척이 보낸 암살자의 위협에 몸을 숨기며 전전긍긍해야 했다.
지금 밀리아가 꺼낸 것은 당시 그녀에게 자리 하나라도 마련해 주기 위해 트레비아 후작이 원로원의 주축들을 움직여 만들려 한 법안이었다.
후처는 황제의 정식 부인으로, 황후보다는 못 하지만 부인으로서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다.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식이 아들일 경우 법적으로 계승권까지 가질 수 있었다.
당연히 죽은 전 황후의 친정 가문을 중심으로 한 반대파가 격렬히 반발하여 법안이 통과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황후가 병으로 죽고, 밀리아가 황후의 자리를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잊혔다.
“이제 와서 어찌하여 그 법안을 통과시키자 말씀하시는 겁니까?”
“황태자 때문입니다, 후작.”
“나타니엘…… 황태자 전하 말이십니까?”
“예. 대대로 황실에는 손이 귀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나타니엘 황태자는 무려 용의 힘을 타고난 자손이고요.”
밀리아의 말이 맞았다.
필립스가 그렇게 수많은 씨를 뿌리고 돌아다녔는데, 아이가 들어선 사람이 단 둘뿐인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그뿐만 아니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많은 황제가 바람을 피우며 여자들을 곁에 두었지만, 자식은 많아야 두셋을 보는 것이 다였다.
“하지만, 그리되면…….”
후작은 말을 잇지 않았지만, 밀리아 역시 그 뒤에 따라올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아마도 필립스가 후처를 들일까 봐 걱정하는 것이겠지.
“그 법안이 없다고 폐하께서 다른 여자를 품에 안지 않은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후처를 들일 위험을 감수할 필요까지는 없지요.”
“폐하의 나이가 벌써 오십이 다 되어 갑니다, 아버지. 이제 후처를 들이기 위해 대신들과 싸우기에도 힘에 부치실 나이지요.”
그녀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따뜻한 잔을 들고 있었는데도 여전히 손끝이 시리다.
“그래도 후처라니요. 너무 감수해야 할 위험이 많습니다.”
“제 걱정일랑 하지 마십시오. 이건 제 안위뿐만 아니라 우리 헨리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황후는 설명을 더했다.
나타니엘이 황제가 된다면 가장 먼저 자리를 위협할 사람을 제거하려 들 것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는 헨리가 될 것이 뻔했다.
“제가 죽고 나면 우리 헨리를 지켜 줄 든든한 지원군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은…… 황태자의 후처 자리에 저희 사람을 넣자는 뜻입니까?”
트레비아 후작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자신의 딸이지만 밀리아는 늘 철이 없고, 욕심이 많았다.
자식을 앞세워 이득을 추구하려 할 때도 많았는데 황자를 생각하다니.
“황후 폐하의 뜻이 정 그렇다면, 제가 뜻을 모아 보도록 하지요. 그럼, 그 자리에 앉을 만한 여자는 폐하께서 골라 주시겠습니까?”
후작의 허락에 밀리아는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은 아들을 위해, 황실을 위해 하는 일처럼 보일 것이다.
제국민들은 처음엔 반감을 가지겠지만, 용의 힘을 이어받은 나타니엘이 후처를 들이겠다고 하면 찬성할 것이다. 제국민들의 나타니엘에 대한 열정은 상상을 초월했으니까.
‘그리고 그 아이는 다른 여자를 안는 남편을 보며 시들어 가겠지.’
황궁은 황태자비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살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생기발랄한 소녀의 숨을 틀어막고, 서서히 죽여 가는 곳이 황궁이었다.
그 속에서 제이나는 너무 밝았다.
‘마음에 들지 않아.’
처음부터 싫었다.
순진하고 고결해 보이는 행동들이 구질구질했던 과거의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밀리아는 질투와 증오로 썩어 가는 검은 속을 숨긴 채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후처 자리에 앉을 만한 현숙한 아이로 골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 * *
아침 식사를 하는 자리.
나타니엘은 내 얼굴을 빤히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아픈가?”
“예? 아니요. 전혀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렸다.
그도 그럴 것이, 요 며칠 제대로 자지 못해서 얼굴이 엉망이었다.
걱정은 만병의 근원이라더니.
둔한 나타니엘이 알아차릴 정도로 티가 났다니. 간신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그대는 정말 정직해서 탈이야.”
