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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꼬이려면 이렇게 꼬인다 (12/145)

12화. 꼬이려면 이렇게 꼬인다2022.03.12.

황태자가 좋아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나는 빠르게 주방으로 내려갔다.

1655084197317.jpg“아가씨,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주방장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긴 내 평생 주방에 들어온 적이 없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일단 난 달콤한 무언가를 찾았다. 원작에 테레사가 나타니엘에게 타르트를 선물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뭐 이런 걸 사 오냐고 말하면서도 큰 판 하나를 혼자 다 먹었다는 걸 보면, 분명 그는 디저트를 좋아하는 게 틀림없었다.

16550841973174.png“혹시 타르트나 케이크가 있을까?”

1655084197317.jpg“예? 평소에 드시지도 않던 단걸 왜…….”

나는 적당한 핑곗거리를 찾았다.

16550841973174.png“요즘 오라버니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너무 받았나 봐. 단 게 막 땅기네?”

머리에 손을 살짝 올리기까지 했다. 주방장은 막시밀리안의 이야기를 듣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1655084197317.jpg“케이크는 없지만, 다른 걸 금방 준비해서 올리겠습니다.”

16550841973174.png“아아, 아니야. 내가 직접 가져갈게.”

내 말에 주방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능숙하게 달걀을 깨고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했다. 노른자에 우유와 바닐라 빈, 밀가루를 넣어 반죽을 만들었다. 흰자로는 머랭을 쳐서 반죽에 조금씩 넣으며 섞었다.

16550841973174.png“팬케이크야?”

1655084197317.jpg“예. 두툼하고 부드러운 놈입니다.”

주방장은 곧 팬에 기름을 살짝 두르고 반죽을 두껍게 올린 뒤 뚜껑을 덮어서 익혔다. 팬케이크가 앞뒤로 노릇하게 구워지자 접시에 올려 딸기잼과 베리류 과일, 그리고 생크림을 얹었다.

16550841973174.png“와. 진짜 맛있겠다.”

1655084197317.jpg“아가씨가 어렸을 때 좋아하시던 음식입니다.”

16550841973174.png“그렇구나.”

애석하게도 기억을 헤집어 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주방장은 데코레이션이 끝난 접시를 들고 올라가려 했다.

16550841973174.png“어어, 내가 들고 올라갈게.”

1655084197317.jpg“뜨거우실 겁니다.”

16550841973174.png“아니야. 이 정도는 충분히 들 수 있어. 오늘 고마웠어!”

조심스럽게 접시를 들고 내 방으로 향했다. 하얀 침대 위에 일자로 쭉 누워 있는 나타니엘이 한눈에 보였다. 비록 용의 모습이었지만.

16550841973174.png“배고프시죠? 이리 오셔서 이거 드세요.”

내 말에 나타니엘은 느릿하게 날갯짓해 탁자 위에 착륙했다. 얼굴을 팬케이크에 가져다 대고 킁킁거리는 모습이 귀엽긴 했다.

16550841973174.png“앗, 잠깐만요. 코에 크림 묻었어요.”

조심성 없는 행동에 얼굴 여기저기에 생크림이 묻었다. 나는 손수건으로 그걸 말끔히 닦아 주었다. 그리고 그가 음식을 먹기를 기다렸다.

16550842002132.png[손이 없어.]

16550841973174.png“아…….”

나타니엘은 조그마한 손으로 탁자 위를 탁탁 쳤다. 나는 짜증을 삼키고 방긋 웃으며 팬케이크를 썰었다. 폭신한 감촉이 칼과 포크로 생생히 느껴졌다. 새끼 용이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생크림과 딸기를 올려 그의 입 앞에 가져다 댔다.

16550841973174.png“아, 하세요.”

16550842002132.png“…….”

16550841973174.png“전하?”

자존심이 상한 걸까? 나는 그의 눈치를 보다가 무언가를 떠올렸다. 원작에서 그는 누군가가 주는 음식을 반드시 다른 이가 먹은 뒤에야 입에 댔다. 어린 시절에 독살당할 뻔한 뒤로 생긴 절차였다.

16550841973174.png‘이 남자도 참 다사다난하네.’

나는 팬케이크를 그가 보는 앞에서 입에 넣었다. 부드럽고 폭신한 팬케이크의 식감 사이로 달콤한 생크림, 그리고 상큼한 딸기잼의 맛과 향이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16550841973174.png“정말 맛있어요! 자요, 이제 전하도 드세요.”

새로 자른 조각에 생크림을 듬뿍 얹어서 딸기와 함께 그의 입 앞에 가져다 댔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입을 벌려 그것을 덥석 받아먹었다. 천천히 우물거리던 그의 눈이 순수하게 반짝거렸다. 씹는 속도가 빨라지더니 곧 꿀꺽, 하는 소리가 났다. 바짝 서 있던 꼬리가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꼭 강아지 같았다.

16550842002132.png[더 줘.]

