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아픈 건 처음이라
(24/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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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아픈 건 처음이라
2022.04.23.
나타니엘은 약을 먹고 나자 움직이는 게 조금 쉬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 정도면 금방 잡고 쉴 수 있겠군.’
몸이 나아졌다지만 평소와는 확실히 달랐다.
나타니엘은 주변을 마구잡이로 부수며 앞으로 전진했다.
‘이 숲에서 제일 큰 놈으로 잡아간다.’
그는 말을 달리며 이 대회를 빨리 끝낼 방법을 궁리했다.
곧 그가 펼친 그물망 같은 마력에 무언가가 잡혔다.
대충 크기를 보니 곰인 것 같았다.
나타니엘은 바로 그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숲 안쪽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무언가 이상했다.
분명 훈련된 게 틀림없어 보이는 기사들이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황후인가?’
설마하니 황실에서 개최하는 사냥 대회에서 자신을 노릴까 싶었다.
그냥 자신을 지켜보는 수준일 것이다.
나타니엘은 짧게 혀를 차며 머리를 굴렸다.
‘저 날벌레 같은 것들을 전부 죽여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몸이 안 좋아지자 나타니엘은 이것도 저것도 볼 것 없이 모두 해치우고 싶어졌다.
- 그럼 어서 출발하세요.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시고요. 몸도 조심하고.
순간 자신을 보내며 제이나가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평소 같았으면 가볍게 처치하거나 몸을 숨겼겠지만 이번은 좀 달랐다.
아무래도 몸이 좋지 않은 탓에 약간의 부상은 감수해야 할 것 같았다.
‘다쳐서 돌아가면 귀찮게 굴 테지.’
잔소리를 들을 생각을 하니 벌써 머리가 아팠다.
나타니엘은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그들이 쫓아오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사냥감을 향해 내달렸다.
“뭐…… 뭐야!”
나타니엘이 속력을 올리자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마법으로 말의 속도를 올렸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말은 바람처럼 나타니엘을 태우고 사라졌다.
황후가 심어 놓은 사람들은 갑자기 사라져 버린 황태자의 모습에 당황했다.
“어떻게 할까요, 베네딕트 경.”
이 일의 책임자인 베네딕트는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놓치고 돌아가면 분명 황후에게 욕만 먹을 거란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때 뒤쪽에서 상황을 살펴보던 기사 하나가 베네딕트에게 고했다.
“황태자비가 쫓아오고 있습니다.”
“뭐?”
갑자기 나타난 황태자비의 존재에 그들 모두 당황했다.
철수하려던 베네딕트는 생각을 달리했다.
황태자비가 황태자를 찾을 수 있다면 기다렸다가 쫓아가는 건 어떨까.
‘어쩌면 추적 마법을 걸어 놨을지도 모르지.’
베네딕트는 곧 결단을 내렸다.
“황태자비를 쫓아간다.”
“예.”
그들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한편 말을 타고 한참을 달리던 여자들은 나타니엘이 사라진 지점에서 멈췄다.
* * *
“황태자 전하의 흔적이 여기서 끊겼습니다, 비 전하.”
“그런 거 같네.”
확실히 추풍낙엽처럼 쓰러진 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말을 타고 가다가 용이 된 건 아닐까 살짝 걱정스러웠다.
‘그 짧은 손으로 말 고삐나 잡을 수 있겠냐고.’
바닥과 주변을 유심히 살피던 루나가 내게 다가왔다.
“올라가신 방향은 알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좀 가파른 곳으로 알고 있어서요. 계속 따라가시겠습니까?”
“그러도록 하지.”
여기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분명 원작에서 제이나가 이 숲에서 용을 도와주었으니, 이번에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루나가 몸을 숙이더니 목소리를 낮춰 내게 말했다.
“저희의 뒤를 밟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 황태자 전하를 쫓던 사람들일 겁니다.”
“뭐?”
