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우리 집에 왜 왔니?2022.03.09.
그 뒤로는 아수라장이었다. 덩그러니 남은 신부는 울기 시작하고, 아버지는 좀처럼 깨어나지 못하시고. 황제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떴다. 그 난장 속에서 정신이 멀쩡한 사람은 나뿐이었다. 웅성거리는 하객들을 모두 보내자 식장에는 황후와 황태자만 남았다.
“오늘 일은 공작이 정신을 차리면 반드시 죄를 물을 것이야!”
황후는 날 거의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하긴,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이 이런 대망신을 당했으니……. 나라도 화가 날 것 같다. 쿵쿵거리며 자리를 떠나는 그녀 뒤로 고개를 숙였다.
‘망했구나.’
남주 인생에 참견 좀 했다가 가문이 망하게 생겼다. 이거 혹시 내 탓인가? 내가 원작을 바꿔서 이렇게 된 거야? 허무함에 의자에 앉아서 생각을 정리하는데 나타니엘이 다가왔다.
“역시 네 오라비는 미친놈이더군.”
“저도 아니까 말하지 마세요.”
“상상 이상이야.”
“…….”
별로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식장이 정리된 것을 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돌아가 볼게요. 보시다시피 제가 할 일이 많아서요.”
“아아.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 설마 폐하께서 공신 가문의 목을 치기야 하겠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건가?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마차에 올랐다. 일단 그 미친놈을 잡아들이는 것이 먼저였다.
* * * 막시밀리안은 금세 잡혔다. 식장에서 멀리 있지도 않았다. 망연자실한 테레사 옆에서 무릎을 꿇고 애걸복걸하고 있는 걸 공작가 기사단이 발견해서 붙들어 왔다.
“이, 이 머저리 같은 자식!”
눈을 뜬 아버지는 막시밀리안을 무차별적으로 두들겨 팼다. 그가 신나게 두들겨 맞고 있었지만, 여전히 내 성에 차지 않았다. 아버지께 몽둥이라는 무기를 쥐여 드리고 싶은 것을 참았다.
“하기 싫으면 식장 들어가기 전에 말했어야지! 사람들 다 있는 데서, 외국의 사절까지 왔는데, 감히 황실을 능멸해!”
“죄송합니다, 아버지.”
“이게 죄송하다고 끝날 일이야? 네 그 멍청한 사랑 놀음에 가문이 날아가게 생겼는데!”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당장 황녀 전하께 사과해라!”
“사과는 할 겁니다. 그분은 피해자이시니까요. 하지만 결혼은 못 합니다.”
“이, 이이이!”
아버지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나는 아버지에게 물을 건네며 말했다.
“진정하세요, 아버지. 그러다가 또 쓰러지시겠어요.”
내 말에 아버지는 자리에 털썩 앉으셨다. 아버지의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을 보자 가슴이 아팠다.
“일단 이 결혼은 끝났어요. 다들 오라버니가 뭐 때문에 파혼했는지 알 거 아니에요. 강행하는 것도 꼴이 웃기고…….”
“하아. 앞으로 폐하의 얼굴을 어찌 보냐! 게다가 파혼의 이유가 우리 쪽에 있으니 어떤 걸 요구하실지 몰라 눈앞이 캄캄하구나.”
아버지는 주저리주저리 말하기 시작하셨다. 더 많은 마석을 싼값에 황실에 넘기라 할 수도 있었다. 재수 없으면 마석을 채굴하는 광산을 넘기라고 할 수도 있었고.
“일단 폐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 네 말대로 해야겠다. 하아……. 머리가 아프니 너희들도 그만 나가거라.”
아버지는 머리를 움켜쥐며 축객령을 내리셨다. 나는 방에서 막시밀리안을 끌고 나왔다. 그는 패기롭게 깽판을 쳤다고 믿기 힘들 만큼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했는데 테레사가 안 받아 줘?”
“…….”
“뭐 결혼식 엎고 달려가면 테레사가 감격하면서 널 받아 줄 거라고 생각했나 봐.”
“닥쳐.”
나는 부글거리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단숨에 뺨을 올려붙이자 막시밀리안의 시린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정신 차려. 거기서 테레사가 널 받아 줬으면 메니실 백작가도 이 일에 책임을 물었어야 했을 거야. 넌 네 사랑을 테레사에게 증명해 보이려다가 그녀의 가문을 파멸시킬 뻔했다고.”
