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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잘 지내봐요, 우리 (19/145)


19화 잘 지내봐요, 우리
2022.04.06.


우리는 축제가 열리는 칼리어 대로로 향했다.

해가 지고 더위가 한풀 꺾인 덕에 놀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나타니엘이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덕에 주목을 받았지만, 워낙 인파가 많아서 그런지 다들 금방 시선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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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나, 저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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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건 사과 사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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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모르는 게 없군.”

축제가 처음이라던 나타니엘은 잔뜩 들떠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작가가 한국인이라 그런지 축제에 나오는 요리들도 모두 내가 알 만한 것들이었다.

나는 그에게 생크림을 두툼하게 올리고 잼을 바른 와플을 쥐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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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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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플이에요. 일종의 디저트죠.”

그는 자연스럽게 입에 와플을 가져가다가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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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잠깐만요.”

나는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아서 끌어 내린 후, 달콤한 향이 나는 와플의 끝부분을 앙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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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 괜찮아요, 이제 드셔도 돼요.”

날 보는 나타니엘의 표정이 묘하다.

아, 혹시 내가 먼저 입을 대서 별로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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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제가 먼저 입을 대서 싫으시면 새로 사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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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나타니엘은 크림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와플을 먹기 시작했다.

입을 크게 벌려서 와플을 물고 꼭꼭 씹어 먹는 모습을 보자니 어린 남동생을 데리고 다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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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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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만하군.”

분명 시큰둥한 반응이었는데, 와플을 먹는 속도가 빨라진다.

손에 묻은 생크림까지 핥아 먹는 걸 보니 맛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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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타니엘. 몸 좀 숙여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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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귀찮은 얼굴을 하고서 또 시키는 대로 다 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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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크림이 묻어서요.”

나는 손가락으로 그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아 주었다.

나타니엘은 내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부끄러운 짓을 한 기분이라 나도 모르게 시선을 먼저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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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 그렇게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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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에 꽤 능숙해 보여서.”

그에게 사실 내게는 전생이 있다고 고백할 수는 없었다.

전생에 고아원에서 수십 명의 아이와 커 온 덕에 애들 돌보는 데에는 이골이 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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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돌봐주던 사촌 동생이 있었어요.”

적당히 둘러댄 나는 집요하게 느껴지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난감할 때는 입에 먹을 걸 넣어 주는 것이 제일 좋았다.

아무래도 나타니엘은 단걸 좋아하는 것 같으니 그런 종류를 찾았다.

그때 내 눈에 투명한 컵에 담긴 형형색색의 칵테일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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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저거 드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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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건강에 안 좋아 보이는 음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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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맛있을걸요? 그리고 지금 아니면 또 언제 마셔 보겠어요.”

그가 마시는 고급술과는 다를 것이다.

지극히 다디단, 딱 불량 식품 맛일 거다.

결국 내 성화에 못 이겨 나타니엘은 녹색 칵테일을, 나는 노란색 칵테일을 골랐다.

우리는 한 손에 칵테일을 들고 축제를 돌아다녔다.

길거리 공연을 구경하기도 하고, 이국의 댄서들도 보았다.

잔뜩 흥이 난 나는 가짜 결혼반지를 사기도 하고, 꽃이 달린 핀을 사서 머리에 달기도 했다.

처음에는 뚱한 얼굴이었던 나타니엘도 조금씩 표정이 풀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까 마셨던 칵테일을 하나씩 더 사기로 하고 노점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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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 신혼인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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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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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직 아니야?”

푸근한 이미지의 주인아주머니가 칵테일을 넘겨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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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얼마 전에 결혼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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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그렇구먼. 둘이 잘 어울려서 그럴 것 같았어.”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덕담을 하며 땅콩도 한 주먹 나눠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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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있으면 황태자 부부를 위해 불꽃놀이를 할 건데 그건 구경하고 가라고.”

솔깃하긴 했지만 나타니엘이 싫어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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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놀이도 구경하고 가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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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그런데 여기서 보일지 의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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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우리가 고민하자 아주머니가 나타니엘을 불러 귀에 속삭였다.

나는 칵테일 잔을 든 채로 멀뚱히 자리에서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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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으로 가지.”

나타니엘은 갑자기 무슨 자신감이 생겼는지 내 손목을 잡고 사람들을 능숙하게 헤치며 앞장서기 시작했다.

우리는 얼마 안 가 중앙 광장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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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갑자기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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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에서 불꽃놀이가 잘 보인다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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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나는 나타니엘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오, 세상에.

시계탑이 우뚝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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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를 어떻게 올라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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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못 올라갈 거라고 생각하지? 내가 뭐라고 생각하나.”

용용이이자, 미친놈이요.

내 생각이 들린 건 아니겠지? 갑자기 나타니엘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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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위대하신 황태자 전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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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안 믿기나 본데.”

훅, 달콤한 향기가 가까워졌다. 허리에 부드러운 손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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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어!”

그리고 몸이 둥실 떠올랐다. 나는 당황해서 주변을 살폈다.

다른 사람 눈에 띄어 좋을 게 없었다.

가뜩이나 나타니엘은 사람들이 자신을 신격화하는 것에 질려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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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 이러세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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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은 못 봐. 꽉 잡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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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

갑자기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속도가 빨라졌다.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우리는 시계탑의 옥상에 도착했다.

높은 곳이어서 그런가, 바람에 옷과 머리카락이 마구 흩날렸다.

겨우 몸을 추스르자 나타니엘이 내 손을 잡고 난간으로 갔다.

