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결혼식은 짧고 빠르게2022.03.26.
결혼식 날 아침. 비장한 얼굴로 일어난 나와 하녀들은 오늘 있을 엄청난 준비 과정에 바짝 긴장해 있었다. 남자인 막시밀리안의 결혼 준비와는 완전히 달랐다. 드레스와 보석, 그리고 화장 도구와 구두, 스타킹까지. 잊은 것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한 하녀장이 외쳤다.
“잊은 것은 없겠지?”
“네!”
우렁찬 하녀들의 목소리에 내가 다 질릴 정도였다.
“오늘 결혼식은 반드시 성공시킨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도록.”
“네!”
“그럼 대성당으로 출발한다!”
꼭 전쟁에 참전하는 군인들처럼 사기가 오른 하녀들이 돌격했다. 뽀얗게 먼지가 이는 창밖을 내려다보던 나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오싹한 기운에 뒤를 돌았다.
“그럼 저희도 준비를 시작하도록 하죠.”
매드 사이언티스트처럼 두 눈을 번쩍이는 하녀장의 얼굴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 괜찮은 거 맞지?’
나는 이 결혼식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 * * 대성당의 신부 준비실.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도록 입술을 꽉 물었다.
“아가씨! 숨 좀만 더 참으세요.”
“으윽, 더는…… 더는 못 해!”
결혼식이라고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허리를 졸라매는 통에 거의 죽을 뻔했다. 더는 못 하겠다는 나와 더 조일 수 있다며 응원하는 하녀들 사이에 긴 실랑이가 벌어졌다. 겨우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 나는 헉헉거리며 벽에 기댔다. 결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가.
“죽을 뻔했어.”
“그런 거로 죽지는 않아요, 아가씨.”
하녀장은 날카로운 눈으로 화장과 내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흠결 하나 없어야 한다며 신경질적으로 날 몇 번이나 돌렸다. 나는 그녀가 왜 이렇게 군기가 바짝 들어 있는지 알고 있었다. 세기의 풍운아였던 어머니가 없으니, 그 물고 뜯는 걸 좋아하는 귀족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을 걱정한 것이다. 사실 나는 크게 상관없었지만, 그런 하녀장의 마음을 알았기에 적당히 맞춰 주었다.
“자, 다 되었어요, 아가씨. 일어나 보세요.”
치장을 끝낸 하녀장의 말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를 돌아 정면에 보이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섬세하게 땋아 올린 길고 결 좋은 금발은 핀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작은 블루 다이아몬드로 올림머리를 장식하고, 그 주변에 나뭇가지 모양의 은장식을 둘렀다. 빻은 진주를 올린 살굿빛 뺨은 은은하게 빛이 났고, 눈을 또렷하게 만들기 위해 어두운 아이섀도를 칠해서 이목구비가 더욱 도드라졌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원래 제이나의 얼굴이 예쁘긴 했지만.
“드레스도 너무 잘 어울려요. 역시 저희 안목은 완벽하다니까요?”
결혼이 너무 급하게 진행되는 바람에 드레스를 맞추고 받을 시간도 얼마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자주 다니던 부티크에서 급하게 맞췄다.
‘크게 기대는 안 했는데, 괜찮은데?’
특별히 주문한 웨딩드레스는 내 체형을 고려해서 완벽하게 만들어졌다. 어깨를 다 드러내고, 가슴에서부터 허리까지 딱 맞게 얇은 하얀 천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위에 실크로 만든 각기 다른 크기의 꽃을 붙여서 화려함을 더했다. 그 밑으로 치마 부분은 여러 겹의 튤로 이루어져 한층 풍성해 보였다.
“그러게. 시간이 없었을 텐데 마담이 고생했네.”
마지막으로 하녀장은 테레사가 준 목걸이를 상자에서 꺼냈다. 오묘한 빛의 블루 다이아몬드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하녀장은 한눈에 이것이 아주 귀한 물건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정도 크기와 투명도, 그리고 세공 실력까지 완벽한 다이아몬드는 흔하지 않았다.
“자, 무릎을 굽혀 보세요.”
“응.”
