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좋은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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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좋은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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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좋은 가족
2022.04.16.
아나이스의 반응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원작에 따르면 그녀의 어린 시절은 꽤 고단했다.
죽은 전 황후의 추적을 피해야 했고, 현 황후의 패악도 받아내야 했으니.
그럼에도 아나이스에게 믿을 사람은 현 황후 한 명뿐이었을 것이다.
“황녀님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든 상관없어요. 저는 지금 황녀님이 당하는 일이 부당하므로 나서는 것뿐이에요.”
나는 아나이스의 말간 눈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다음에 또 도움이 필요하시면, 주저하지 말고 저를 찾아오세요. 제가 불편하면 황태자 전하에게 찾아가셔도 되고요.”
“원하는 게 있는 거라면 그냥 말해요. 괜히 환심 사려고 하지 말고.”
잔뜩 날이 선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마음 한구석이 쓰렸다.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뜻이니까.
나와 우리 가문이 그녀를 거기까지 몰아세운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의도는 없어요. 그냥 제가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요.”
어쩌면 지나친 오지랖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
내가 사랑했던 이야기의 구성원이 모두 행복하길 바란다면, 내 욕심일까?
흔들리는 눈동자를 빤히 보던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나이스가 움찔하며 뒤로 빼려던 손에 힘을 주어 단단히 쥐었다.
그리고 우리는 말없이 황녀가 머물고 있는 동궁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궁 앞에 도착했다. 나는 그제야 손을 놓고 뒤로 돌았다.
“편히 쉬세요.”
나는 황녀에게 인사를 하고 황태자궁으로 돌아왔다.
격렬한 하루였다.
지친 나는 넓은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쉽게 잠이 오지 않아서 이리저리 뒤척거렸다.
그 순간, 달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타니엘이 들어오려는 건가 싶어서 몸을 일으켰다.
“어? 어쩐…… 일이세요?”
웬일로 사람의 모습을 한 나타니엘이 서 있었다.
그는 눕지 않고 가만히 내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침대 위에 앉았다.
“내 방인데 무슨 일이 있어야 올 수 있는 건가?”
“어, 그야 그렇지만…….”
당신은 용으로 변하지 않는 이상 여기에 안 왔잖아요.
나는 마음의 소리를 누르고 간신배처럼 그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자연스럽게 내가 데워 놓은 자리의 반절을 빼앗은 나타니엘이 내 쪽으로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는 나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결국 나는 옆으로 누워 나타니엘과 마주했다.
“왜 그러시는데요.”
“그렇게까지 아나이스를 돕는 이유가 궁금해서. 테레사야 그대의 친구였다지만, 아나이스는 만난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는가?”
“힘든 사람이 앞에 있고, 제가 도와줄 수 있잖아요.”
나타니엘은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나타니엘은 제가 넘어지면 와서 도와주지 않으실 건가요?”
“그야 당연히…….”
나는 그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나타니엘은 마지 못해 입을 열었다.
“도와주었겠지.”
“그렇죠? 저도 그런 거예요. 전 겁쟁이여서 나타니엘이 없었으면 이렇게 못 했을걸요?”
까칠한 줄 알았던 나타니엘이 군말 없이 나를 도와주어서 다행이었다.
아나이스가 나타니엘의 친동생도 아니고, 사실 이 일에 그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었다.
그날 자기는 안 가겠다고 거절했다면 지금보다 더 일이 힘들어졌을지도 몰랐다.
새삼 나타니엘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나는 방긋 웃었다.
“정말 고마워요, 나타니엘.”
“별거 아니다.”
그는 휙 몸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
오늘따라 이 남자가 유순해 보인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톡톡 쳐 주었다.
파충류여서 그런가?
뺨이 서늘해서 기분이 좋았다.
“저도 나타니엘이 위험에 처하면 꼭 도와줄게요.”
나타니엘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에게 싱긋 웃어 주고 바로 누워 잠을 청했다.
그래도 혼자 잘 때보다는 옆에 사람이 있는 게 낫구나, 생각하며.
* * *
옆에서 제이나가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그러나 누우면 바로 잠이 들곤 했던 나타니엘은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 나타니엘은 제가 넘어지면 와서 도와주지 않으실 건가요?
