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연회장은 소리 없는 전쟁터 2022.05.07.
그의 입에 과일 조림 파이를 넣어 주던 나는 잠시 행동을 멈췄다. 누가 누굴 보고 귀엽다는 거지? 너무 엄청난 생각을 한 나 자신에게 놀랐다.
“왜 그러지?”
“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입 안에 들어오던 간식거리가 사라지자 나타니엘은 짜증이 난 것처럼 보였다. 날 내려다보는 붉은 눈을 멍하니 보며 입에 파이를 넣어 주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저기 네 멍청한 핏줄이 와 있다.”
“네?”
나타니엘의 말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말대로 멍청한 막시밀리안이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옷도 어딘지 엉성하게 입고 있는 게, 꼭 정신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저 미친놈이 어떻게 여기에 왔지?”
저 녀석은 지금 공작령에 내려가서 새 나라의 일꾼으로 살고 있어야 하는데? 다행히 우리 외에는 막시밀리안의 존재를 알아차린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막시밀리안은 늘 완벽한 모습만 보여 왔으니까. 대체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막시밀리안은 초대한 적 없지만, 테레사는 초대했기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러다가 다시 둘이 마주치게 되면 내일 신문의 일 면을 장식할 기사는 뻔했다.
“가서 이야기 좀 해 봐야겠어요.”
나는 급하게 나타니엘의 손을 잡고 막시밀리안에게 향했다. 나타니엘이 움찔하며 손을 빼려는 걸 느꼈지만,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만일 설득이 안 되면 힘으로라도 쫓아내야 했다.
“오라버니!”
“아, 제이나. 황태자…… 전하.”
영지에 가서 꽤 굴렀는지 얼굴이 핼쑥해 보였다. 눈 밑도 푹 들어가고, 거뭇거뭇한 게 잠을 제대로 잔 것 같지 않았다. 한마디로 다 죽어 가는 꼴이었다. 분명 내려가기 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영지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싶었다.
“여긴 대체 무슨 일이에요?”
“테레사를 보러 왔는데…….”
뻔뻔한 막시밀리안의 대답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뭐가 어쩌고 저째?
“오라버니가 메니실 영애를 봐서 뭐 하게요?”
“아니야, 만나려는 게 아니라 걱정이 되어서……. 얼굴만 확인하러 온 거야.”
“걱정?”
무언가 이상했다. 평소의 그 당당하고 뻔뻔한 모습이 아니었다. 당장 쫓아낼 생각이었는데, 상태를 보니 힘들 것 같았다.
“일단 들어가서 쉬도록…… 오라버니?”
막시밀리안은 갑자기 화들짝 놀라더니 몸을 돌려 얼굴을 숨겼다. 왜 그러나 하고 뒤를 보자 테레사가 카시안과 함께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그녀의 안색도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막시밀리안보다는 나았다.
“잘 살고 있구나…….”
전보다 당당한 태도의 테레사는 카시안과 함께 또래 영애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막시밀리안의 애틋한 눈이 테레사를 좇았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를 보며 말했다.
“그럼 뭐, 헤어지면 죽는 줄 알았어?”
“그건 아니지만…….”
욕이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테레사를 보는 눈빛에 담긴 감정들은 진심으로 보였다. 이제 와서 저러는 꼴이 한심하긴 했지만, 애잔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둘은 끝난 사이였다. 테레사도 막시밀리안도 서로를 정리하고 새로운 삶을 살 필요가 있다.
“뭐 때문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테레사를 생각한다면 눈에 띄지 마.”
“…….”
“잘 살고 있는 것도 확인했잖아.”
“그래…….”
그의 반응이 이상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지난번에 연회에서 만났던 드미트리 백작이 테레사에게 다가갔다. 상냥하게 춤을 신청하고, 플로어로 나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테레사가 이런 연회를 좋아하는지 몰랐어.”
“오라버니가 한 번도 데려가지 않았잖아.”
“가고 싶다는 말이 없길래…….”
그의 말에 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막시밀리안과 일찍이 약혼했던 테레사는 늘 악담에 시달렸다.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앉은 미운 오리 새끼. 귀족들은 테레사를 그렇게 여겼다. 그 탓에 테레사는 막시밀리안이 자신을 부끄러워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기다렸다. 막시밀리안이 자신에게 손을 내밀기를.