때마침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밤하늘을 수놓는 색색의 불꽃이 아름다웠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여유였다.

적당히 시원한 바람, 적당한 취기.

바로 어제 원하지 않던 결혼을 했다는 것만 빼고는 완벽했다.

내 옆에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나타니엘을 보았다.

아까 황후의 말도 안 되는 패악을 막아 준 모습이 떠올랐다.

앞으로 험한 황실 생활을 함께할 동료로서 약간의 신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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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니엘, 앞으로 잘 부탁해요.”

내 말에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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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타니엘은 이렇게 빨리 결혼할 필요 없었잖아요. 그날 저랑 특별히 대단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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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아버지가 날 죽이려 들었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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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진짜 죽이지는 못했을 텐데요.”

나타니엘의 운명은 테레사라고 생각했다.

테레사에게 미안한 것과 별개로 그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팔자에도 없는 결혼을 나 때문에 억지로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어쩌면 원작에서처럼 그가 제국을 버리고 유유히 떠나는 결말은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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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전하가 테레사와 결혼할 줄 알았어요. 괜히 혼자서 나대서 죄송해요.”

내 사과에 나타니엘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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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생각은. 이미 결혼까지 해 놓고 이제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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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하하. 그러네요. 하여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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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대는 내 말을 잘 듣도록 해. 아까처럼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그러다가 제 목이 날아가겠던데요.

나는 그냥 웃으면서 그의 말을 흘렸다.

그 뒤로 우리는 말없이 칵테일을 마시며 난간에서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나는 펑펑 터지는 색색의 불꽃을 보며 작은 소원을 빌었다.

부디 앞으로의 황궁 생활이 평화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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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신혼 생활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나타니엘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좀 피곤하긴 했지만,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편이라 어렵지 않았다.

앞으로 내 인생의 모토는 간신배니까!

게다가 최고의 걱정이었던 잠자리는 아주 손쉽게 해결되었다.

첫날밤에 새끼 용으로 변한 대참사를 겪은 나타니엘은 평소처럼 이 침실 저 침실 방황하며 잠을 잤다.

그 덕에 부부 침실의 커다란 방은 내 차지였다.

가끔 새끼 용으로 변하면 체온이 그리운지 침대로 기어들어 오긴 했지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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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이렇게 편안해도 되는 건가.”

황후는 그날 갑작스러운 사냥 대회 개최를 맡게 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다.

가끔 예의상 문안 인사를 가면 바쁘다며 쌩하니 지나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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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하네.’

그러다 보니 홀로 남은 나는 심심하기만 했다.

매일매일을 산책이나 수놓기, 독서로 보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대체 다들 이 궁 안에서 뭐 하고 지내는 걸까.

점심을 먹고 시간이 남은 나는 하녀 하나를 데리고 정원을 나갔다.

느리게 정원을 돌던 나는 뜻밖의 인물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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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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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녕하세요, 황태자비 전하.”

말간 인상의 아나이스는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단순한 이미지와 조금 달라 보였다.

황후와 나타니엘의 전쟁 아닌 전쟁의 목격자여서 그런가.

약간의 동질감마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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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님, 어쩐 일로 나오셨나요?”

그녀는 이 궁에서 나보다 조용히 살았다.

헨리는 내가 궁금한지 가끔 구경하러 오기도 했는데, 아나이스는 그날 이후 얼굴도 보기 힘들었다.

가끔 그녀가 있는지도 까먹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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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냥요. 심심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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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황녀님도 그러세요? 그럼 저랑 이야기라도 하면서 걸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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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네, 네.”

아나이스는 당황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무료함은 얼음 공주님도 녹이는 듯했다.

우리는 하녀를 멀리 물리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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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뭐 재밌는 게 있어서 놀러 오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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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근처에 수국이 있는데, 슬슬 필 때가 되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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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리로 가요.”

나는 그녀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여전히 눈치를 보던 아나이스는 내가 움직이지 않자 겨우 발걸음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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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왜 이렇게 소심해?’

원작에서도 이랬었나. 그때 연회에서 보았을 때만 해도 해맑기만 했는데.

정말 말도 거의 없고, 게다가 눈치도 너무 본다.

이건 간신배 수준이 아니었다.

거의 노예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황후가 못 잡아먹어 안달인가?

나는 아나이스의 뒷모습을 보며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날 황후를 만났을 때, 아주 사람 하나 정도는 잡아먹고도 남겠다고 느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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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덥지도 않은가.’

아무리 초여름이라고 하지만 이 무더위에 긴팔을 입고 다니다니.

가만 보니 아나이스도 더운지 목과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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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를 안 타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더는 못 참겠는지 아나이스는 옷 소매를 접어 걷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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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녀의 가녀린 팔에 푸르스름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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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녀님.”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자세히 살펴보니 누군가에게 맞은 것처럼 매 자국도 보였다.

오래된 것부터 최근에 생긴 듯 진한 자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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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화들짝 놀란 황녀는 내 손에서 팔을 빼내 등 뒤로 감췄다.

나는 하녀들에게 잠시 멀리 떨어져서 다가오지 말라 이르고 아나이스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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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누가 때렸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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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제가 칠칠치 못해서 자주 다쳐요.”

아나이스는 황녀였다.

어린애도 아니고 황실에서 가장 높은 여인 중 하나인데 대체 뭘 하다가 다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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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구나.’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이 넓은 궁에서 황녀를 소리 소문 없이 괴롭힐 만한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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