내 말에 막시밀리안의 몸이 굳었다. 그래, 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 없었겠지. 막시밀리안은 부족할 것 없이, 남들의 호의 속에서만 살아왔다. 그 잘난 외모와 소공작이라는 신분 덕에. 그러니 타인을 배려하고 상대의 입장을 고려할 줄 몰랐다. 왜냐고? 할 필요가 없으니까.
“오라버니는 정말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이야. 그딴 걸 사랑이라고 포장하지 마. 넌 그냥 테레사에게 거절당한 걸 참을 수 없었던 거니까.”
굳어 버린 그를 두고 난 내 방으로 돌아왔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내가 아직 이 소설의 주인공인 그에게 기대라는 것을 했던 것 같아서 어이가 없기도 했다.
“아아아악!”
“삐이!”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 몸을 날렸는데, 무언가 뭉클한 게 느껴졌다.
“으악! 뭐야.”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와 뒤로 물러난 나는 이불을 살짝 들어 올렸다. 화가 난 것 같은 붉은 눈의 검은 새끼 용이 날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이불을 덮었다.
“어휴. 너무 화가 나서 헛것이 보이네.”
“삐, 삐이!”
내 등을 때리는 앙증맞은 타격감을 애써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하는데, 옷자락이 붙잡혀서 그대로 앞으로 넘어졌다.
“삐유.”
공중에서 짧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거만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나타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평소 같았으면 쫄았겠지만, 저 모습으로 그래 봤자 하찮고 귀엽기만 했다.
“전하, 대체 저희 집에는 무슨 일이신가요.”
내 물음에 공중에 붉은색으로 글씨가 쓰이기 시작했다.
[돌아가는데 갑자기 몸이 이렇게 변해서 숨으러 왔어.]
“왜 그 장소가 저희 집인데요.”
[그야 네가 내 비밀을 아니까.]
우리가 서로의 비밀 친구였던가? 그다지 알고 싶지 않은 비밀을 알게 된 탓에 이제는 용을 키워야 한다니.
“그때 그 신전에 가서 숨으시면 되잖아요? 가기 어려우시면 제가 데려다드릴게요.”
[거긴 그대한테 들킨 이후로 안 가.]
이미 한 번 들킨 이상 은신처로서 가치가 떨어져 버렸다는 이야기였다. 지난번에는 황후의 사람들도 와 있었으니 더 위험하겠지. 게다가 황실에 죄를 지은 상황에 황태자를 내쫓을 수도 없었다. 거기에 누구라도 우리 편을 들어줄 사람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원래 모습으로는 언제 돌아오실 수 있으세요?”
[나도 몰라. 대략 3~5일 정도?]
“지난번에는 금방 돌아왔잖아요!”
[운이 좋았다.]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남자와 한방을 써야 한다는 게 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지금은 작고 귀여운 새끼 용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앞발로 이불을 꾹꾹 누르면서 장난치는 모습을 보니 심장이 위험할 지경이다.
“제 방에 머무는 걸 허락해 드릴게요. 대신! 얌전히 계셔야 해요. 아시다시피 오라버니가 사고 쳐서 분위기가 영 안 좋거든요.”
새끼 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귀엽긴 하네, 귀엽긴.
“배고프시죠? 여기 계세요. 제가 먹을 것 좀 가져올게요.”
내 말에 나타니엘은 다시 침대에 앉아서 날 올려다보았다. 나는 재빨리 방을 나섰다. 황태자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을 다짐하며.
* * * 윈터스 공작은 잔뜩 긴장해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대체 무엇을 요구할까 등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폐하께서 들어오시라 하십니다.”
시종장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차갑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공작은 긴장을 풀기 위해 손을 펼쳤다 오므리기를 반복하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늑하게 꾸며진 집무실에 앉아 있던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오게. 이쪽으로 앉지.”
윈터스 공작은 황제가 안내한 자리에 앉았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손에 자꾸만 땀이 찼다. 그나마 황제가 아량을 베풀어 당장 잡아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어제는 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알긴 아는군.”
“이, 이 실수를 어떻게 만회할지 말씀만 해 주신다면…….”