“오라버니가 먼저 함께 가자고 해 주길 기다렸겠지.”
“난…….”
“알아. 테레사가 이런 시끄러운 자리를 싫어할 거라 생각한 거.”
역시 근본적으로 둘은 너무 안 맞았다. 서로를 배려한답시고 속에만 담아 두고 표현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표현의 부재가 커지면서 점점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사라졌다. 그리고 더는 닿을 수 없을 만큼 멀어져 버린 것이다. 나는 길게 한숨을 쉬고 막시밀리안의 어깨를 두들겼다.
“오늘은 일단 빨리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그는 테레사가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보고는 몸을 돌렸다. 잔뜩 움츠러든 등이 오늘따라 더 처량해 보였다.
“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길게 한숨을 쉬며 벽에 등을 기댔다. 지나가는 시종에게서 시원한 음료를 받아서 홀짝였다. 하지만 속에 무언가가 얹힌 것 같은 느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러다가 내가 화병으로 먼저 죽게 생겼다.
“소공작은 신기한 사람이군.”
“제 말이요.”
“그렇게 좋으면 가서 말하면 되는 거 아닌가?”
나타니엘의 말에 그를 노려보았다. 겨우 헤어졌는데 고백을 하라니.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그대가 세운 그 이상한 계획은 완전히 망하지 않았나.”
“아니, 뭐 그야 그렇지만…….”
그래. 내가 처음 세웠던 계획은 아주 거하게 망했다. 결과적으로 나타니엘과 결혼한 사람은 내가 되어 버렸으니까. 그렇다고 막시밀리안이 다시 테레사와 이어진다고?
“한번 헤어진 연인들은 다시 만나고 나서도 또 같은 이유로 헤어진다고요.”
“되게 잘 아는 것처럼 말하네.”
나타니엘의 목소리가 미묘하게 낮았다. 왠지 모를 한기에 나는 눈만 깜빡거렸다.
“아, 뭐……. 제가 왕년에 연애 상담을 좀 많이 해서.”
“그 정도로 친구가 많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 보는데.”
“아니, 저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아신다고 그러세요.”
잘못된 답변이었나 보다. 그의 얼굴이 더 어두워졌다. 나는 다급하게 다른 변명을 떠올렸다.
“그, 그냥 로맨스 소설을 좋아해서…….”
“소설?”
“네……. 책으로 배운 연애라고 할까요.”
전생에는 그래도 친구들이 꽤 있었다고요, 라는 핑계를 댈 수 없으니 비슷한 무언가로 대체하기로 했다. 다행히 내 변명이 마음에 들었는지 나타니엘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것보다 난 소공작이 신기하군. 그의 성격이라면 허락을 받을 때까지 매달릴 줄 알았거든.”
나타니엘의 말도 맞았다. 원작에서 막시밀리안은 후회를 시작한 직후 테레사에게 매달렸다. 그녀가 받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해를 시도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얌전했다. 원작이 바뀐 탓일까? 그것도 아니면…….
“거절당하는 게 두렵나 보죠.”
“그래도 그대의 가족인데 냉정하군.”
나는 원작의 막시밀리안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사랑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었다. 자신을 위해 놓아 달라는 테레사의 말을 막시밀리안은 끝까지 거절했다. 나는 그것이 싫었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사랑은 폭력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아요.”
내 대답에 나타니엘은 잠시 말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자 나타니엘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왜요?”
“가끔 그대는 내가 모르는 얼굴을 하는군.”
가만히 손을 뻗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겨 귀에 꽂아 주었다. 뺨에 스치듯 닿은 체온이 차갑다. 그에 비해 나를 보는 눈빛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저, 저는…….”
“황태자 전하, 황태자비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언제 가까이 왔는지 카시안이 동생과 함께 불쑥 인사를 건넸다. 나는 가까스로 나타니엘에게서 시선을 돌려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게.”
“두 분은 여전히 사이가 좋으시군요.”
“하하, 전하께서 워낙 잘해 주셔서 그저 감사할 뿐이지.”
