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어디에든 변태는 있다
(29/145)
29화. 어디에든 변태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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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어디에든 변태는 있다
2022.05.11.
나는 테라스의 의자에 앉아서 축 늘어졌다.
“오늘 고마워요. 이런 자리에서 인사하러 다니는 거 싫어하는 거 아는데.”
“폐하께서 신신당부한 것도 있으니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헤헤, 그래도요.”
연회가 진행되는 동안 나와 나타니엘은 정말 많은 사람과 인사를 나눠야 했다.
혹시나 나타니엘이 중간에 귀찮다고 돌아갈까 봐 어찌나 마음을 졸였던지!
다행히 그는 묵묵히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돌아다녔다.
그사이에 나타니엘을 향한 귀족들의 시선이 조금 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래 봤자 폭군에서 말이 통하는 고집불통 정도지만.’
덕분에 술도 많이 마셨다.
나타니엘은 모르겠지만, 나는 술에 강하지 않았다.
가벼운 종류로만 골라 마셨는데도 눈앞이 어질어질하다.
“좀 앉아서 쉬어.”
내 상태가 영 못 봐 줄 정도인지 어쩐 일로 나타니엘이 먼저 챙겨 주었다.
테라스 밖에서 물을 가져와서는 내게 건네주었다.
물을 홀짝이며 열기를 식히자 좀 살 것 같았다.
“괜찮나?”
“네. 이제 좀 졸리네요…….”
“별로 잘 마시지도 못하는 것 같더니. 그러게 왜 주는 대로 마셔.”
“괜찮을 줄 알았죠.”
나타니엘의 잔소리까지 듣자니 머리가 울렸다.
등받이에 기대려고 몸의 중심을 뒤로 움직였다.
이 벤치에는 등받이가 없다는 사실을 깜빡한 채로.
“으악!”
받쳐 줄 등받이가 없자 몸이 그대로 넘어갔다.
아니, 넘어갈 뻔했다.
나타니엘의 체향이 훅, 가까워졌다.
살기 위해 뻗은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붙들고 겨우 뒤로 나자빠지는 볼썽사나운 꼴은 면했다.
“진짜, 눈을 뗄 수 없네.”
“죄, 죄송합니다…….”
그가 짧게 혀를 차고는 날 일으켜 자리에 앉혀 주었다.
나는 툭툭 구겨진 옷을 펴는 나타니엘의 눈치를 보았다.
“왜?”
“아, 아뇨.”
그는 무심하게 시선을 돌려 후원을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내가 딱히 잘못한 일도 없는데 왜 그러는 걸까.
“뭐 화난 거 있어요?”
“별로.”
“그런데 왜…….”
날 내려다보던 나타니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왠지 더 물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입을 다무는 걸 선택했다.
‘하여간 성격하고는.’
남몰래 속으로 욕하고 있는데 그가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깜짝 놀란 나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무슨 일이에요?”
“그대의 친구가 도망치고 있는 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나타니엘은 손가락으로 정원을 가리켰다.
“친…… 테레사요?”
나는 벌떡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빼곡히 들어선 나무 틈 사이로 테레사를 찾는 건 불가능했다.
진짜로 그가 테레사를 본 게 맞을까 싶던 그 순간.
“꺄아아아아!”
어디선가 들리는 비명에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타니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꽉 잡아.”
“네? 으, 아아아아아악!”
그리고 그대로 발코니 밖으로 뛰어올랐다.
이번에야말로 필사적으로 나타니엘의 목에 매달렸다.
우리가 있던 곳은 무려 3층이었다.
사지가 멀쩡하려면 나타니엘에게서 떨어지면 안 된다는 소리였다.
“꺄아아아아악!”
다행히 바닥에 무사히 안착했다.
단단한 땅이 발에 닿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미, 미쳤어요?! 죽는 줄 알았잖아요!”
나타니엘의 얼굴 위로 드물게 당황한 감정이 드러났다.
‘진짜, 너 내 동생이었으면 한 대 쥐어박았다.’
나는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보다 더 급한 게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좀 확인해 줄 수 있어요?”
“그래.”
나타니엘은 눈을 감고 마력으로 주변을 훑어 주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내게 말했다.
