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도망친 신랑2022.03.05.
“테레사, 네가 나한테 실망 많이 한 거 알아.”
힐끗 본 테레사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그녀를 보며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그날은 내가 말이 너무 심했어. 네가 다른 남자랑 있는 걸 보니까 화나서.”
그는 순순히 자신의 질투를 인정했다. 테레사를 상대로 질투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게 문제였다. 자신만 아는 예쁜 모습을 남들이 보는 것도, 그녀가 다른 남자와 춤을 추는 것도 싫었다. 솔직히 자신이 보아도 황태자와 테레사가 잘 어울려서 더 화가 났다.
“치졸하다고 욕해도 돼. 그냥 질투가 나서……. 미안해, 테레사.”
자신의 사과에도 여전히 말이 없는 테레사 때문에 막시밀리안은 점점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어쩌면 정말로 그녀가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렇구나. 고마워, 사과해 줘서.”
“그럼 우리 다시…….”
“미안해, 그럴 일은 없을 거야.”
테레사는 쓰게 웃었다. 아마 얼마 전이었다면 그의 사과에 감동하며 다시 그의 곁에 눌러앉았을지도 몰랐다.
“나 이제 네 곁에서 더는 버틸 자신이 없어.”
“테레사, 내가 잘못했어. 제발. 이렇게 빌 테니까.”
“왜 이제야?”
“뭐?”
“이제 와서 사과한다고 해도 내가 받은 상처가 다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테레사, 나는……. 내가 앞으로 더 잘할게, 그러니까…….”
테레사는 우는 것 같기도, 웃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미안해, 막스. 난 이제 그만하고 싶어.”
청천벽력 같은 선언이었다. 테레사가 정말 자신과 파혼하길 바란다고?
“앞으로 행복하게 살길 바랄게.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거야.”
“테레사, 테레사!”
붙잡을 틈도 없이 그녀는 방에서 나가 버렸다. 막시밀리안은 그제야 자신과 테레사가 정말로 끝이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테레사를 만난 뒤로 막시밀리안은 방 안에만 콕 처박혀서 지냈다. 가끔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겨 방에서 나왔을 때의 모습은 내가 다 놀랄 정도로 처참했다. 수염도 제대로 정리하지 않았고, 머리도 제멋대로 자라게 내버려 두었다.
‘누가 보면 세기의 사랑을 한 줄 알겠네.’
어쨌거나 시간은 차곡히 6개월이나 흘렀다. 그사이에 아버지는 황녀와의 약혼도 성사시켰다. 처음에는 반항했던 막시밀리안이었지만, 테레사에게 대차게 까이고 나서는 군말 없이 약혼을 받아들였다. 나는 테레사가 불편할까 봐 카시안을 통해서만 그녀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예전처럼 지내지 못하는 건 아쉬웠지만, 그 서운함은 테레사가 잘살고 있다는 것으로 위로되었다. 그렇게 막시밀리안과 황녀의 결혼식이 다가왔다. 그리고 당일.
“날씨 좋네.”
몇 번 만나 본 아나이스 황녀는 원작에서 묘사된 것과 달리 꽤 좋은 사람처럼 보였다. 왜 그런 여자가 막시밀리안과 결혼하려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막시밀리안의 껍데기는 완벽했기 때문에 뭐 이해는 할 수 있었다. 화창한 날씨에 부응하듯 결혼식은 무려 야외에서 진행되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구름 한 점 없는 높은 하늘이 둘의 결혼을 축복하는 것 같았다.
“허허허, 어서 오십시오.”
“축하드립니다, 공작 각하.”
아버지는 물밀듯이 밀려오는 축하 인사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나 역시 아버지 옆에 서서 방긋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모습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무려 메니실 백작 부부와 테레사였다. 나는 놀라서 아버지의 옆구리를 마구 찔렀다.
“아버지가 초대하셨어요?”
“아니? 너 같으면 초대하겠느냐?”
“그럼 대체 누가 초대한 거예요?”
나와 아버지는 서로 눈치를 보면서 제발 그들이 이쪽으로 오지 않길 기도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은 우리 앞에 섰다.
“축하드립니다, 공작 각하.”
“오…… 오. 메니실 백작, 와 주다니 고맙네. 비록 우리 자식들의 연은 짧았지만, 가문의 연은 영원할 것 아닌가.”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답하는 백작의 목소리와 이가 갈리는 소리가 함께 들린 것은 내 착각일까? 나는 불안한 눈으로 옆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테레사를 보았다. 한눈에 보아도 그녀는 엉망이었다. 많이 수척해져 있었고,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낯빛이 어두웠다. 나는 괜히 양심에 찔렸다. 대체 누가 그녀를 이 결혼식에 초대한 것인가!
“안쪽에 자리가 있어요.”
