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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어려울 것 없는 시집살이 (17/145)

17화. 어려울 것 없는 시집살이2022.03.30.

날 보는 무심한 붉은 눈이 달빛을 품어 오묘한 색으로 빛났다. 짙은 눈썹 아래의 깊은 눈매, 그리고 긴 속눈썹이 눈동자에 그림자를 드리워서 더욱 신비롭게 보였다. 나타니엘의 복장에서도 작정한 듯한 느낌이 났다. 깊이 파인 가운 사이로 단단한 가슴팍이 눈에 들어왔다. 티브이나 잡지에서 보던 것 같은 잘 갈라진 근육과 티끌 하나 안 보이는 살결에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1655084313649.png‘운동도 안 하는 것 같은데 몸이 장난 아니네.’

난 왜 하녀들이 보일 듯 말 듯한 게 포인트라고 강조했는지 알 것 같았다. 새삼 그녀들의 선택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16550843136495.png“뭘 그렇게 보는 거지.”

침묵을 깬 건 나타니엘의 목소리였다. 정신을 차린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1655084313649.png‘나는 간신배다. 나는 간신배야. 나라를 팔아먹은 한심한 협잡꾼이 되리.’

있는 힘껏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굽실거렸다.

1655084313649.png“오늘 종일 결혼 준비 때문에 피곤하셨죠? 일단 앉아서 쉬시겠어요?”

그의 미간이 구겨진다. 이게 아닌가? 생각해 보니 나타니엘이 어떤 스타일의 간신배를 좋아하는지 전혀 모른다.

1655084313649.png“샹그리아 좋아하세요? 오늘 날도 더웠고, 피곤하실 텐데 한잔하실래요?”

나는 준비해 둔 잔에 하녀들이 세팅해 놓은 음료를 따라 나타니엘의 앞에 내려놓았다. 나타니엘은 가만히 샹그리아를 보고만 있었다. 나는 내 잔을 들어 살짝 마시고 그의 앞에 내려 주었다. 그리고 그의 것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1655084313649.png‘내가 맨정신으로 못 있겠어.’

아직 내공이 약해서 도저히 맨정신으로 그에게 살랑거릴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정신을 잃었으면 좋겠는데.

16550843136495.png“대체 왜 그러는 거지?”

1655084313649.png“네? 무슨 말을 하시는 걸까요?”

16550843136495.png“너 말이야. 왜 꼭 이상한 주술에 걸린 사람처럼 구는 거야.”

1655084313649.png“…….”

뭐가 마음에 안 드나 했더니 내 행동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다.

1655084313649.png“제가 뭘요. 원래 하던 대로 했는데요.”

16550843136495.png“하던 대로는 무슨, 목소리가 꼭 아버지께 갖고 싶은 보석을 사 달라고 말하는 황후의 목소리 같았다.”

1655084313649.png“으악! 왜 비교를 해도 꼭 그런 비교를 해요.”

내가 질색을 하며 싫어하자 나타니엘의 표정이 그제야 풀렸다.

16550843136495.png“그래. 이제야 내가 아는 공녀 같군.”

1655084313649.png“공녀라니요. 이제 황태자비거든요.”

나는 탁자 위에 얼굴을 올려놓고 웅얼거렸다. 내 지적에 나타니엘은 잠시 말이 없었다. 민망했나 보다. 괜히 같이 민망해져서 몸을 일으켜 남은 샹그리아를 마셨다. 나타니엘이 무언가 떠올랐는지 갑자기 조용히 내게 물었다.

16550843136495.png“그럼, ‘우리 비’라고 부르면 되는 건가.”

1655084313649.png“푸흡!”

나는 입에 물고 있던 음료를 전부 뱉어 냈다. 얼굴에 약간 튀었는지 나타니엘의 얼굴이 전에 없이 구겨졌다.

1655084313649.png“으악! 죄송해요. 잠, 잠깐만요.”

나는 냅킨으로 그의 얼굴과 목, 그리고 가슴팍을 닦아 주었다. 혹시 하얀 가운이 물들까 봐 콕콕 찍듯이 누르기까지 했다.

16550843136495.png“이봐.”

1655084313649.png“아, 이거 얼룩 남겠어요. 어떡하죠? 아깝다…… 예쁜데.”

집중해서 그의 가슴팍에 매달려 있는 내 어깨를 나타니엘이 밀어냈다.

16550843136495.png“좀, 떨어져.”

1655084313649.png“잠깐만요. 이거 좀만 닦으면 거의 다 지워질 것 같은데.”

16550843136495.png“떨어지라니까!”

그답지 않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통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술기운이 올라와 겁이 휘발되었는지 나도 모르게 그에게 소리쳤다.