16550841973174.png“예, 예. 여기 드리겠습니다.”

황태자의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다. 나는 팬케이크를 열심히 썰어서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는 꿀떡꿀떡 잘도 받아먹었고 눈에 띄게 표정이 밝아졌다.

16550841973174.png‘용이라서 이걸 표정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배부르게 먹었는지 나타니엘은 배를 통통 치며 테이블 위에 드러누웠다. 게다가 졸린지 눈이 슬슬 감기고 있었다.

16550841973174.png‘내 침대에서 재울 수는 없는데.’

아무리 겉모습이 귀엽고 깜찍한 아기 용이라지만, 그 실체가 엄연히 황태자인 이상 동침은 절대 안 되었다. 비틀거리며 공중을 날아 침대 위에 풀썩 엎어지는 나타니엘을 보던 나는 밖으로 나가 하녀를 불렀다.

16550841973174.png“미아, 가서 깨끗한 바구니를 구해 오렴.”

1655084197317.jpg“바구니요? 얼마만 한 크기를 바라시나요.”

16550841973174.png“한 이 정도?”

나는 손으로 나타니엘보다 조금 크게 원을 그렸다.

1655084197317.jpg“네. 금방 가져다드릴게요.”

하녀는 금방 바구니를 가져왔다. 평범한 라탄 바구니로 괜찮을까 싶었지만 일단 갖고 들어가기로 했다.

16550841973174.png“난 이제부터 잘 거니까 방에 아무도 들이지 마. 알았지?”

1655084197317.jpg“네.”

미아에게 단단히 타이른 뒤 나는 방으로 들어왔다. 어느새 나타니엘은 몸을 둥글게 말고 잠이 들어 있었다. 나는 바구니에 베개를 넣고, 그 위에 조심스럽게 나타니엘을 올렸다. 다행히 피곤했는지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잘도 잤다.

16550841973174.png“팔자에도 없는 애완동물을 키우는 기분이네.”

얌전히 눈을 감고 있는 새끼 용, 나타니엘은 정말 귀여웠다. 눈을 뜨고 입을 열면 좀 문제인 것 같지만. 나는 가만히 바구니 안을 들여다보다가 침대에 누웠다. 정말 폭풍 같은 하루였다.

16550841973174.png‘아버지가 폐하께 잘 말씀드려야 할 텐데…….’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나는 금세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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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늦은 밤, 공작저로 돌아온 윈터스 공작은 피곤함에 절어 있었다. 그는 곧장 서재로 향했다. 머리가 복잡하다. 황제에게는 그래도 딸의 의견을 묻겠다고 했으나 아마 다른 선택지는 없는 것 같았다. 한숨을 푹 내쉰 공작은 집사에게 술을 내어 오라 하고 소파에 앉았다.

1655084197317.jpg‘인생…….’

여태껏 잘난 아들, 딸을 두고 남 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루아침 사이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공작은 독한 술을 잔에 따라 단숨에 들이마셨다. 목을 타고 흐르는 액체의 뜨거운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16550842059069.png“아버님, 안에 계십니까?”

1655084197317.jpg“들어와라.”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막시밀리안의 목소리에 화를 낼 기운도 없었다. 사랑을 사랑으로 잊으라고 억지로 결혼을 밀어붙인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빼꼼 문을 열고 들어온 막시밀리안의 얼굴이 어두웠다. 사고를 치고 나니 가문이 걱정되긴 한 것처럼 보였다.

1655084197317.jpg“그래. 무슨 일이냐.”

16550842059069.png“잘 이야기를 하고 오셨나 해서요.”

생전 남 눈치 안 보고 큰소리치며 살았던 막시밀리안이 기가 죽어 있었다. 하지만 공작은 그가 하나도 불쌍해 보이지 않았다. 지금 제일 불행할 사람은 제이나고 그다음은 자신이었다.

1655084197317.jpg“왜? 이제 와서 걱정되냐?”

16550842059069.png“예…….”

1655084197317.jpg“머저리 같은 놈. 제 마음 하나 못 잡아서.”

16550842059069.png“폐하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던가요?”

우물쭈물 묻는 그를 보며 공작은 숨이 턱 막혔다.

1655084197317.jpg“제이나와 황태자 전하를 결혼시키자고 하더구나.”

16550842059069.png“예? 제이나를……요?”

1655084197317.jpg“그래. 아니면 소르체 광산을 달라고 할 기세더군.”

처음부터 둘의 결혼이 아니면 다른 걸 받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나타니엘은 그 고고한 성정 탓에 귀족들 사이에서 지지 기반이 약했다. 특히 황후가 헨리 황자를 낳은 뒤로는 더욱 심해졌다. 황제는 자식들끼리 피를 흘리지 않는 선에서 나타니엘이 세력을 공고히 하길 원했지만, 나타니엘은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그를 든든하게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윈터스 공작가를 원했을지도 몰랐다.

1655084197317.jpg‘애초에 아나이스와 막시밀리안의 결혼은 왜 밀어준 건지 이해할 수 없군.’

