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가족의 조건2022.03.23.
살짝 흐트러진 흑발에 불길할 정도로 붉은 두 눈이 무심하게 아나이스를 훑었다. 꼭 자신의 심정을 꿰뚫는 것 같은 눈빛에 아나이스는 몸을 움츠렸다.
“아. 오라버니, 어머니는 곧 나오실 거예요. 준비가 좀 덜 되어서요.”
대답이 없다. 아나이스는 눈만 살짝 올려 나타니엘을 살펴보았다. 혹시 화가 난 거 아닐까? 순간 그의 얼굴이 훅 가까워졌다. 놀란 아나이스가 뒤로 물러서려는데 턱이 움켜쥐어져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누구한테 맞았나 보군.”
“으, 아…… 그게……. 그냥 넘어진 거예요.”
혹시라도 들켜서 또 혼이 날까 무서워 아나이스는 적당히 거짓말을 했다.
“그렇군.”
“네, 네. 제가 좀 덤벙거려서요.”
“알았다.”
다행히 나타니엘은 순순히 믿어 주는 것 같았다. 저를 놓아주자 아나이스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나타니엘은 말없이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아나이스는 그런 나타니엘의 뒷모습을 보다가 뒷문으로 향했다.
* * * 황후는 나타니엘과 함께 앉아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불편했다. 나타니엘의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마치 혼자서 차를 마시는 것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불안한 쪽은 오히려 황후였다.
‘왜 안 하던 짓을 하는 거지? 혹시 내가 윈터스 공작가에 암살자를 보내려 했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밀리아는 나타니엘의 눈치를 살폈다. 차를 한 잔 다 마신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곧 결혼할 것 같습니다.”
“들었습니다, 전하. 축하드립니다.”
지금 나한테 자랑하려고 온 건가? 황후는 표정이 매서워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방긋 웃어 보였다.
“제게 부탁하실 게 있으신가 봅니다. 생전 발 한번 들이지 않던 황후궁에 오시니 말입니다.”
이렇게 된 거 나타니엘의 자존심이라도 뭉개 버릴 생각이었다. 저 초탈한 눈을 보면 밀리아는 늘 이상한 열등감을 느꼈다. 마치 자신과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그 꺼림칙함! 오늘이 기회였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오신 겁니까?”
“딱히 부탁을 드릴 건 아니고요. 아버지께서 꽤 무르게 말씀하셨을까 봐 온 겁니다.”
고고한 그의 반응에 밀리아는 발끈했다. 그래, 어차피 정략결혼이라 부인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그거지? 그녀는 검은 속내를 감추며 살짝 웃었다.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러시는지 모르겠네요. 이 궁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다고요.”
“아까 들어오는 길에 아나이스를 보았습니다.”
무심한 어투였으나 밀리아는 그 속뜻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밀리아는 속으로 이를 갈며 방긋 웃었다.
“그 아이가 왜요?”
“그냥 보았다는 겁니다.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고요.”
나타니엘은 여전히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몸이 단 것은 오히려 밀리아 쪽이었다.
“그래서 대체 원하시는 게 뭡니까. 말씀을 해 주셔야 제가 알 것 아닙니까.”
“제가 말하면 들어 주실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 그건…….”
“들어 주시는 겁니까?”
저 이상한 화술에 또 말려들었다. 황후는 고민하다가 결국 그의 말을 들어 주기로 했다. 모르고 있는 것보다 하나라도 뭘 알고 있는 게 나았으니까.
“들어 줄 터이니 일단 이야기해 보세요.”
“그냥 앞으로 더 잘해 보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왔을 뿐입니다. 황후 폐하로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혼이었을 테니까요.”
“정말 그게 다입니까?”
대단한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찾아왔어야 했을까 싶었다. 밀리아는 오랜 도피 생활로 인해 상대의 의도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뭐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예. 그저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말씀을 드리러 온 겁니다.”
제 할 말을 다 한 듯 나타니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그는 정말로 특별한 목적이 없었다. 황제가 불러서 자신에게 황후를 찾아가 잘 좀 이야기해 보라고 해서 덜렁 온 것이다. 그런데 아나이스를 보고 다른 생각이 들었다. 방을 나서려던 나타니엘은 몸을 돌려 고개를 숙였다.
“적당히 하셔야 할 겁니다, 황후 폐하. 전 관용이 없는 사람이라서요.”
나지막한 목소리와 섬뜩한 붉은 눈이 어우러져 꼭, 악마의 속삭임처럼 느껴졌다. 황후는 뒤로 주춤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찔린 곳이 급소가 아니라더라도 참지 않는다는 소리입니다. 누구처럼요.”
“대체…….”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나타니엘은 당황한 황후를 무시하며 가볍게 고개인사를 한 후 자리를 떴다. 그가 떠나고 나서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린 황후는 이를 갈았다.
“감히 일국의 황후인 나를 협박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헨리를 황태자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 무결해 보이는 남자의 약점을 반드시 찾아야만 했다. * * * 결혼식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교단에서 운영하는 대성당에서 교황의 주례하에 이루어지기로 했다.
‘교황님도 황당하겠네.’
