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잠재적 위험 요소2022.03.19.
나타니엘과의 결혼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유유히 진행됐다. 이미 양측이 만난 적이 있으니 상견례도 필요 없다며 모든 것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곧 집에는 온갖 선물이 날아들었다.
“아니, 제 결혼인데 왜 이렇게 멋대로 하는 건데요!”
“이제 와서 발 빼기도 늦었다.”
내 항의에 아버지는 오늘 자 일간지를 던져 주었다. 신문의 첫 면에 굵은 글씨로 나와 나타니엘의 약혼 소식이 박혀 있었다. [본지의 취재에 의하면 둘은 오래전부터 서로에 대한 마음을 키우다가, 가족의 결혼으로 포기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은 윈터스 소공작의 용기로…….]
‘아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야.’
마치 나와 나타니엘이 세기의 사랑을 한 것 같은 기사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주 소설을 쓰고 있었다.
“당장 이 신문사에 연락해야겠어요. 이건 다 거짓말이잖아요!”
“너희 소문이 크게 나야 황녀 전하의 소문이 덮일 것 아니야.”
“그럼 제가 진짜 결혼을 해야 한단 말이에요?”
“그러게 누가 아무 남자나 침실로 들이라고 했냐!”
들어왔을 때는 남자가 아니었다고요! 그냥 작고 귀여운 새끼 용이었는데! 억울함에 입만 벙긋거리는 나를 보며 아버지가 쐐기를 박으셨다.
“넌 도망칠 생각하지 마라. 그런 자식은 한 놈이면 충분하니까.”
그리고 옆에서 차를 마시던 막시밀리안을 노려보았다. 막시밀리안은 움찔하며 모르는 척 시선을 돌리더니 스르륵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미치고 팔딱 뛸 지경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이 사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나타니엘에게 연락을 하자.’
그라면 어떻게든 해 주겠지. 나는 재빨리 나타니엘에게 따로 만나자고 연락을 넣었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니엘에게 답장이 왔다. 흔쾌히 수락하자 괜히 기분이 찝찝했다.
‘설마 날 죽여서 이 약혼을 취소시키려는 계획은 아니겠지?’
왠지 모를 불안감에 나는 가문의 기사를 대동하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속 장소는 으슥한 폐가인 줄 알았더니, 놀랍게도 예쁘장한 온실이 딸린 카페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역시나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적당한 장소에 앉아 음료를 시키고 나타니엘을 기다렸다.
‘좀 늦네.’
창밖을 내다보며 구경하고 있던 나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태자 전하.”
혹시 내 목소리가 떨리진 않았겠지? 나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 여전히 뚱한 얼굴의 나타니엘은 손을 들어서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래도 인사를 받아 주었다는 데서 안도감을 느꼈다. 적어도 날 죽이지는 않겠지.
“저건 뭐야?”
내 뒤에 서 있는 기사를 보자 그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나는 재빨리 적당한 말을 찾아야만 했다.
“아버지께서 제 걱정이 많아서요. 정확히는, 제가 도망갈까 봐요.”
“아.”
나타니엘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이해하기로 했다. 이게 다 막시밀리안 덕분이었다. 나는 기사에게 문 앞에 서 있으라 말하고 자리에 앉았다.
“날 부른 이유가 뭐지?”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묻는 게 정말 딱 그다웠다. 나는 방긋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전하께서는 이 결혼을 하고 싶으신가 해서요. 혹시 싫으시다면…….”
“난 별로 상관없는데.”
뜻밖의 대답에 나는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상관없다니요, 왜요! 하지만 사회생활의 달인답게 우아하게 웃으며 그에게 이유를 물었다.
“결혼은 일생일대의 결정인데 이대로 대충 결정해도 상관없다, 이 말씀이신가요?”
“내가 완전 생각 없는 사람인 것처럼 구는 거 같은데.”
“하하하, 그럴 리가요.”
눈치 빠른 놈. 정확히는 생각 없는 용용이로 본다, 이 자식아.
“공녀가 아는 비밀은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일이야.”
“새끼 용으로 변하는 걸 말씀하시는 걸까요?”
내 대답에 그가 고운 미간을 구겼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싶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래. 하여튼 난 그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거든.”
“네에…….”
“뭐야, 그 대답은.”
“다들 좋아할 텐데 굳이 숨기실 필요가 있을까 해서요.”
다들 나타니엘에게서 용의 흔적을 찾으며 환장하는데, 진짜 용이 된다는 걸 알면 아마 황성으로 성지 순례를 오겠다고 할 판이었다.