윈터스 공작의 말에도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팔걸이의 가죽을 어루만지며 무언가 생각에 빠진 듯 보였다. 1분 1초가 너무 길었다. 윈터스 공작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뚝뚝 흐르는 땀을 닦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뭐, 욕심껏 갖고 싶은 것을 말한다면 역시 소르체 광산이지.”
“그, 그것은…….”
소르체 광산은 공작령에서 가장 큰 마석 광산이었다. 1년 마석 채굴량의 절반은 소르체 광산에서 나왔다. 그 광산이 황실에 넘어가면 공작가는 그냥 쫄딱 망할 수밖에 없었다.
“폐하!”
공작은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제 아들놈이 황녀 전하께 몹쓸 짓을 했다는 것은 압니다. 하오나 그 광산은 저희 영지민들의 생활을 책임지고 있는 소중한 자원입니다. 부디 그 점을 살펴 주시옵소서.”
황제는 공작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바닥에 찧으며 잘못을 고하는 모습에 속상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황제도 소르체 광산을 빼앗을 생각은 없었다. 단지 공작이 어디까지 내어 줄 각오인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
“허허, 영지민들을 생각하는 공작의 마음이 이렇게 크다니, 나로서는 그저 고마울 뿐이군.”
“폐하.”
공작은 연기가 먹힌 것을 감사히 여기며 고개를 들었다. 인자한 얼굴을 가장한 황제가 그를 일으켜 반대편에 앉혔다.
“시종장은 교단에 연락해 치료사를 불러와라.”
기다렸다는 듯이 얼마 지나지 않아 치료사가 들어왔다. 그리고 휑했던 탁자 위에 향긋한 차와 쿠키가 올라왔다.
“어서 들게, 공작.”
“감사합니다. 폐하.”
공작은 그제야 안심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맹렬하게 소르체 광산을 대신할 만한 것을 찾았다. 동쪽에 있는 휴양지로 이름난 아름다운 섬이나, 작은 마석 광산의 이름들을 떠올리던 그때. 침묵을 깨고 황제가 입을 열었다.
“난 아나이스가 다른 여자 때문에 결혼식장에서 소박맞았다고는 공표하지 않을 걸세.”
“예, 예.”
공작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멍청하고 끔찍한 아들놈이 메니실 백작가를 초대한 탓에, 그 재앙이 전 약혼자 때문이라는 걸 모든 사람이 알고도 남았다.
“하지만 소공작이 뛰어나간 걸 모두 봤으니 아주 곤란하지.”
“죄송합니다, 폐하. 최대한 황녀 전하께서 입으신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황제는 히죽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황녀뿐만이 아니다. 이건 황실의 명예와 관련된 일이지.”
공작은 다시 긴장하며 손을 만지작거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는 걸까.
“하지만 난 실리적인 사람이야. 윈터스 공작가는 국가에 아주 오랫동안 봉사해 왔고, 평판도 좋았어. 그런 가문과의 동맹을 포기하기에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설마 황녀와 막시밀리안의 결혼을 다시 추진하겠다는 건가? 공작의 머리가 다시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결혼식을 다시 치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테레사에게 정신이 나가 버린 막시밀리안에게 있었다. 그 미친 녀석을 어떻게 구슬려야 결혼식장에서 예, 소리가 나오게 만들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다 아팠다. 하지만 황제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황태자와 공녀가 결혼하는 건 어떤가 싶네.”
“예, 물론 저도 그렇게…… 예?”
공작은 자기 귀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귀를 툭툭 쳤다.
“막시밀리안이 도망친 건, 동생의 사랑을 알아차려서 도망갔다고 적당히 포장을 하는 거지.”
“아, 아니. 그게 그렇게…….”
그게 그렇게 쉽게 덮일까요? 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공작을 보는 황제가 확신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차마 그 앞에서 죄인인 공작은 무모한 계획이라고 내뱉을 수 없었다.
“사실 이전부터 나타니엘의 짝으로 공녀를 생각하고 있었거든. 참 똘똘하고 참한 아가씨라 말이야. 어차피 막시밀리안 놈과의 결혼은 물 건너갔으니 나타니엘이라도 해치워야겠어.”
황제는 주먹을 불끈 쥐며 포부를 밝혔다.
‘왜 하필 우리 딸인데요!’
그러나 공작은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