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귀엽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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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귀엽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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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귀엽다고?
2022.05.04.
하늘색 빛이 살짝 도는 흰색 제복은 그에게 그린 것처럼 잘 어울렸다.
몸에 딱 맞는 옷 위로 드러난 가슴과 팔뚝의 윤곽에 나도 모르게 눈이 갔다.
조금 창백해 보이는 얼굴 위로 서늘한 눈이 오늘따라 부드러워 보였고, 흑단같이 까만 머리를 넘겨 드러난 이마가 희게 빛났다.
분명 평소와 다를 게 없는 나타니엘인데, 오늘따라 너무 빛이 났다.
‘내 눈이 이상한 건가?’
방 안에 있던 시녀들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입을 반쯤 벌린 채로 나타니엘만 바라보았다.
그의 주변만 환하게 빛나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
‘무슨 일이야, 뭔데 저렇게 잘생겼냐고!’
생각해 보니 저렇게 한껏 멋 부린 모습을 제대로 본 건 처음이었다.
결혼식 때도 이랬었나?
심지어 무심한 얼굴로 내게 손을 내미는 것에도 가슴이 뛰었다.
“문제 있나?”
침묵이 이어지자 나타니엘이 미간을 구기며 짜증을 냈다.
혹시라도 그가 화를 낼까 봐 나는 재빨리 단상 위에서 내려왔다.
“아닙니다, 전하. 오늘따라 너무 멋져 보이셔서 놀란 것뿐이에요.”
“…….”
재빨리 그의 칭찬을 하면서 기분을 풀어 주려 알랑거렸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찬양을 늘어놓자 나타니엘은 살짝 질린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그래도 조금 누그러진 게 느껴졌다.
“가지.”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그의 손에 내 것을 올렸다.
그의 손을 잡고 문을 열고 나오자 드디어 긴장되기 시작했다.
이번 연회는 그냥 평범한 연회가 아니었다.
공작가와 황실이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으며, 나와 나타니엘 사이가 친밀하다는 걸 보여 주어야 했다.
‘그래야지 아나이스 황녀의 사건을 조금이라도 덮을 수 있지.’
사실 우리 결혼이 아무리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해도, 황녀가 결혼식에서 퇴짜 맞는 전무후무한 사건이 잊히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막시밀리안에 대한 적개심이 치밀어 올랐다.
그 일로 아나이스가 황후에게 어떤 일을 당했을지 안 봐도 뻔했다.
“무슨 생각 하나?”
“네?”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군.”
나타니엘의 말에 시선을 돌리자 그의 손을 꽉 쥔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손에 힘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헉, 죄송해요. 아, 아프셨나요?”
“그대 손이 더 아파 보이는데.”
그렇게 말하니 손이 살짝 저리는 것도 같았다.
부끄러움에 손을 빼려 하자 이번에는 나타니엘이 힘을 주었다.
“그렇다고 빼지는 말고.”
장난기 탓인지, 날 보는 붉은 눈이 묘하게 반짝거렸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부터 열이 올라오는 느낌이다.
하녀들이 우리를 힐끔대며 지나쳐 갔다.
눈빛에 담겨 있는 것은 부러움과 놀라움이었다.
‘하긴, 원작에서 나타니엘은 성격 파탄자였지.’
이렇게 제대로 옷을 차려입고 누군가를 에스코트하며 연회에 참석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아마 이건 황후도 같은 생각일 것이다.
‘그래서 내게 반드시 참석하라고 그런 거야. 혼자 올 거라고 생각하고.’
안타깝지만 황후의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나아졌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어서 가요. 폐하께서 기다리시겠어요.”
우리는 복도를 지나 내가 꾸민 연회장에 들어섰다.
계절에 맞춰서 흰색과 푸른색 휘장으로 시원하게 연출했다.
곳곳을 장식한 꽃 장식까지 더해져서 지금까지 황실에서 주최하던 연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아기자기하고 발랄한 느낌이라 누가 보아도 황후가 꾸민 것과는 궤가 달랐다.
나는 왠지 뿌듯해져서 나타니엘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예쁘죠?”
“뭐가?”
“연회장이요. 저랑 아나이스 황녀님이 같이 꾸몄어요.”
나타니엘은 주변을 스윽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색다르긴 하군.”
“칭찬이에요?”
“칭찬이다. 그동안은 너무 화려해서 눈이 아팠거든.”
가끔 아버지와 막시밀리안이 황실에서 주최한 연회에 가면 눈이 피곤하다고 했던 기억이 났다.
주변을 살피자 초대된 귀족들도 표정이 밝았다.
“그대에 대한 칭찬이 많았나 보군. 황후의 표정이 영 별로인 걸 보니.”