“난 그거 별로야.”
나타니엘은 질색을 하며 싫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마치 내가 하늘을 나는 바퀴벌레와 눈을 마주쳤을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예, 뭐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죠.”
그는 잠시 내 눈을 빤히 바라보더니 길게 한숨을 쉬었다.
“자넨 사람들이 매번 기적을 바라며 날 보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아나?”
“가족들의 저에 대한 기대치는 아주 평범해서 잘 모르겠네요.”
내 대답에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는 입을 닫았다. 이놈의 주둥아리, 왜 이렇게 나대는지 몰라.
“지금도 이렇게 지겹게 구는데, 만일 내가 용이 된다는 사실을 안다면……. 아마 내가 죽은 후에 내 시체를 박제로 만들지도 모르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이 세계 사람들의 용을 향한 믿음은 광신도적인 면모가 있었다. 원작에도 엔딩에서 나타니엘이 용의 모습으로 제국을 떠나자 멸망의 징조라며 절망했다는 묘사가 있었다.
“그럴듯하네요.”
“그렇다고 내가 평생 이걸 비밀로 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 특히 결혼할 반려에게는 더욱더.”
“오, 그 말은…….”
어째 결론이 이상하게 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만일 결혼하게 된다면 내게 적극적으로 협조해 줬으면 좋겠군.”
“어…… 네, 그럼요.”
“그럼 믿고 가도록 하지.”
할 말이 그게 다야?
“잠깐만요! 전하께서는 이 결혼이 싫으신 거 아니에요?”
“말했잖아. 상관없다고.”
할 말을 다 한 나타니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톡톡 옷을 털었다.
“대신 내 비밀을 지켜 주는 데에 최선을 다해야 할 거야. 궁 안에 내 편이 하나쯤 있으면 편할 거라고 생각해서 들이는 거니까.”
한마디로 나는 그의 비밀을 지켜 줄 보좌관이나 다를 바 없다는 뜻이었다.
“마…… 만일 들키게 되면요?”
“아주 재미없어지겠지. 공녀의 인생이.”
평소보다 더 서늘해 보이는 붉은 눈이 나를 향했다. 죽일 거다. 저건 틀림없이 날 죽이고도 남을 눈이야! 나는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나타니엘은 빙긋이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럼 결혼식에서 보지.”
말을 남긴 그는 카페를 나가 버렸다. 힘이 쭉 빠졌다. 왠지 말이 조력자지 사실상 날 감시하려고 들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고 이 결혼마저 거절했다가는 황실에서 제대로 보복할 것이 뻔했다. 막시밀리안에게나 사랑의 도피였지, 황제가 보기에는 황실 모독이지 않았겠는가!
‘망했다.’
나는 빼도 박도 못하고 결혼을 하게 생겼다. * * * 황제는 가장 큰 일을 해결하기 위해 황후와 아나이스를 불렀다. 딸의 결혼식이 대참사로 끝난 뒤 그녀는 방에 콕 처박혀서 며칠 동안 울며 지내기만 했다. 매일같이 막시밀리안의 목을 가져다 달라고 떼를 썼고, 공작가에 암살자를 보내려다가 걸렸다. 황제로서는 그런 황후를 설득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부르셨나요, 폐하.”
이미 매체를 통해 나타니엘과 제이나의 결혼 소식을 주워들은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황제를 노려보았다. 엄청난 기세에 황제마저 움찔했다.
“하하, 밀리아. 그리고 아나이스. 이쪽으로 앉아라.”
황제는 그린 듯이 웃으며 둘을 볕이 잘 드는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 그곳은 죽은 선대 황후만이 앉을 수 있었던 자리였다.
“내가 이리 부른 이유는 다들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하네. 나타니엘과 제이나의 결혼 때문이야.”
“전 그 결혼 찬성 못 합니다. 제 딸에게 그런 모욕을 준 가문과 연을 맺는다니요! 폐하께서는 정말 너무하십니다.”
황후는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사랑 없이 진행한 결혼이라지만, 이건 정말 너무했다. 아나이스는 평생 불명예를 안고 살아갈 텐데, 그 집안 딸의 인생은 펴게 해 주겠다니.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
“황후가 얼마나 마음 상했는지 아오. 나 역시 아나이스의 결혼이 그렇게 되어 버려 마음이 아파. 하지만 우린 그냥 귀족 가문의 사람들이 아니네. 황실의 사람들이지.”
“폐하!”
