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이름으로 부르도록 해
(18/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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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이름으로 부르도록 해
2022.04.02.
그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본 황후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끼어들어도 되는 건가?’
가만히 있으면 나타니엘의 힘으로 이 귀찮은 문안 인사를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속에 남아 있는 유교 사상이 어른을 위해야 한다고 속삭였다.
그때, 아나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황후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녀의 응원에 힘입어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제가 새로 만들었습니다. 왜요? 불만 있습니까?”
“불만이 있는 건 아닙니다만, 하루에 한 번이면 족할 인사를 왜 아침, 점심, 저녁, 또 자기 전에도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자주 자주 봐야 내 가족처럼 느낄 거 아닙니까?”
황후 역시 쉽게 넘어가 주지 않았다.
나는 흥미진진한 경기를 관람하는 마음으로 둘의 말다툼을 지켜보았다.
“그러면 황후 폐하께서 제이나와 같이 사시면 되겠군요.”
“예?”
“네?”
너무 싫어서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 버렸다.
황후의 날카로운 눈빛에 나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친해지고 싶어서 매일 네 번씩 궁에 부르시는 거면 아예 친해질 때까지 같이 사시면 될 것 아닙니까? 혹시 압니까? 나중에는 절친이 돼서 부인이 더는 황태자궁에 오기 싫다 할지.”
그 무슨 무서운 이야기란 말인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쳐서 맨팔을 쓸어내렸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아나이스 황녀도 표정이 어두웠다.
“인사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이러는 겁니까! 고작 하루에 5분인데.”
“싫다기보다는 효율성이 없다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나타니엘은 정말 황후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어쩜 저렇게 태연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대답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타니엘이 저렇게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는데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황후에게도 감탄을 느꼈다.
둘이서 싸우는 주제가 내 문안 인사가 아니었다면 더 가벼운 마음으로 관전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황태자비에게 직접 물어보지요.”
“그러십시오.”
응?
뭘 물어본다는 거지?
둘의 시선이 갑자기 날 향했다.
“황태자비, 문안 인사는 그대가 직접 할 테니 말해 봐요. 내가 인사 오라는 게 그렇게 부담스럽습니까?”
잔뜩 격양된 목소리로 황후가 내게 물었다.
나는 눈을 옆으로 굴렸다.
당연히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큰 소리로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타니엘이 말을 걸었다.
“솔직히 귀찮지 않나? 매번 이렇게 찾아오는 거. 그대가 찾아온다고 해서 폐하가 건강해지는 것도 아닌데.”
넌 좀 입 다물어라.
낄 때 안 낄 때를 모르고 눈치도 없는 놈아.
그런데 어째 문안 인사를 드리겠다고 하면 삐질 것 같았다.
진퇴양난이었다.
“황제 폐하 납시오.”
그때 구세주처럼 황제 폐하가 나타났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더니!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기쁜 마음으로 황제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황제 폐하.”
“아니, 여기서 날 빼고 다들 뭐 하고 있었나?”
그 역시 이 이상한 조합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황후와 나타니엘의 사이를 보니, 정말 일 년에 몇 번 없을 일처럼 보였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폐하. 마침 중요한 이야기를 하던 참이랍니다.”
“중요한 이야기?”
“예.”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 중요한 이야기가 고작 내 문안 인사에 관한 거라는 걸!
만일 황제가 그랬으면 좋겠다고 하면 나는 꼼짝없이 하루에 네 번씩 문안 인사를 해야만 했다.
“허허허, 황후가 이리 중히 여기는 문제가 무엇이오?”
“다름이 아니라, 제가 황태자비와 친해지고 싶어 자주 문안 인사를 하라 하였습니다.”
역시 황후 자리에 괜히 앉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횟수는 쏙 빼고 그저 ‘자주’라는 단어로 대신하려 했다.
아마 황제는 그 ‘자주’가 매일, 하루 네 번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겠지.
“호오, 그래? 황후가 아주 마음을 크게 먹었군. 당연히 문안 인사를 자주…….”
“언제부터 문안 인사를 네 번이나 드리는 게 자주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 유난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나 우리의 나타니엘 역시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친절한 지적에 황제는 입만 벙긋거렸다.