그의 말대로 황후는 뭘 잘못 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누군가가 와서 인사를 하고, 떠날 때마다 얼굴색이 더욱 어두워져 갔다.
우리는 천천히 황제와 황후에게 다가갔다.
“제국의 태양과 달을 뵙습니다.”
배운 대로 인사를 하는 나와 달리 나타니엘은 고개만 까닥였다.
황후의 얼굴은 단박에 구겨졌고, 황제는 익숙한 듯 허허 웃고만 있었다.
“그래, 이번 연회를 준비하느라 제이나가 아주 고생이 많았다. 오늘 보니 젊은 감각이 돋보이는구나.”
“칭찬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 혼자 한 게 아닙니다. 아나이스 황녀가 도와주었습니다. 특히 꽃 장식을 도와주셨어요.”
내 말에 황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나이스가? 허허…… 그 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를 줄 알았더니, 이런 데에 재능이 있었구나.”
“황녀님의 식견에 전 감탄한 것밖에 없습니다, 폐하. 특히 꽃과 화초에 대한 안목이 높아, 여기 장식한 것들은 모두 아나이스 황녀님이 선택한 것들이랍니다.”
입바른 소리가 아니었다. 꽃과 나무에 대한 아나이스 황녀의 지식은 정말 굉장했다.
그녀는 흔치 않으면서도 우아한 모습의 꽃을 추천해 주었다.
덕분에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내 아나이스에게 큰 상을 내려야겠구나.”
“뭐 그런 거로 상을 내리십니까.”
황후가 끼어들어 입술을 삐죽였다.
이런 연회 장식에 있어서 남들이 다 아는 꽃으로 장식하면 뒷말이 나오기 쉬웠다.
장식에서도 부와 지식을 자랑할 줄 알아야 했다.
죽은 전 황후가 준비했던 연회는 아직도 회자될 정도로 독특하고 화려한 꽃들로 유명했다.
그에 반해 황후의 연회는 오로지 부를 강조했다.
그 탓에 귀족들 사이에서 황실이 너무 사치를 부리는 것 아니냐는 말이 종종 나오고 있었다.
“아니지, 아니야. 이렇게 분위기 좋은 연회를 열도록 도와주었으니 내 상을 내려야지.”
“분명 아나이스 황녀님도 기뻐할 겁니다, 폐하.”
“하하하. 그래, 그래.”
가까이서 지켜본 그는 황제로서의 능력은 나쁘지 않았지만 적어도 좋은 부모는 아니었다.
가족을 아끼는 것처럼 보였지만, 꼭 필요한 순간에는 발을 빼거나 선택을 강요했다.
아마도 상을 주겠다는 것 역시, 이걸로 더는 황후를 문책하지 않겠다는 제스처일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가 최선이겠지.’
황제는 힐끔 황후의 눈치를 보고는 우리를 향해 인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나타니엘은 아프다더니 많이 좋아졌고?”
“예. 별것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나타니엘을 약 올리듯 황후가 입을 열었다.
“조심하세요, 황태자. 집안에 불치병 전적이 있으니,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황후!”
“한 번도 안 아프던 사람이 아프니 걱정되어 그러는 거지요.”
마지막까지 긁어 대는 황후의 빈정거림에 나도 모르게 나타니엘의 손을 꼭 잡았다.
혹시나 그가 멋대로 마법을 쓸까 무서웠다.
나타니엘은 내 손을 힐끔 보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걱정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무감정한 목소리.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바짝 긴장했던 황제도 어색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래.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하자.”
우리는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단상을 내려왔다.
단상에서 멀어지자 나는 나타니엘의 손을 잡고, 몸을 숙여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잘 참으셨어요.”
“틀린 말도 아니니까.”
그래도 기분이 상한 것은 맞는지 나타니엘은 뚱한 표정이었다.
괜히 내가 다 미안했다.
“나타니엘, 뭐 좀 마실래요?”
내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지나가는 시종에게서 샴페인을 받아 와 나타니엘에게 건넸다.
가만히 잔을 보던 나타니엘이 한 모금 마셨다.
“달군.”
“처음 먹어 봐요?”
내 질문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꽤 마음에 들었는지 홀짝거리며 금세 한 잔을 비웠다.
나는 체리가 올라간 작은 치즈케이크를 포크로 찍어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오물오물하며 씹는 모습이 귀여웠다.
‘응?’
그러고 보니 이제 내가 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원래 나타니엘은 누군가가 검식하지 않은 음식은 절대 먹지 않았는데.
나는 믿는다는 뜻일까? 아니면 경계가 조금 누그러진 걸까.