당연히 그녀를 도와줄 거라고 생각한 나타니엘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제 평생 누군가를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던가?
잠시 천장을 보며 고민하던 나타니엘은 다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 꿈나라로 떠난 제이나의 뽀얀 얼굴에 괜히 울컥 화가 났다.
누구는 지금 고민 탓에 잠도 안 오는 데 저렇게 태평하게 자는 꼴이라니.
나타니엘은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제이나의 뺨을 꼬집었다.
“우…… 으.”
손끝에 닿는 말캉한 감촉이 마음에 들었다. 나타니엘은 가만히 그녀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손 아래에서 이래저래 바뀌는 얼굴이 웃겨서 나타니엘은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누군가와 이렇게 오랫동안 접촉해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처음인가.’
어쩌면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을지도 모르지, 나타니엘은 자신을 합리화했다.
제이나의 얼굴을 맘껏 가지고 놀고 나자 잠이 왔다.
그는 크게 하품을 하고 눈을 감았다.
생각하는 건 미뤄 두기로 했다.
* * *
그날 이후 나타니엘과 한방에서 같이 자는 날이 많아졌다.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비록 황후가 근신 처분을 받으면서 연회 준비를 반쯤 내가 맡게 되어 피곤하긴 했지만.
황태자궁에 따로 마련된 준비실에서 아나이스가 한 번 솎아 둔 꽃과 장식들을 보았다.
이 정도 규모의 연회는 나도 처음이라 꽤 시간이 빠듯했다.
게다가 내가 어찌나 살뜰하게 황후를 방해했는지 날짜는 촉박한데 일은 반도 되어 있지 않았다.
‘아, 과거의 나야.’
나는 불과 얼마 전의 나를 원망하며 꽃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신지매만 놓으면 좀 심심할 것 같으니 다른 꽃도 넣는 건 어떨까요?”
“흠. 다른 꽃이면 좀 색이 있는 여름꽃으로…….”
준비를 돕는 하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황녀의 하녀가 문을 두들기고 들어왔다.
“비 전하, 아나이스 황녀님께서 오셨습니다.”
“어? 들어오라 해요.”
아나이스가 어쩐 일로 날 찾았지?
곧 준비실 안으로 아나이스가 들어왔다.
감정이 가라앉았는지, 며칠 전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어서 와요, 아나이스 황녀님. 이쪽에 앉으시겠어요?”
“고마워요, 반겨 줘서.”
쭈뼛쭈뼛하며 내 반대편에 앉은 아나이스는 커다란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나는 일부러 밝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상당히 덥죠? 시원한 음료수라도 마실래요? 얼마 전에 제 친구가 보내 준 차가 있는데 냉침 해서 마셨더니 정말 좋더라고요.”
“한 잔만 부탁해도 될까요?”
지난번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이 날씨에도 상처를 가리려 긴소매를 입고 있는 아나이스를 배려해 일부러 시원한 차를 권했다.
“요즘 연회 준비 때문에 많이 바쁘시죠?”
“뭐, 어쩌겠어요. 그렇다고 취소할 수도 없으니까요.”
나는 이미 다 내려놓고 준비를 했다.
격식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 연회가 무사히 열리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초대장을 쓰는 것도 일이어서, 요즘은 하녀 한 명에게 내 필체를 가르치고 있었다.
도저히 혼자서는 기간 내에 다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제가 연회 준비를 좀 도와드려도 될까요?”
“네?”
아나이스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나는 깜짝 놀랐다.
도움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혼자 하는 것보다는 둘이 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좋아요. 저야 좋죠. 앞으로 잘 부탁해요, 황녀님.”
내 대답에 아나이스가 활짝 웃었다.
그녀가 도와주기 시작하자 속도가 배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나이스는 신지매를 보고 기절할 뻔했는데, 이유를 듣고 나자 너무 어처구니없었다.
“제 부케에도 이 꽃이 있었는걸요.”
“어? 그래요?”
고작 그런 일로 사람을 치다니.
더욱 황후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럼 이렇게 해요.”
나는 여름이라는 계절에 맞춰 파란색 델피늄과 연한 분홍색 작약을 더하기로 했다.