마지막으로 면사포와 티아라까지 쓰고 나자 거울 속에는 완전한 신부가 있었다. 진짜 결혼을 하긴 하는구나. 조금 전까지 꼭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모든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 와중에 똑똑,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흐흠. 준비가 다 되었나?”
“네. 어서 들어오세요, 공작님.”
하녀장은 재빨리 준비실의 문을 열었다. 나와 눈을 마주친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망할 것, 이렇게 빨리 결혼할 필요는 없지 않으냐?”
아버지는 여전히 나와 나타니엘이 모종의 관계일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계셨다. 아니라고 설득하는 걸 포기한 나는 적당히 맞장구치며 위기를 모면하기로 했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퉁명스러운 내 대답에 아버지는 눈을 살짝 흘기셨다. 그래, 솔직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것도 안다. 우리의 대단하신 남자 주인공님은 가문을 생각하지 않고 사랑 때문에 황실을 거부했는데, 마침 딸의 침대 위에는 황태자가 누워 있었으니.
‘하, 운도 없지.’
나는 모든 욕심을 내려놓았다. 이제부터는 내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귀여운 용용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나타니엘은 원작에서 알아주는 폭군이었다. 마음에 안 들면 소리 소문도 없이 없애 버리거나, 그 끝도 없는 힘을 보여 주면서 미치게 만들기도 했다. 그는 아주 섬세하면서 무신경한 사람이기도 했다.
‘간신배가 되자.’
나는 그의 옆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선을 결정했다. 그가 내게 잘하건 못 하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잘한다, 잘한다 칭찬과 아부만이 살길이었다.
“이제 그만 가자. 식 시작 시각이 다가오는구나.”
아버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전쟁터로 향하는 병사와 같은 비장한 다짐을 하며. 호화로운 회랑을 지나 화려한 문 앞에 아버지와 나란히 섰다. 긴장감에 몸이 떨렸다. 와, 이렇게 어이없이 결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이 세계에 빙의하고 나서 겪었던 온갖 일 중 오늘처럼 강렬한 사건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긴장되냐?”
“아니요, 긴장은요.”
내 목소리도, 아버지의 목소리도 떨렸다.
“나, 참. 이렇게 덜덜 떨고 있으면서 센 척하기는.”
“참 나, 아버지도 떨고 계시거든요.”
우리는 입장을 알리는 금관 악기의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농담 따먹기를 했다. 서로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어쩌면 아버지와 딸로서 이야기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결혼하고 나면 아무래도 이렇게 농담 따먹기나 하며 지내기는 힘들 테니까.
“행복하게 살아라. 나타니엘 전하가 괴롭히면 연락하고.”
“연락하면 도와주시려고요?”
“다른 건 못 해도 드러누울 수는 있단다. 이 아비가 드러누우면 또 같이 드러누워 줄 친구들이 꽤 있단다.”
아버지의 데모 능력에 관해 이야기하던 우리의 귀에 마침내 신부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손을 꽉 쥐었다.
“저 잘 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너라면 잘할 거 안다.”
그리고 중앙의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성당 내부의 화려함과 웅장한 규모에 압도되었다. 고개를 한참 들어야 보일 높은 천장과 양쪽 벽 가득 색색의 빛을 뿌리는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중앙 통로에 깔린 붉은 융단과 그 옆을 장식한 백합과 장미. 나와 아버지는 그 융단 위에 발을 올렸다. 피아노의 반주에 따라 천천히 버진 로드를 걸어 나갔다. 버진 로드의 끝엔 나타니엘이 서 있었다. 어쩐지 그의 모습이 꼭 악마처럼 보였다면 내 착각일까.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단상 위에 서 있던 나타니엘이 계단을 내려와 내 손을 받아 갔다. 맞잡은 그의 손 온도가 한 5도쯤 낮은 것 같다. 나는 곁눈질을 하며 나타니엘의 기분을 살폈다.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화났나?’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닌데 나타니엘은 영 어색했다. 우리는 함께 단상 위로 올라가 교황 앞에 섰다. 불과 한 달 전에 지척에서 보았던 교황이 내 결혼을 주례하게 될 줄이야. 교황 역시 떨떠름한 표정으로 축사를 시작했다.