“아마도 눈치채신 황태자 전하께서 따라오지 못하게 도망치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황후의 친정에서 보낸 병사들을 떠올렸다.
“대충 어디 소속인지 예상은 가네만.”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숨어 다니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요. 제가 신호를 드리면 반지를 쓰십시오.”
루나의 말에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쩐지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지금 상황에 현실감이 없었다.
“그리고 흔적을 따라 위로 올라가세요. 황태자 전하께서는 그렇게 꼼꼼한 성격이 아니신지라 주변을 잘 살피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셨는지 금방 보일 겁니다.”
고개를 끄덕였다.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무조건 해내야 해.’
우리는 다시 말을 타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괜히 우리 뒤를 누군가가 쫓아온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오싹했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얼마나 올라갔을까.
바짝 긴장하고 있는 내게 루나가 신호를 주었다.
나는 곧바로 반지를 써서 나와 말을 투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루나가 가리킨 방향으로 빠르게 말을 몰았다.
* * *
나타니엘은 제 눈앞에 있는 오우거를 물끄러미 보았다.
기껏 올라왔더니 곰도 아니고 몬스터가 있다니.
“저것도 사냥감에 들어가는 건가.”
국경도 아니고, 수도의 한복판에 있는 적당한 크기의 숲에 나타났기에는 너무 과한 사냥감이었다.
게다가 한 마리인 줄 알았더니 새끼까지 총 세 마리였다.
“애들이 있는데 부모를 죽이기에는 좀 그런가.”
나타니엘은 공포에 질려 커다란 아버지로 추정되는 오우거 뒤에 숨어 있는 새끼들을 보았다.
“하, 사냥감을 다시 찾아야겠네.”
그러기엔 너무 귀찮았다. 그렇다고 맨손으로 돌아가면 분명 황후의 잔소리가 날아들 것이다.
그녀는 틈만 나면 나타니엘에게 흠집을 내기 위해 애를 썼으니까.
나타니엘은 오우거를 싹 다 잡아 가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몬스터들을 이 숲에서 살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의 몸에서 범상치 않은 힘이 흘러나오는 걸 느낀 오우거가 용감하게 앞으로 나섰다.
“고통 없이 죽여 주지.”
가족들을 지키려는 의지에 나타니엘은 입이 썼다.
붙어 볼 것도 없었다.
단숨에 나타니엘의 단정한 손 안에 두터운 오우거의 목이 붙잡혔다.
말도 안 되는 체격 차였으나 태생적으로 강력한 존재인 그에게는 한주먹 거리도 되지 않았다.
“우어어어!”
그때 어디서 다른 몬스터가 나타나 나타니엘의 몸을 힘껏 밀어냈다.
“뭐야?”
갑작스러운 공격에 바닥에 구른 나타니엘은 새로운 오우거의 등장에 당황했다.
조금 작은 체격의 그것은 바닥에 쓰러진 오우거를 지키듯 앞에 섰다.
그리고 자꾸 옆을 살피는 것이 새끼들까지 보호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보니 일가족이었다.
“젠장, 내가 꼭 나쁜 새끼가 된 느낌이잖아.”
심지어 새끼들은 울고 있었다.
나타니엘은 길게 한숨을 쉬며 바닥에 털썩 앉았다.
이상한 기분이다.
단 한 번도 무언가를 죽이는 데에 망설여 본 적이 없었다.
어차피 생명체라면 반드시 죽을 텐데 그게 제 손에 죽든, 무언가에 죽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타니엘은 제 눈치를 보며 남편으로 보이는 오우거를 일으키는 다른 오우거를 보았다.
‘몬스터도 자기 가족은 귀히 여기는군.’
그는 자신이 보아 온 가족들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자신을 사랑한다며 입으로 떠들고 다녔지만 그 자신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권력을 유지하고,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가족도 내버릴 사람이었다.