우리는 간단한 안부를 서로 건네고는 파트너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옮겼다. 단둘이 남게 되자, 나는 드미트리 백작에 관한 것을 물었다.
“백작은 뭐야? 그때 이후로 테레사랑 연락한 거야?”
“그랬나 봐요. 아까 살짝 물어보니까 서로 편지만 했다는데요.”
“오우.”
나와 카시안은 멀리서 둘을 살펴보았다. 드미트리 백작은 테레사를 정중하게 대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잘 어울리는걸.”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먼 지방 출신이라 사교계의 남자들보다는 좀 투박한 편이지만요.”
“투박?”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몰라 되묻는 내게 카시안이 설명을 덧붙였다.
“세련된 사람은 아니라는 거죠. 말도 빙빙 돌려 말할 줄 모르고, 아주 정직해요.”
카시안의 말에 둘을 보았다. 드미트리 백작의 얼굴에 테레사가 좋다고 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네.”
수도의 사교계에 익숙한 막시밀리안과는 완전 반대의 사람이었다. 자존심 때문에 마음을 숨기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막시밀리안과 정반대인 그가 테레사의 마음을 치유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카시안이 돌아가고 나서 나와 나타니엘은 본격적으로 사람들에게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최대한 우리의 우호적인 관계를 귀족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 중요했다. 제일 먼저 찾아가서 인사를 한 이는, 당연히 아버지였다.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아버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조금 전부터 이쪽을 뚫어져라 보고 계셨으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 비 전하.”
가까이 다가가자 얼굴에 화가 가득했다. 아마 바로 인사를 드리러 오지 않아서 화가 나신 것 같았다.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뵙게 되니 제가 다 안심됩니다. 혹시나 오시는 길에 눈이라도 멀어서 절 못 찾으시는 줄 알았거든요.”
“그럴 리가. 그냥 다른, 윽!”
나는 나타니엘의 발을 콱 밟아 입을 막았다. 역시 눈치 없기로는 막시밀리안 못지않은 놈이야.
“당장이라도 오고 싶었죠. 그런데, 오는 길에 엄청난 걸 봤지 뭐예요.”
나는 아버지의 팔에 가볍게 팔짱을 끼고 테라스 쪽으로 잡아당겼다. 아직 화가 덜 풀린 듯 쉽게 끌려오지 않았다. 뒤꿈치를 들어 올려 아버지의 귓가에 속삭였다.
“세상에 오라버니가 와 있는 거 있죠.”
“뭐, 뭐……!”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를 칠 뻔했던 아버지는 재빨리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버지도 모르시는 걸 보니 정말 몰래 숨어들어 온 것 같았다.
‘능력도 좋아. 어떻게 황실에서 열리는 연회에 초대장도 없이 들어올 수 있었지?’
이번 연회가 끝나면 나타니엘에게 말해서 경비를 더 강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녀석이 여기는 대체 왜 왔다고 그러더냐?”
“메니실 영애를 보러 왔다고 하더라고요.”
“어, 어휴…….”
아버지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한숨을 길게 쉬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손등에 손을 올려 다독였다.
“일단 제가 잘 타일러서 돌려보내기는 했어요. 너무 화내시지 말고 가서 잘 다독여 주세요.”
“그래, 그래야겠구나.”
아버지 역시 막시밀리안이 걱정되었는지 돌아가 봐야겠다고 말하며 연회장을 떠나셨다. 일을 마무리하고 나자 힘이 탁 풀렸다. 하지만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다.
“자, 가요. 빨리빨리 해치워 버립시다.”
“괜찮겠나? 피곤해 보이는데.”
“그렇다고 해야 할 일을 내팽개칠 수는 없죠.”
나타니엘은 내 팔을 자신의 팔에 걸치게 했다.
“적당히 기대면서 다녀. 그럼 사이가 좋은 줄 알겠지.”
뜻밖의 친절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나왔다.
“고마워요.”
내 말에 나타니엘은 가만히 나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몇 달 그의 곁에 있어서 그런가. 지금 그가 부끄러워서 말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 갑시다!”
우리는 커튼을 걷으며 전쟁터 같은 연회장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