그리고 나와 아나이스를 보았다.
‘분명 우리를 불쌍하다 생각할 거야.’
이 자리에서 나와 아나이스는 그냥 고래들 사이에 끼인 새우나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의 싸움에 이리저리 휘둘려서 등이 터진 칵테일 새우…….
황후의 날카로운 고성과 나타니엘의 비아냥이 길어지면서 난 서서히 지쳐 갔다.
그때 황제가 무언가 좋은 생각을 해낸 듯 박수를 쳤다.
‘불안한데.’
아버지께서 예전에 황제는 언제나 자신에게만 좋은 생각을 한다며 투덜거리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지 말고 사냥 대회를 개최하는 건 어떠냐?”
“예?”
나타니엘은 어이없다는 듯이 미간을 찡그렸다.
하긴, 갑자기 사냥 대회라니. 너무 뜬금없긴 했다.
“친목을 도모하는 데에는 스포츠만 한 게 없지. 같이 운동을 하면 서로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거야.”
너무나 거지 같은 논리였지만, 여기서 반박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 나타니엘마저 입을 다물어 버렸으니 더욱 당연했다.
이런 상황에서 저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다니.
- 황후 폐하는 물론이고 황제 폐하 역시 조심해야 한다. 그분은 자신의 즐거움과 안위 외에는 크게 고민하지 않는 편이거든.
이제야 아버지가 한 말이 어떤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친목 도모는 그냥 핑계고 좋아하는 사냥을 하고 싶은 거다.
그게 아니면 이 상황에 저런 해답을 내놓을 리가 없으니까!
“어떤가 황후?”
“……폐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으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린 건 내 착각일까?
나는 괜히 안절부절못하며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 * *
어쩌다 보니 황실 일가족과 점심을 먹고, 다시 차까지 마시고 나서야 황태자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분위기는 환상적으로 별로였다.
눈치 없는 황제와 잔뜩 날이 선 황후, 게다가 은은하게 삐져 있는 나타니엘 사이에 끼인 나는 이래저래 눈치만 보다가 체할 뻔했다.
그 모든 일을 겪은 나는 완전히 지쳐서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아, 피곤해.”
내 뒤를 따라온 나타니엘은 뚱한 얼굴로 내 반대편에 앉았다.
평소에도 말이 없었지만, 분명하게 느껴졌다.
아까 내가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아서 화가 난 것 같았다.
‘제 입장도 생각해 주세요. 흑흑.’
울고 싶었지만, 간신배의 도리로 나는 다시 자세를 공손히 하고 그에게 물었다.
“전하, 어디 기분이 안 좋으십니까?”
“별로.”
단 두 글자로 자신의 기분을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
응접실에는 어색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내 목을 흔들 것 같았다.
그렇게 되기 전에 그의 화를 풀어 주어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나와 나타니엘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축제를 한다고 했지.’
온갖 산해진미를 다 먹어 본 나타니엘에게 오히려 불량 식품 같은 맛이 더 잘 먹힐지도 몰랐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양손을 모아서 최대한 공손하게 말을 걸었다.
“전하, 같이 밖에 안 나가실래요?”
그는 눈썹만 꿈틀거렸다.
아마도 속으로 이 여자가 또 왜 저러나, 하고 생각 중이겠지.
나는 그 신호를 간단히 무시하고 싱글벙글 웃었다.
“저희 결혼을 축하하는 축제가 열린대요. 거기 가면 그때 먹은 팬케이크만큼 맛있는 게 있을 거예요.”
팬케이크라는 단어에 나타니엘의 눈썹이 반응했다.
“가요, 네? 여기 앉아 있다가 또 황제 폐하랑 황후 폐하가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부르면 어떻게 해요.”
“나가지.”
마지막 말이 꽤 강력했나 보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본가에서 가져온 옷 중에 중산층이 입을 만한 원피스를 꺼내 입고 머리를 틀어 올려 모자를 눌러 써서 감췄다.
금발은 예쁘지만 너무 튀어서 감추기가 귀찮은 게 문제였다.