“가까운 곳에 사람 여럿이 모여 있군.”
“일단 그쪽으로 가 봐요.”
같이 있던 드미트리 백작은 어떻게 된 거지?
왜 테레사 혼자서 도망치고 있었던 걸까.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제 모든 게 잘 해결됐다고 생각했는데.
“이쪽이군.”
나타니엘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밑동만 남은 나무가 몇 그루 있는 공터였다.
그리고 그쪽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바닥에 쓰러져 있는 테레사가 보였다.
“테레사!”
급하게 안으로 달려 들어가자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사이로 놀랍게도 모르는 남자를 발로 밟고 있는 막시밀리안이 보였다.
참혹한 꼴을 하고 있는데도 막시밀리안은 멈추지 않았다.
“오, 오라버니, 멈춰요!”
내 비명 같은 고함에 드디어 발길질이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 막시밀리안은 본 적 없는 서늘한 눈을 하고 있었다.
파란 눈에 담긴 두려울 정도로 뜨거운 살의.
처음 보는 그 모습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일단 메니실 영애의 안전을 살피는 게 먼저 아닌가?”
나타니엘의 말에 정신을 차린 나와 막시밀리안은 뒤쪽에 쓰러져 있는 테레사에게 뛰어갔다.
몸이 축 늘어진 그녀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나는 단숨에 무슨 일이 생길 뻔했는지 알아차렸다.
늦게라도 막시밀리안이 밟고 있던 자를 한 대 쳐 주고 싶었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
“일단 자리를 정리하는 것부터 하지. 이자는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처분하도록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나타니엘은 우리 쪽을 힐끔 보더니 남자의 양팔과 다리를 마법으로 묶었다.
“으, 윽.”
이미 막시밀리안에게 얻어터진 남자는 끙끙거리는 앓는 소리만 냈다.
나는 그런 남자를 발로 콱 밟아 주고 돌아섰다.
테레사의 일을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일단 황태자궁으로 가죠. 테레사는 피곤해서 쓰러졌다고 하고요. 오라버니는 가서 카시안을 불러오세요.”
테레사를 보고 있던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차마 만지지도 못한 채 테레사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눈가가 붉은 것이 그도 꽤 놀란 것 같았다.
나는 막시밀리안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오라버니, 빨리요.”
“으, 응.”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막시밀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레사에게 웃옷을 벗어서 덮어 주고는 연회장으로 뛰어갔다.
그의 모습이 작아지자 나는 나타니엘을 돌아보며 말했다.
“테레사를 옮기는 걸 도와줄 수 있어요?”
내 부탁에 나타니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남자를 바닥에 묶어 두고 표식을 남겼다.
그리고 테레사를 등에 업었다.
“가는 길에 시종에게 넘기는 편이 좋을 것 같군.”
“그래야겠어요.”
우리는 빠르게 후원을 빠져나와 황태자궁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만난 경비병에게 남자를 황태자궁 지하 감옥에 넣어 두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
입이 무거운 하녀 몇 명을 불러 테레사를 손님 방으로 데리고 가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시켰다.
얼마 후, 그녀를 씻기고 자리에 눕혔다는 보고를 듣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불안함이 엄습했다.
내가 이야기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꾸었기에 뒷일을 예측할 수 없었다.
상상도 못 한 전개로 흘러가는 게 이걸로 끝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이제 시작일지도 몰랐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순식간에 커졌다.
“불안한가?”
“네?”
“표정이 어두워서.”
나타니엘의 말에 나는 애써 웃음을 지으려 애를 썼다.
그는 가만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억지로 웃으려고 하지 마. 못생겨 보이니까.”
“뭐, 뭐예요!”
“화내는 얼굴이 차라리 더 낫네.”
장난스럽게 웃는 그의 모습에 몸에 힘이 쭉 빠졌다.
긴장이 가시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타니엘은 그런 날 의자에 앉혀 주고 반대편에 앉았다.
그러고는 말을 걸지 말라는 듯 눈을 감았다.
‘혹시 일부러 그런 건가?’
내가 아는 나타니엘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 내곤 막시밀리안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황태자 전하, 윈터스 소공작과 벨리시아 영애가 방문을 요청했습니다.”
“들어오라 해.”