1655084313649.png“왜 저한테 화를 내고 그러세요!”

어, 그러고 보니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네? 나는 그제야 내가 어떤 자세를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거의 나타니엘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아서 그의 보일 듯 말 듯한 상반신에 찰싹 붙어 있다는 걸 말이다.

1655084313649.png“죄…… 죄송합니다.”

귀까지 달아오른 그는 손으로 눈을 가리며 한숨을 길게 쉬었다.

16550843136495.png“옷이나 갈아입어.”

1655084313649.png“옷이요?”

고개를 숙여 확인해 보니 보일 듯 말 듯함이 미덕인 나의 슈미즈가 젖어서 속살이 보이는 수준이 되어 있었다.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손으로 몸을 가렸다.

1655084313649.png“자, 잠깐만 기다리세요!”

나는 후다닥 욕실로 들어가 슈미즈를 벗은 뒤, 수건을 물에 적셔서 끈적거리는 걸 닦아 냈다.

1655084313649.png“이거 영 못쓰겠네.”

반투명한 슈미즈는 이미 얼룩덜룩해져서 그 기능을 상실했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쓰레기통에 옷을 집어넣고 목욕 가운을 걸쳤다.

1655084313649.png“나타니엘 전하.”

욕실 문을 살짝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어 밖을 살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나타니엘이 보이지 않았다.

1655084313649.png“자나?”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와 침대를 살피자 어느새 반듯하게 침대에 누워 있는 그가 보였다. 나는 안심하며 의자에 앉았다.

1655084313649.png‘난 어디서 자야 하지?’

바닥에 자자니 입이 돌아갈 것 같았고, 소파에서 자자니 꼭 싸운 것 같았다.

1655084313649.png“하아…… 그래, 이제 부부니까 한 침대에서 자는 건 어쩔 수 없지.”

나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침대로 향했다. 우리의 용용이 씨는 자기가 이 방의 주인이라는 걸 알려 주고 싶다는 듯 침대 한가운데에 누워 있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그와 멀어지기 위해 그를 구석으로 밀어 보았다.

1655084313649.png“꿈쩍도 안 하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무거운 거지. 온몸이 근육이라서 몸집에 비해 훨씬 무거운 걸까? 낑낑거리며 그를 밀던 나는 지쳐서 그만두었다. 결국 그의 옆, 구석진 자리에 몸을 웅크렸다.

1655084313649.png‘하, 인생. 내가 이렇게 쭈그리처럼 자게 될 줄이야.’

나는 앞으로의 결혼 생활을 걱정하다가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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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새소리가 시끄러웠다. 삐이, 삐 하는 소리가 꼭 용용이가 울어 대는 소리 같네.

1655084313649.png“우웅…….”

나는 데굴 몸을 굴렸다. 뭐지, 이상하게 침대가 넓은 것 같다. 여기에 원래 사람이 하나 누워 있어야 하는데……. 서서히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눈이 번쩍 뜨였다.

16550843219267.jpg“황태자 전하, 비 전하. 일어나셨으면 들어가도 될까요?”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주변을 살피며 나타니엘을 찾았다. 평평한 침대 위에 볼록한 무언가가 보였다. 나는 재빨리 이불을 들추었다.

16550843219271.png“삐, 삐이!”

잔뜩 화가 나서 탁탁 바닥을 치고 있는 새끼 용이 보였다. 그럼 아까 새소리인 줄 알았던 게 나타니엘의 울음소리였단 말이야?

16550843219267.jpg“비 전하! 황후 폐하께서 문안 인사를 오시라고 하셨습니다.”

16550843219271.png[들어오지 못하게 해!]

나타니엘답지 않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16550843219271.png[이 모습은 아버지와 그대 빼고는 아무도 모른다.]

왜 남들은 다 있다는 유능한 보좌관 하나 없는 건데! 당황한 나는 일단 문에 대고 소리쳤다.

1655084313649.png“자, 잠깐만 기다려.”

긴장한 나는 그를 들고 마구 흔들며 중얼거렸다.

1655084313649.png“어, 어떡하면 좋아요? 어떻게 하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시냐고요.”

16550843219271.png[그걸 내가 알면 매번 숨어 다녔을 리가 없지.]

글씨에서도 짜증이 느껴졌다. 하긴 그걸 모르니까 지금도 저러고 있겠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하지만 마법사도 아니고, 그렇다 드래곤 전문가도 아닌 내가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16550843219267.jpg“전하, 죄송하지만 들어가겠습니다.”