그는 죽은 어머니의 가문인 플로린스 공작가의 힘을 빌려 황권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 그렇게 사랑한다던 밀리아를 오랫동안 정부로만 두었다.
그리고 밀리아는 아이를 도구로 삼아 자신의 꿈과 야욕을 챙기기에 바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제 자식을 때리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는…….
“누군가가 이리로 오는군.”
나타니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능이 있는 것 같으니 숲 밖으로 나갈 일은 없겠지.’
여전히 경계하는 그들에게 멀리 가라 손짓했다.
나타니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길게 한숨을 쉬었다. 새로운 사냥감을 잡자니 귀찮아졌다.
다시 뒤를 돌아본 나타니엘은 그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이를 보며 당황했다.
“제이나?”
“전하! 세상에, 아직 멀쩡하시군요.”
밝게 웃으며 제게 달려오는 제이나를 보며 나타니엘은 당황했다.
그녀가 저런 복장으로 이 숲속에 갑자기 왜?
동시에 제이나에게 화가 났다.
“여긴 대체 왜 온 거야. 자기 몸 하나 지킬 수도 없으면서.”
“혼자 온 거 아니에요. 기사랑 같이 왔는걸요.”
뾰로통한 표정의 제이나가 투덜거렸다.
‘기껏 걱정해서 와 주었더니 왜 화를 내.’
투덜거리던 그녀는 나타니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일단 아래로 내려가요.”
나타니엘은 제 손을 잡은 제이나의 작은 손을 빤히 보았다.
작고 하얗고 보드라운 손에 기분이 좋았다.
“아직 사냥감을 잡지 못했어.”
“뭐 어때요. 나타니엘은 지금 아프잖아요. 그 상태에서 용이 되어 버리면 어떻게 해요.”
새끼 용이라 그런지 용이 된 나타니엘은 취약해진다.
사용할 수 있는 마력도 엄청나게 줄어들고, 기동성도 낮아져서 정말로 작은 몬스터와 다를 바 없었다.
원래라면 분기에 한두 번 정도 그런 일을 겪었지만 근래에 들어서 급격하게 용으로 변하는 횟수가 늘었다.
“걱정해 주는 건가?”
순순히 제이나의 손에 끌려 내려가던 나타니엘이 갑자기 물었다.
제이나는 자리에 멈춰 서더니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그 조그마한 모습으로 숲을 돌아다니다가 누가 사냥감인 줄 알고 화살이라도 쏘면 어떻게 해요!”
그녀의 말에 나타니엘은 멍하니 제이나의 눈을 보았다.
누군가가 그를 걱정해 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다들 그의 파괴적인 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염려하지 않았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빨리 내려가요. 황후 폐하가 욕하시거든 제가 나타니엘이 옆에 없는 게 너무 싫어서 데려왔다고 할게요.”
나타니엘은 투덜투덜하며 산을 내려가는 그녀의 뒤통수를 빤히 보았다.
“오늘은 건방진 것도 귀엽군.”
“네?”
제이나는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나와 같은 얼굴의 나타니엘은 태연하게 말했다.
“별거 아니다. 내려가도록 하지.”
그리고 자신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 * *
우리는 천천히 산을 내려갔다.
그런데 원래대로라면 보여야 할 루나와 떨거지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원래 루나 경이 여기서 적당히 막기로 했는데.”
내 말에 나타니엘은 주변을 살폈다.
나는 혹시 루나가 흔적을 남겼을까 싶어서 주변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르릉.”
그때, 어딘가에서 들리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급하게 나타니엘 쪽으로 향한 나는 그의 팔을 붙들었다.
“나…… 나타니엘.”
내 말에 나타니엘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작고 아담한 크기의 숲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괴수가 거기에 있었다.
사람의 몇 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뱀.
“서…… 설마 루나 경이 잡아먹힌 건 아니겠죠?”
쩍 벌어진 입에서는 독액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그거야 모르지.”
나타니엘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것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