이미 마음을 내려놓은 나는 이 혼란한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디 도망칠 곳도 없었고, 더 나은 선택지도 없었다. 막시밀리안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영지로 떠났다. 영지로 향하는 모습이 패잔병처럼 초라해 보였다. 예전 같았으면 불쌍하다고 여겼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결혼식까지 일주일이 남은 어느 날. 테레사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조용히 만나고 싶다는 그녀의 편지에 나는 흔쾌히 알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다행히 편지에 막시밀리안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약속 장소인 티 룸에 도착한 나는 개인실로 안내됐다. 철저한 익명을 보장해 주는 장소여서 기분이 좀 이상했다. 테레사를 만나는 것뿐인데 마치 범죄를 저지르는 것 같았다.
‘하긴 괜히 호사가들 입에 오르내릴 필요는 없지.’
자리에 앉자 내가 좋아하는 차가 테이블에 올라왔다. 조용히 차를 마시던 나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테레사는 조금 수척해졌지만 그래도 결혼식에서 만났을 때보다는 좋아 보였다.
“테레사 언니!”
“오랜만이에요, 제이나.”
우리는 서로를 가볍게 끌어안고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앞에도 차가 놓이자 분위기가 한층 더 부드러워졌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나야 잘 지냈죠. 제이나는 어땠어요? 결혼 준비하느라 많이 바빴죠?”
“하, 하하. 뭐 준비할 게 있나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테레사는 그런 나를 가만히 보며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는 좋은 분이시니 분명 제이나에게 잘해 주실 거예요.”
여주인공인 테레사에게나 잘해 주는 거겠죠. 나는 눈물을 삼키며 웃어 보였다.
“믿어 봐야죠, 뭐.”
“전 처음부터 알아봤다니까요? 둘이 잘 어울린다는 걸요. 분명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아니에요. 그냥 뭐, 어쩔 수 없었죠. 언니도 알잖아요.”
내 말에 테레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는 아차 싶었다. 그날, 막시밀리안이 결혼식장에서 뛰쳐나와 테레사에게 달려갔으니 그녀도 많이 놀랐을 것이다.
“언니는 괜찮은 거죠?”
“그럭저럭이요. 주변 시선이 좀 불편하긴 한데, 예전에 막스의 약혼자일 때도 그랬으니까요.”
씁쓸한 미소에 새삼 막시밀리안이 얼마나 쓰레기였는지 상기하게 된다. 자기만 아는 쓰레기.
“오늘 만나자고 한 건, 이것 때문이에요.”
테레사는 작은 상자를 꺼내 내게 주었다. 뚜껑을 열어 보라 권하는 눈빛에 나는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블루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뭐예요?”
“이건, 제가 언젠가 제이나가 결혼하게 되면 주려고 준비한 거예요.”
“그, 그런 걸 왜 벌써 준비해 놔요!”
얼마 전까지 난 약혼자도 없었는데 대체 저런 걸 언제부터 준비해 둔 걸까? 괜히 민망해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쳤다. 테레사는 그런 날 이해하듯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제이나가 저한테 잘해 줬잖아요. 만약에 제이나가 아니었다면, 난 아직도 막스에게 목을 매고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막스는 나한테 질렸을 거고요.”
“아니에요, 테레사 언니.”
그놈, 나중에 데굴데굴 구르면서 후회했어요. 나는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참았다. 막시밀리안의 진짜 사랑은 누가 뭐래도 테레사였다. 그런데, 테레사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막시밀리안의 태도를 보면 그럴 만도 했지만.
“그래도 막스와 파혼한 것과는 별개로 제이나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 지지부진한 약혼을 끝내 줘서.”
“언니, 진짜 괜찮은 거 맞죠?”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 같은 희미한 미소에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내게 괜찮다고 말하며 테레사는 활짝 웃어 보였다. 그리고 일어나 목걸이를 내 목에 걸어 주었다.
“원래 결혼할 때, 물려받는 물건이 있으면 행복해진다는 속설이 있잖아요. 제이나는 어머니가 없으니까 내가 해 주고 싶었어요.”
“언니…….”
테레사의 마음만큼 예쁘고 사랑스러운 목걸이였다.
“이제는 가족이 될 수도 없지만, 친구로서 이 정도는 해 줘도 되는 거죠?”
나는 왠지 눈물이 왈칵 났다. 만약에 막시밀리안이 조금만 더 빨리 후회했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둘이 잘 풀고 행복하게 결혼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착하고 사랑스러운 테레사가 내 가족이 되어 주었다면. 모두 상상 속의 이야기였기에 더욱 속상했다.
“어머. 울지 말아요, 제이나. 왜 울어요?”
“그냥, 그냥 정말 고마워서요.”
얻을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아쉬움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테레사는 마치 내 어머니처럼 나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해요, 제이나.”
“네, 네. 그럴게요.”
당신처럼 좋은 사람은 더 행복해져야 해요. 나는 테레사에게 더 좋은 상대가 나타나길 바랐다. 그래서 지금의 고통은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면 더 큰 상처를 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도 꼭 더 좋은 남자를 만나야 해요. 망나니 같은 우리 오빠 말고 건실하고 착한 남자로요.”
테레사에게 그런 남자는 나타니엘이라고 믿었던 나였기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녀의 훌륭한 미래를 내가 빼앗은 것 같았다.
“그럴게요. 제이나의 말대로 막스와는 완전히 다른 남자를 만날게요.”
“나랑 약속했어요.”
“네, 네. 그러니까 그만 울어요.”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안도감이 들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치유 받는 듯한 느낌이다. 상처받고 다친 사람은 테레사였는데. 나는 테레사의 품에 안겨 울며 부디 그녀의 앞길에 행복이 가득하길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