공작은 복잡한 생각을 잊고 싶어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16550842059069.png“그럴 수가. 제가 폐하와 다시 한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655084197317.jpg“아서라. 멍청한 네놈은 가서 폐하의 화만 돋울 거다. 넌 앞으로 한 달간 근신하고, 겨울에는 북부 영지로 돌아가서 내가 부를 때까지 거기 있어.”

막시밀리안은 청천벽력 같은 공작의 말에 인상을 썼다. 만일 그렇게 되면 테레사와 너무 멀어진다. 아직 테레사의 마음도 돌리지 못했는데. 공작은 막시밀리안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1655084197317.jpg“테레사 이야기라면 입에 올리지도 말아라! 메니실 가문까지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은 게냐?”

16550842059069.png“아…… 아닙니다.”

테레사를 곤궁에 빠트리고 싶지는 않았다. 막시밀리안은 공작의 건너편에 앉았다.

16550842059069.png“제이나가 쉽게 결혼을 할까요? 분명 싫어할 겁니다.”

1655084197317.jpg“싫어해도 걔는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애다. 누구처럼 사랑에 눈이 멀어 앞뒤 잴 것도 없이 뛰어드는 놈이 아니라.”

말할수록 속이 터졌다. 공작은 입을 꾹 닫고 술만 퍼마셨다. 어떻게 하면 제 딸에게 이 비극적인 소식을 기분 나쁘지 않게 전할지 고민하며. * * * 새벽의 찬 공기에 새끼 용이 일어났다. 새끼 용은 천천히 눈을 끔뻑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16550842002132.png‘여기가 어디지?’

뒤늦게 자신이 윈터스 공작가로 도망쳤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나타니엘은 몸을 쭉 늘렸다. 오랜만에 편히 잔 것 같았다. 그는 날개를 파닥거리며 바구니에서 나와 탁자 위에 앉았다. 요즘 나타니엘은 발작처럼 찾아오는 변신에 지쳐 있었다. 곧 죽어도 이런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16550842002132.png‘재수가 없었지.’

그래, 재수가 없었다. 용의 인간 모습을 닮았으면 그걸로 끝날 것이지, 진짜 용이 될 건 뭔가. 게다가 거대한 드래곤도 아니고 기껏해야 소형견 크기의 새끼 용의 모습이다.

16550842002132.png‘죽어도 다른 놈들에게 이런 모습은 못 보여 줘.’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처음 용으로 변신한 이후부터 그는 자신의 모습을 감췄다. 어린 시절, 지금보다 더 작았을 때는 유모의 도움을 받았다. 조금 크고 나서는 어머니와 친한 사제가 운영하는 작은 신전 뒤에 있는 호숫가에 몸을 숨겼다. 그런데 용의 힘 때문인지, 그 호숫물에 신성한 힘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면서 숨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게다가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황후에게 꼬리까지 잡혔다. 그때 제이나를 만난 건 꽤 행운이었다. 나타니엘은 세상모르고 자는 제이나의 머리맡에 내려앉았다. 아무리 자신이 새끼 용의 모습을 하고 있다지만 너무 태평하다. 낮에 있었던 대참사를 떠올리면 진이 빠져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황후의 낯짝을 구경하는 건 꽤 재밌는 일이었다.

16550841973174.png“우…… 우우웅. 제발 그만 좀 해, 이 머저리야.”

꿈에서도 가족에게 시달리는 걸까. 제이나는 여태껏 들어 본 적이 없는 거친 욕설을 웅얼거렸다. 역시, 한 성격 하는 것 같더라니. 한참을 제이나가 하는 욕을 듣던 나타니엘은 서서히 잠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옆에 있는 베개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원래대로라면 새신부를 맞이해서 떠들썩했을 공작가는 조용히 아침을 맞이했다. 늦게까지 과음을 한 공작도 숙면 중이었고, 동생에게 짐을 떠넘기는 것 같아 양심의 가책을 느끼던 막시밀리안도 선잠이 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활기찬 아침을 위해 사용인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속이 안 좋을 사람들을 위해 토마토수프를 끓이고, 따끈한 빵을 구워 냈다. 아침 준비를 마친 그들은 방문을 두들기며 주인들을 깨웠다. 얼굴이 잔뜩 부은 공작과 부스스한 머리를 한 막시밀리안이 식탁에 앉았다.

1655084197317.jpg“제니는?”

1655084197317.jpg“아직 자고 계십니다.”

1655084197317.jpg“끄응. 어서 가서 불러…… 아니다. 내가 가마.”

공작은 오늘 딸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폭탄을 떠맡게 된 제이나의 반응이 무섭기도 했다.

1655084197317.jpg‘그 애는 아침에 늘 약했지.’

그러니 조심스럽게 깨워서 맛있는 걸 먹이며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그러나 제 눈앞에 벌어진 일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곱게 잠이 든 딸 옆에 외간 남자가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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