“그럼 두 사람은 맹세의 키스를 하십시오.”
지난번의 실패를 교훈 삼은 걸까. 심지어 서로에게 이 결혼에 대한 의사를 묻는 부분까지 완벽하게 삭제해 버렸다. 나타니엘도 어이가 없었는지 잡고 있던 손이 꿈틀거렸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연애 결혼이라고 요란하게 광고하고 다닌 것과 달리 서로의 모습을 제대로 마주한 건 오늘이 처음 같았다.
‘용용이 모습일 때는 좀 달랐지만.’
예쁜 형태의 붉은 입술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움찔거리다가 닫혔다. 지금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지 나타니엘의 길게 뻗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곧 그의 서늘한 손이 뺨에 닿았다. 나 진짜 키스하는 거야? 믿을 수 없었지만, 일단 수많은 매체에서 알려 준 대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부드러운 숨결이 코끝과 뺨에 닿았다. 촉촉한 입술이 입가 근처에 깃털처럼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럼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우렁찬 교황의 선언에서 후련함마저 느껴졌다. 나는 멍청하게 나타니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그는 미간을 구긴 채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렇게 결혼식이 끝났다.
* * * 결혼식이 다가 아니라는 걸 식이 끝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식과 피로연이 끝나자 하녀들이 우르르 몰려와 나를 끌고 갔다. 머리에 달린 장식을 모두 제거하고, 장신구까지 빼서 보석함에 보관했다.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까지 조여 놓은 코르셋도 풀어 주었다.
‘하, 살 것 같다.’
……라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였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비 전하.”
‘비 전하’라는 호칭이 너무나도 어색하다. 나는 하녀들에게 끌려가 욕실로 향했다. 커다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어깨와 팔을 마사지 받으며 피로를 풀었다. 그들은 머리를 감겨 주고, 몸에 향이 나는 거품을 문질렀다.
“첫날밤을 위해 완벽하게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헉. 완전히 잊고 있었다. 결혼하면 귀여운 용용이나 끌어안고 잘 생각을 했지, 첫날밤을 지낸다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타니엘을 인간으로서 만난 시간보다 새끼 용으로서 만난 시간이 훨씬 길었다.
“비 전하?”
얼굴에 점점 열이 올랐다. 목욕물도 뜨듯해서 더 빠르게 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욕조에서 벌떡 일어났다.
“목욕은 이제 됐어. 주…… 준비나 하자.”
“네, 비 전하.”
내가 입을 잠옷을 미리 보고 싶었다. 나한테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리고 그들이 들고 온 슈미즈는 정말 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왜 로판 소설 속에서 잠옷 차림으로 돌아다니면 바로 미친 X 취급을 당하는지 깨달았다.
“이…… 이건 거의 안 입은 것이나 다를 바 없는데?”
“보일 듯 말 듯한 것이 포인트랍니다, 비 전하.”
하녀들은 그 옷이 마음에 드는지 꺅꺅거리면서 옷자락을 팔랑팔랑 흔들어 댔다. 얇은 천 쪼가리가 눈앞에서 팔랑거릴 때마다 내 멘탈도 함께 팔랑거렸다.
“이쪽으로 오세요. 피부를 부드럽게 해 줄 크림을 발라 드릴게요.”
그녀들은 넋이 나간 나를 데리고 이것저것 실행에 옮겼다. 피부가 부드러워진다는 크림을 바르고, 마사지 침대에 올려서 전신을 노곤하게 풀어 주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비 전하.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설렁줄을 당기시면 됩니다.”
안 입느니만 못한 잠옷까지 입혀 주고 하녀들은 모두 방에서 나갔다. 부부 침실에는 커다란 침대와 나 단둘이 남았다.
“하아.”
침대 끝에 걸터앉은 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긴장돼서 그런가? 손에서 자꾸 땀이 난다. 첫날밤은 왜 생각도 못 한 거지? 과거의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긴 너무 정신없긴 했다. 아니, 지금 내가 정신없는 것 같다. 넋이 나간 채로 앉아 있던 나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헉.”
얇은 가운 차림의 나타니엘이 여느 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문가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