뭐야, 왜 남의 방에 멋대로 들어오고 그래! 나는 눈앞에 있는 용용이를 가리기 위해 몸을 날렸다. 순간 펑 소리와 함께 연기가 일었고, 그 속에서 인간의 몸으로 변한 나타니엘이 나타났다. 안 들켰다고 기뻐하기도 전에 나타니엘의 손이 허리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반대편 손으로 적당히 내 목욕 가운을 끌어 내리고 바짝 몸을 붙였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하녀 둘이 들어왔다. 나타니엘은 드러난 내 어깨에 입술을 대고서는 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16550843136495.png“너희 둘, 내일부터 궁에 들어오지 마라.”

16550843219267.jpg“주, 죽을죄를 저질렀습니다, 전하.”

둘은 그대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16550843136495.png“죽기 싫으면 내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고.”

16550843219267.jpg“전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둘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사과를 했다. 너무 과한 반응에 내가 다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1655084313649.png“그만 나가라고 해요.”

나는 나타니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16550843136495.png“둘 다 나가 봐.”

축객령에 둘은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문이 완벽하게 닫히고 나자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1655084313649.png“하아……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나타니엘은 여전히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잔뜩 인상을 쓰며 나를 보았다.

16550843136495.png“안 내려가나?”

1655084313649.png“헉, 네…… 네.”

여전히 그의 몸 위에 올라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심지어 양손이 그의 맨가슴에 곱게 올라가 있는 걸 보고 화들짝 놀랐다. 나는 재빨리 그의 몸에서 내려왔다. 그는 한숨을 쉬고 가운으로 가슴을 여미고는 욕실로 사라졌다.

1655084313649.png‘뭐야, 무슨 내가 변태라도 된 것처럼 구네.’

그나저나 대체 이른 아침부터 황후는 우리를 왜 부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1655084313649.png‘대체 이 새벽에 왜 부르는 거야.’

지독한 시집살이의 시작은 새벽 안부 인사가 아니던가. 설마,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을 내리누르며 준비를 서둘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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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에 불려 간 나와 나타니엘은 황후를 기다렸다.

1655084313649.png“전에도 이런 적이 있나요?”

16550843136495.png“그럴 리가.”

나타니엘의 대답을 듣고 나자 더 불안해졌다. 이게 바로 시월드라는 건가? 생각해 보면 정말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녀의 딸을 결혼식장에서 망신 준 남자의 동생이라니.

1655084313649.png‘이런 일은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데!’

그리고 더 불안한 건 나타니엘이 함께 온 것이다. 황후와 나타니엘의 사이는 최악이었다. 나는 괜히 여기서 말 한 번 잘못했다가 둘 사이에 끼어서 이도 저도 못 할 상황이 되는 건 아닐지 걱정스러웠다.

16550843219267.jpg“황후 폐하와 아나이스 황녀님이 들어오십니다.”

시녀장의 말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랍게도 나타니엘은 일어나지 않았다.

1655084313649.png‘아니? 이 사람이!’

내가 쏘아보자 그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후는 들어오다가 나타니엘을 보고 멈칫하더니 곧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았다.

1655084313649.png“지난밤에 안녕하셨는지요, 황후 폐하, 황녀 전하.”

1655084331109.png“그래요. 다 큰 아들을 결혼시켰으니 아주 안녕했지요. 비록 그 상대가 원수 같은 집안의 여식이어도 말입니다.”

말에 가시가 있었다. 나는 일단 모르는 척 싱글벙글 웃어 주었다. 웃는 얼굴에 침은 못 뱉겠지.

16550843311094.jpg“황실의 사람이 된 걸 축하합니다, 황태자비 전하.”

1655084313649.png“감사합니다, 황녀 전하.”

아나이스 황녀는 못 본 사이에 수척해져 있었다. 저것도 모두 막시밀리안 탓이라고 생각하니 열불이 났다. 그놈은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녀석이었다. 양심에 가책이 느껴진 나는 앞으로 아나이스 황녀를 더 챙겨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첫인상은 별로였지만, 같이 지내야 하니 잘 보여서 나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차 한 잔을 다 마시자 황후가 입을 열었다.

1655084331109.png“아직 태자비가 어려서 잘 모를 터이니 앞으로 많이 가르쳐야겠습니다. 이걸 받으세요.”

시녀장은 내게 긴 종이를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아침 다섯 시부터 시작되는 문안 인사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1655084313649.png‘뭐야, 이거. 여기가 조선 시대야?’

아무리 K-로판이라지만, 이거 너무 악의가 느껴지는 거 아닌가? 이걸 어쩌지, 하고 고민하고 있는 사이, 나타니엘이 대놓고 비꼬는 투로 황후에게 물었다.

16550843136495.png“그런데 언제부터 문안 인사를 받으셨다고 이 사람에게 이러시는 겁니까?”

나타니엘의 선공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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