“황실의 일원으로서, 아나이스가 이 정도도 감수 못 할 정도로 자각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딸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얼굴이 아닌, 황제의 얼굴이었다. 그걸 눈치를 챈 아나이스는 고개를 떨궜다. 그러나 황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 결혼은 모두 아들인 헨리를 위한 것이었지, 아나이스를 위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게 이 결혼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제 말은, 그 말도 안 되는 가문과 연을 맺을 수 없다는…….”
“황후, 난 지금 아나이스의 아버지가 아니라 황제로서 황녀에게 명하는 것일세. 이건 권유나 요청이 아니야.”
“폐하!”
황후는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필사적인 얼굴로 매달렸다.
“제 딸이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아나이스가 평생 살면서 뭐 하나 바라던 것도 없었는데, 어찌 이렇게 박하게 대하신단 말입니까.”
“나 역시 아나이스에게 미안해. 하지만 나타니엘이 황제로서 우뚝 서게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날카로운 시선이 황후를 향했다. 마치 헨리를 데리고 뒤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황후는 입술을 꽉 물었다.
“아나이스가 황녀로서 자각이 있다면 이 일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네.”
황제는 그렇게 말하며 아나이스의 결단을 재촉했다. 아나이스는 그런 황제의 시선을 피하며 천천히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
“아나이스!”
“다 제가 막시밀리안 님의 마음을 잡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니까요. 전 나타니엘 오라버니와 제이나 님이 결혼하셔도 상관없어요. 오히려 두 분이 행복하길 바라는걸요.”
차분한 아나이스의 말에 황제는 너무 기뻐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어떻게 저런 순한 아이가 황후 밑에서 태어났는지. 용할 지경이었다.
“그래, 그래. 아나이스는 참으로 황실의 피를 이은 자답구나. 내 네 신랑감으로 훌륭한 남자를 찾아 보마.”
“감사합니다, 폐하.”
그는 아나이스에게 보상을 해 주고 싶었다. 이것저것 갖고 싶은 것을 묻고, 선물을 안겨 주기로 마음먹었다.
“아, 그리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하거라. 응?”
“아닙니다, 폐하.”
아나이스는 씁쓸함을 감추며 애써 웃어 보였다. 어차피 이 결혼은 제가 원한 것도 아니었고, 그 사실을 모르는 아버지가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그렇다 해도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 * *
자신의 궁으로 돌아온 황후는 들고 있던 부채를 힘껏 바닥에 집어 던졌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구두로 마구 짓밟으며 소리를 질렀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황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다 차려진 밥상을 윈터스 공작가의 그 망나니 새끼가 걷어차더니, 황제가 다시 밥상을 차리고 그걸 나타니엘이 받아먹게 생겼다.
“너, 너 이 나쁜 것!”
그리고 그 화살은 아나이스에게로 향했다. 아나이스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지만, 밀리아 쪽이 훨씬 빨랐다. 황후는 아나이스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이 멍청한 것! 내 평생 도움이 안 되는 것!”
“어, 어머니.”
“어머니라고 부르지도 말아라! 네 동생의 앞길에 보탬이 되어 주지는 못할망정 재를 뿌려?”
그녀는 씩씩거리며 옆에 있던 꽃병을 들어 아나이스에게 집어 던졌다. 간발의 차이로 피한 아나이스를 보고 화가 더 난 황후는 손에 집히는 대로 그녀에게 집어 던졌다.
“망할 것! 네가 착한 척한다고 성자라도 될 줄 알아!”
아나이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황후궁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이 지옥이 끝나길 바랐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들겼다.
“화…… 황후 폐하.”
“뭐야!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이야기 못 들었어?”
“그, 그게…… 황태자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뜻밖의 손님에 황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타니엘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황후궁에 발을 들이다니.
“자, 잠깐만 기다리라 해라! 그리고 시녀들을 불러와!”
황후는 허둥지둥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머리를 다시 만졌다. 밀리아는 뒤에서 고개를 숙인 채로 서 있는 아나이스에게 소리쳤다.
“넌 당장 안 나가고 뭐 하니? 그 꼴을 황태자에게 보일 셈이야?”
“아, 네. 금방 나갈게요.”
밀리아의 일갈에 아나이스는 조용히 복도로 나왔다.
‘그래도 많이 맞지 않아서 다행이야.’
속으로 중얼거리며 아나이스는 후문으로 향했다. 사람이 거의 없는 으슥한 복도를 바쁘게 뛰어가던 아나이스는 누군가와 부딪혔다.
“아, 아야.”
“괜찮나?”
고개를 들자 놀랍게도 나타니엘이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