시종이 알려 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시안과 막시밀리안까지 도착했다.
서재에 모두 모이자 나는 기사들에게 붙잡은 남자를 데려오라 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 둘이 양팔을 붙잡고 질질 끌고 왔다. 남자는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원래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카시안은 가만히 남자를 들여다보더니 소리를 질렀다.
“이, 이 녀석, 그로반 남작이에요!”
“그로반?”
나는 흐릿한 기억을 뒤졌다.
원작에서는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인데?
어디서 갑자기 이런 변태가 튀어나온 걸까.
나타니엘은 발로 툭툭 쳐서 남작을 깨웠다.
“너…… 너희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난리야! 내가 바로 그로반 남작가의 아닉스 그로반이다.”
뭐래.
나는 무심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못난 얼굴을 보아 하니 악역이 틀림없었다.
겨우 눈을 뜬 그로반 남작은 내 얼굴을 보았다.
“감히 계집애 주제에 남자인 나를 내려다봐!”
이 세계에도 이런 병신이 있구나 싶었다. 쓸데없는 고증에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나타니엘은 고저 없이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네놈이 황실 능멸 죄로 목이 잘리고 싶은 모양이군.”
그로반 남작은 나타니엘의 미모에 잠시 넋이 나갔는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그의 붉은 눈을 발견했는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화…… 황태자 전하!”
“내 얼굴을 아는군.”
입만 벙긋거리던 남작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작은 뇌가 움직임을 멈춘 모양이다.
권력 앞에서는 또 납작 엎드리는 하찮은 남자로구나.
“다시 한번 묻지, 그로반 남작.”
남작은 이제야 상황이 파악된 것 같았다.
아까까지의 방구석 여포 기질은 고이 접어 두고 몸을 바짝 낮췄다.
“메니실 영애에게 접근한 이유가 뭔가?”
원작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이 번뜩 떠올랐다.
‘하지만 내가 원작을 완전히 바꿔 놓았으니 벌어질 리가 없는 일인데.’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저 여자는 파혼당해서 하자가 있는 여자가 아닙니까! 이 내가 그런 여자를 품어 주겠다는데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어처구니없는 그로반 남작의 주장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미친 건가?
아니면 진심으로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자네, 그거 진심인가?”
그의 표정이 너무나 진실돼 보여서 우리 모두 잠시 말을 잃었다.
“나 정도면 가문도 좋고, 어…… 얼굴도 괜찮고.”
“양심은 있군, 잘생겼다고는 안 하는 걸 보니.”
카시안의 빈정거림에 그는 발끈하며 소리쳤다.
“네년은 그 건방진 입을…… 컥!”
더는 같잖은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마치 내 마음을 아는 것처럼 나타니엘이 그의 몸을 뻥 차 버렸다.
데굴데굴 굴러 벽에 처박힌 그로반 남작은 꽥꽥 비명을 질러 댔다.
나타니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황궁 내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처분은 황족의 권위로 즉결 심판이 가능하지.”
그로반은 나타니엘을 간절한 표정으로 보았다.
그러나 나타니엘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신성한 황궁에서 사사로이 제 욕구를 채우려 힘없는 아녀자를 강제로 취하려 한 죄를 물어 아닉스 그로반의 생식 능력을 제거한다.”
“무, 무슨! 말도 안……!”
그로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곧 비명을 지르며 미친놈처럼 울기 시작했다.
“만일 비슷한 일이 한 번 더 벌어질 경우엔 목이 잘릴 수 있도록 방지 마법도 걸어 두지.”
“이…… 이럴 수는 없습니다, 저 여자가 먼저 날 유혹했다고!”
거칠게 몸을 틀며 소리를 질러 대는 그로반 남작을 향해 막시밀리안이 침을 뱉었다.
“닥쳐.”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라 나는 불안한 얼굴로 오라버니의 손목을 잡았다.
“일단 공작저로 돌아가요.”
“난…….”
“내 말 들어요. 테레사 언니가 일어나면 바로 알려 줄게요.”
울면서 나타니엘에게 용서를 비는 그로반 남작을 한 번 본 뒤,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없는 편이 테레사에게 낫겠지.”
씁쓸함이 가득 밴 목소리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막시밀리안이 방을 나가는 순간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