어차피 쓰기로 한 거, 다른 꽃을 곁들이면 더 예쁠 것이 틀림없다.
메인이 되어 줄 꽃 장식이 결정되자 나머지는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신지매와 같은 느낌을 살리기 위해 연회장 내부는 얇고 반투명한 흰색 천으로 꾸미고, 색감 있는 꽃을 돋보이게 하는 데에 주력했다.
요리와 곁들일 음료, 술까지 결정하고 나자 얼추 일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자리 배치랑 그날 입을 드레스를 결정하고, 어떤 음악을 연주할지 결정하면 준비는 대강 끝이겠네요!”
“고생 많으셨어요. 황태자비 전하.”
길고 긴 시간이었다.
“아나이스 황녀님이 아니었다면, 절대 다 못 끝냈을 거예요.”
나는 소파에 길게 늘어져서 피로를 풀려 애를 썼다.
“그러고 보니, 황녀님은 드레스를 고르셨어요?”
“어? 아니요……. 전 조금 더 생각해 보려고요.”
그러고 보니 그녀는 여름에는 연회에 잘 등장하지 않았다.
그게 다 몸에 있는 상처 때문이라고 하니 괜히 슬퍼졌다.
“황녀님, 상처 치료하는 거 생각해 봤어요?”
“그게…….”
“언제까지 이렇게 긴팔만 입고 다니실 거예요. 어차피 황제 폐하께서도 알게 됐으니 이때 후다닥 해치워요.”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당장에 의사에게 연락을 넣어 약속을 잡았다.
“내일 의사가 도착하면 바로 연락 드릴게요.”
아나이스는 몇 번이고 내게 고맙다며 인사를 했다.
그녀가 떠나자 감격에 가슴이 뻐근해졌다.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다는 게 이렇게 대단한 거구나.
혼자 신이 나서 아껴 두었던 디저트와 와인을 가져오라 시켰다.
치즈를 올린 크래커에 달콤한 와인까지 세팅되자 나타니엘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언제 오려나.’
대체 종일 뭘 하고 다니는지, 잠이 들 때가 아니면 나타니엘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요즘에는 그래도 밤에는 꼭 침대로 들어오니까 그를 기다리기로 했다.
* * *
하지만 자정이 지나도록 나타니엘은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은 늦네.”
말라 버린 치즈의 표면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까지는 꽤 좋았던 제이나의 기분은 가라앉아 있었다.
톡, 톡톡.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제이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제 비가 왔는지 푹 젖은 새끼 용이 창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나타니엘!”
문을 열어 주자 데굴 굴러서 안으로 떨어졌다.
제이나는 욕실로 들어가 수건을 가져와서 나타니엘을 덮어 주었다.
비늘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 주자 나타니엘이 커다란 눈으로 제이나의 뒤쪽에 있는 치즈와 크래커에 눈독을 들였다.
“배고파요?”
[응.]
“그럼 먹으러 갈까요?”
제이나는 그를 테이블 위에 앉혀 준 뒤 조그마한 접시에 와인을 따라서 그의 앞에 놓아주었다.
제이나는 자신의 잔에도 와인을 따른 뒤 그의 접시에 살짝 갖다 댔다.
[좋은 일이 있었나 보군.]
“그럼요. 아주 좋은 일이었어요. 나타니엘은 어땠어요?”
나타니엘은 그렇게 말하는 제이나를 빤히 보았다.
오늘 어땠냐고?
시찰을 나갔다가 갑자기 용의 모습으로 변해서 부랴부랴 몸을 숨겨야 했다.
숨은 장소에서 황태자궁까지는 너무 멀었고, 거의 다 왔다 싶었더니 소나기가 내려서 몸이 다 젖었다.
그런데 제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가, 제이나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어째서일까?’
나타니엘은 고개를 들어 제이나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뺨을 붉히며 웃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아까 전까지의 피곤함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도 나쁘지 않았다.]
“그것참 다행이네요. 오늘은 우리 둘 다 기분이 좋아서.”
제이나는 활짝 웃으며 나타니엘의 입에 치즈를 올린 크래커를 넣어 주었다.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느새 단둘이 함께 있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황태자 부부의 방에는 오랫동안 불이 켜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