“칭찬으로 들을게요.”
목소리가 괜히 작아졌다.
일부러 당당한 척하려고 허리를 쭉 폈지만, 여전히 눈치가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침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자, 잘 먹었습니다! 그럼 오늘 일 잘하고 오세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던 내 손목을 나타니엘이 잡았다.
슬쩍 잡은 건데도 방심한 탓에 몸이 휘청거렸다.
나타니엘이 가볍게 어깨를 잡아서 제 몸에 기대도록 했다.
“왜 그러세요?”
그는 가만히 내 눈을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잔뜩 불만이 있는 얼굴이다.
나는 눈만 데굴 굴려서 시선을 피했다.
“잠깐 산책이나 하지.”
“산책이요?”
“응. 할 이야기도 있고.”
잠깐 고민하던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타니엘은 먼저 문을 열고 앞서 걸어갔다.
나는 그의 뒤를 쫓아서 복도를 지나 정원으로 향했다.
황태자궁의 후원은 늘 완벽하게 정리된 다른 정원들보다는 자유로운 형태였다.
‘아니, 말은 똑바로 해야지. 자유로운 형태라기보단, 그냥 방치한 거잖아.’
원래는 산책로였을 길은 이미 잡초로 무성했다.
대체 어디로 가려는지 나타니엘은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나타니엘, 어디까지……!”
“다 왔어.”
도착한 곳은 넓은 호수였다.
성안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기 앉아.”
“어, 네…….”
나타니엘은 야트막한 바위 위에 친절하게 손수건을 올려 주며 말했다.
무려 내가 예전에 주었던 새끼 용이 수놓여 있는 손수건이었다.
‘이걸 아직 갖고 있네.’
당연히 금방 버릴 줄 알았는데…….
심장 구석이 간질간질하다.
어쩐지 오늘따라 나타니엘이 친절한 거 같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예?”
나는 눈만 깜빡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한 사람은 나타니엘 아니었던가?
“나타니엘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서요.”
“요즘 매일같이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눈치를 봤잖아.”
“아니, 강아지라니요. 무슨 그런 심한 말씀을.”
“아니야?”
나타니엘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저건 지금 짜증이 많이 났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대놓고 물어볼 만한 게 아니어서 망설이게 됐다.
“으음…….”
“언제부터 내 눈치를 봤다고.”
“누, 눈치 많이 보거든요!”
“빨리 말해. 시간 없으니까.”
나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힘겹게 물어봤다.
“그, 돌아가신 어머니 때문에요.”
“어머니?”
갑자기 튀어나온 단어에 나타니엘은 놀란 얼굴을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최대한 그가 상처받지 않을 만한 말들로 고르려 애쓰면서.
“걸리셨던 병에 대해 알고 싶어서요. 혹시 좀 거북하다면 이야기해 주시지 않아도 돼요.”
“어머니가 걸렸던 병이라…….”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던 나타니엘이 나를 보며 말했다.
“말 그대로 불치병이야.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치료할 방법도 알지 못하고, 그저 시름시름 몸이 무너지는 걸 보아야만 했지.”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나타니엘을 보자 숨이 턱 막혔다.
내가 대체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내 목적을 위해 그의 상처를 들쑤셨다.
스스로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염치없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미안해요. 괜한 이야기를 꺼내서…….”
이 정도 사과로 괜찮을 걸까.
나타니엘은 어깨를 으쓱이며 내 옆의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 좋은 기억은 아니야. 내 평생 처음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순간이라.”
결국 나는 고개를 푹 떨구어야만 했다.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하는 사과가 너무 얕아서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나타니엘의 커다란 손이 장난스럽게 내 머리칼을 헤집었다.
“너무 그렇게 풀 죽지 말라고. 나랑 어머니는 그대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네?”
고개를 들어 나타니엘과 눈을 마주했다.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의 붉은 눈이 오늘따라 더욱 어둡고 차가워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어두운 감정들이 넘실거렸다.
“내가 여기를 어떻게 찾았는지 알아?”
장난기 어린 웃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타니엘은 웃고 있는데도 어쩐지 처연해 보였다.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뛴다.
어쩐지 그의 가장 건드려서는 안 될 부분을 건드린 것 같다는 생각에 몸이 긴장감으로 굳었다.
“내 어머니는 날 싫어하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