거울을 보며 꼼꼼히 튀어나온 머리가 없는지 확인한 나는 뒤를 돌았다.
“전하, 준비 다 하셨나요?”
적당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라 했는데 제대로 입고 나올지 걱정이었다.
다행히 드레스 룸에서 나온 나타니엘은 정말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다.
면으로 만들어진 흰색 셔츠에 거친 질감의 감색 바지를 입고 투박한 가죽 부츠를 신었다.
‘옷이 문제가 아니군.’
얼굴이 너무 잘나면 뭘 입어도 잘나 보였다.
이대로라면 나가자마자 여자들의 관심을 한눈에 받게 될 것이다.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나타니엘을 생각하자 기분이 조금 나빠졌다.
“이 정도면 되겠지?”
“잠시만요. 그대로는 안 되겠어요.”
아무래도 얼굴을 가려야겠다.
나는 내 드레스 룸에 들어가서 그의 얼굴을 반쯤 가릴만한 모자를 가지고 나왔다.
나타니엘은 모자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살짝 뒤로 물러섰다. 난 그의 옷을 잡고 아래로 당겼다.
“잠깐만 숙여 보세요.”
나타니엘은 귀찮은 듯했지만 내 말대로 몸을 숙여 주었다.
나는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위에 촌스러운 모자를 씌워 주었다.
얼굴이 꽤 가려져서 마음에 들었다.
비록 큰 키와 완벽한 몸매는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았지만.
“이 정도면 될 것 같아요.”
“그럼 가 볼까?”
나타니엘의 말투에서 기대감이 물씬 배어 나왔다.
“네, 가요!”
나타니엘은 마법으로 우리의 모습을 가렸다. 마법이 존재한다는 건 알았지만, 실제로 내게 적용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손을 들어서 이리저리 흔들어 보았지만, 내 눈에도 손은 보이지 않았다.
“소리는 사라지지 않아. 그리고 실체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 벽을 통과하는 건 못 해.”
혹시나 손이 벽을 통과하는지 확인하려는 날 그가 한심한 눈으로 보며 말했다.
민망함에 손을 뒤로 숨겼다.
“이쪽이다.”
그는 날 데리고 사용인들이 많지 않은 복도로 데리고 갔다. 우리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피해서 성을 빠져나갔다. 정원으로 나와서는 더욱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야만 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없는 쪽으로 멀리 돌아서 담에 도착했다.
“이젠 어떻게 나가죠?”
내 키를 아득히 넘는 철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나타니엘은 덤덤히 담으로 걸어갔다. 혹시나 그가 성질을 못 이기고 담을 부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자, 잠깐. 나타니엘 전하!”
“뭐지?”
그는 인상을 쓰며 뒤를 돌아보았다. 나타니엘의 어깨 너머로 사람 하나가 충분히 지나갈 수 있는 틈이 보였다.
“아, 아뇨. 어서 나가죠! 늦겠어요.”
머쓱해진 나는 뒷머리를 긁으며 그의 등을 밀었다.
우리는 그가 늘 이용하던 틈을 이용해 밖으로 나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힐끔 본 나타니엘은 누가 봐도 신이 난 모습이었다.
“전하, 이렇게 나와 보시는 건 처음이에요?”
“당연한 거 아닌가? 세상에 어느 귀족이 이런 걸 즐겨.”
“…….”
방금 그거 내 욕인가?
“하지만 기대가 되는군. 그대가 권한 건 늘 재밌었거든.”
나타니엘은 기분 좋게 웃었다.
잘생긴 얼굴이 진심을 담아 웃자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옛말에 얼굴 뜯어 먹고 사는 거 아니라더니, 다 틀린 이야기다.
잘생기면 뭘 해도 용서가 된다.
“그리고 밖에서는 전하라고 부르지 마라.”
“네?”
“내가 황태자인 걸 숨기려고 이렇게 변장시킨 거 아닌가?”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는데요.
‘야’, ‘너’라고 부를까요.
등의 다양한 호칭은 마음속에 접어 두었다.
내 속을 읽은 것처럼 그는 곱게 눈매를 접어 웃으며 말했다.
“이름으로 부르도록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