어느 쪽이든 좋은 일이었다.
여태껏 살펴본 나타니엘은 먹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끼니를 때운다는 느낌으로 음식을 먹었지, 맛을 음미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단걸 좋아하나?’
나는 다디단 디저트 와인을 군말 없이 마시는 나타니엘을 보며 뿌듯해졌다.
그러고는 곧, 황후가 죽은 나타니엘의 어머니를 언급한 걸 떠올렸다.
원작에서는 거의 언급이 없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불치병이라니.
혹시 테레사와 같은 병은 아니었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와중에 나타니엘이 불쑥 입을 열었다.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예?”
“뭔가 말하고 싶은 표정인데…….”
“아니요, 아무 생각 안 했는데요.”
차마 나타니엘에게 어머니의 불치병에 대하여 물을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분명 어린 나타니엘에게 상처를 입혔으리라.
나는 입을 꾹 닫고 고개를 저었다.
“별거 아니…….”
“어머니에 대해 묻고 싶었던 거 아닌가?”
툭 던진 질문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독심술 같은 것도 할 줄 아나?
미안한 마음에 나는 어쩔 줄 몰라 입만 벙긋거렸다.
“미, 미안해요. 호기심 때문이라든가 그런 건 아니고요…….”
“괜찮아. 다들 건강하셨던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신 것에 대해 말이 많긴 했지.”
“그랬나요?”
“응. 독살이라는 소문도 있었고.”
독살이라는 말에 놀라서 하마터면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나타니엘은 힐끔 나를 보고는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물론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 그렇군요.”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나는 손을 뻗어 나타니엘의 어깨를 토닥였다.
“분명 돌아가시기 전에 나타니엘을 많이 걱정하셨을 거예요.”
“글쎄.”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남은 와인을 털어 넣었다.
잔을 내려놓은 그는 내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 애정을 과시하러 갈까? 그대가 원하던 대로.”
“제, 제가 언제요.”
“그것도 아니면 이렇게 옷까지 맞춰 입을 필요가 있나.”
“그, 그야…….”
불의의 일격에 입을 꾹 닫자 나타니엘이 피식 웃으며 내 손을 잡아당겼다.
나는 그의 손에 이끌려 플로어로 향했다.
허리에 자연스럽게 손이 올라왔다.
금관 악기의 부드럽고 힘찬 도입부와 함께 그가 천천히 스텝을 밟으며 돌기 시작했다.
음악에 맞춰 플로어를 가로지르자 그의 머리가 살짝 흐트러져서 날렸다.
샹들리에 아래에 음악과 나타니엘만이 가득한 느낌.
나는 멍하니 그를 보며 다리를 움직였다.
“딴생각하지 말고.”
“윽. 다른 생각 안 했거든요.”
“방금 스텝 틀린 거 알지?”
나타니엘의 말에 나는 입을 꾹 닫았다.
역시 내가 아는 그가 맞았다.
춤이 끝나고, 우리는 벽 쪽으로 빠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다정한 나타니엘의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나타니엘은 몸을 숙여 내게 속삭였다.
“좀 더 친한 척 해봐.”
이렇게까지 친한 척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
너무 가까워서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왜, 왜 그러시는데요.”
나타니엘은 말없이 턱으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고개를 돌려 보니 묘한 얼굴의 황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냥 봐도 화나 보이잖아. 속 좀 더 긁어 보게.”
황후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나와 나타니엘의 사이가 좋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나는 반신반의하면서도 나타니엘의 말에 따라 주기로 했다.
나는 하인에게 그가 좋아할 만한 작은 구움 과자를 가져오라 시켰다.
“이것도 먹어 봐요.”
“이건 뭐지?”
“휘낭시에인데, 안에 초콜릿 크림을 채운 거예요.”
이번 연회를 준비할 때, 내가 전생에 먹었던 디저트 몇 가지를 주문해 두었다.
단걸 좋아하는 나타니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이다.
처음 보는 형태의 과자에 나타니엘의 의심스러운 시선이 꽂혔다.
“맛있다니까요.”
내 성화에 못 이겨 나타니엘이 입을 벌렸다.
나는 그 안으로 휘낭시에를 쏙 집어넣었다.
미간을 구긴 채로 천천히 먹던 나타니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맛있죠?”
“응.”
나는 다른 디저트들도 그에게 먹여 주었다.
내가 주는 음식들을 곧잘 받아먹는 모습이 꼭 강아지 같았다.
“이건 좀 새콤한 느낌이군.”
“안에 과일 조림이 들어 있거든요.”
무표정한 얼굴로 뭐든 잘 먹는 모습이 너무 귀여……. 잠깐.
‘귀엽다고?’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