그들을 눈요깃거리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저희 자리로 가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단숨에 거절했다. 주변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도 그들은 공신들이 모여 있는 자리로 향했다. 그것도 가운데 자리로.
“와, 공녀의 집안,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쓰레기군.”
언제 왔는지 내 등 뒤에 서 있던 나타니엘이 중얼거렸다.
“저, 저희가 초대한 게 아닌데요.”
“공작가에서 초대하지 않았다면 대체 누가 초대했단 말이야?”
그들이 보여 준 초대장에는 공작가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혹시 실수로 보내졌을까 싶었지만, 글씨마저 공작의 필체였다.
‘설마 오라버니, 이 미친놈이?’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나타니엘이 말했다.
“저기 저 멍청한 네 오라비가 보낸 것 같은데, 내 말이 틀렸는가?”
그의 말에 나는 막시밀리안을 보았다. 온갖 감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테레사를 보고 있는 걸로 보아 그가 일의 원흉임이 확실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가림막밖에 없는 대기실로 향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머저리 같은 놈아!”
목소리는 낮췄지만 비난의 기색을 숨길 생각은 없었다. 오라버니의 턱 밑에 손가락을 들이대며 위협했다.
“혹시 미쳤어?”
“…….”
“왜? 아예 저 여자가 사실은 내 전 약혼녀라고 광고라도 하고 다니지 그래.”
“그러려고 부른 게 아니야.”
“그럼 뭔데? 오빠가 이렇게 결혼해서 잘 먹고 잘살 거라고 보여 줘야 속이 시원하니? 그것도 귀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막시밀리안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안 올 줄 알았어.”
“일부러 초대했다고 생각할 것 아니야! 너 같으면 빡이 쳐요, 안 쳐요? 그 부모님들이 이를 갈면서 참석하셨더라!”
막시밀리안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는 건지 어깨를 들썩거리기도 했다. 나도 인간인지라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불쌍한 것과 별개로 테레사가 고통받는 것은 사실이었다.
“머리가 꽃밭이니 이런 짓을 하겠지. 오라버니는 제발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는 버릇 좀 고쳐.”
“그냥, 그냥 테레사가 너무 보고 싶었을 뿐이야.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참을 수가 없었어.”
이게 오늘 결혼할 남자의 고백이란 말인가. 나는 머리가 아파졌다. 원작을 바꾸긴 했다. 하지만 바뀐 것은 사건이었지, 사람의 마음은 아니었다. 불행히도 테레사와 막시밀리안 모두 이별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내가 잘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둘의 삶이고, 둘의 감정인데 내가 중간에 끼어들어 아물지 못할 큰 상처를 남긴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둘은 각자의 길을 갈 때가 되었다.
“진짜 넌 마지막까지 쓰레기야. 아나이스 황녀에게도, 테레사에게도. 내 오라버니라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내 폭언에 그는 고개를 숙인 채로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게 후회할 거라고 했을 때 들었어야지! 이놈의 남주들은 꼭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후회한다. 멍청한 놈!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 주고 싶은 것을 참고 밖으로 나왔다. 하객의 입장이 끝나고, 아버지가 자리에 앉아 계셨다. 하필 바로 뒷자리에 메니실 가문이 앉아 있어서 불편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전 도저히 불편해서 그 자리에는 못 앉겠어요. 나는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게 몸을 돌려 뒤쪽으로 향했다.
“제이나! 이쪽이다. 이리로 오거라.”
“헉.”
어떻게 봤는지 아버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불렀다. 돌아 나가려던 나는 결국 아버지의 옆자리에 앉았다.
“설마 그 미친놈이 메니실 가문을 초대한 건 아니지?”
여기서 ‘미친놈’은 막시밀리안을 말하는 것이 맞았다.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아요.”
“오, 세상에. 내 아들이지만 그놈의 머리통을 열어 보고 싶구나.”
아버지는 질린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흰색과 푸른 장미로 아름답게 장식된 식장에 교황이 주례를 위해 서 있었다. 황제가 아나이스 황녀를 특별히 아낀다더니 사실이었나 보다. 일반적으로 교황의 주례는 황태자가 결혼할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곧 식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음악이 흐르자 뒤에서 막시밀리안이 걸어 나왔다. 훤칠한 키에 눈부신 은발을 뒤로 넘긴 그가 미끄러지듯 버진 로드를 걸었다. 꼭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비록 표정은 썩어 있었지만.
“누가 보면 네 오라비가 팔려 나가는 줄 알겠다.”
아버지는 이를 갈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모든 것이 그의 업보인 것을. 막시밀리안의 입장이 끝나자 웨딩드레스를 입은 아나이스가 황제의 손을 잡고 버진 로드 위에 섰다. 어쩐지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나와 아버지는 기계적으로 박수를 치며 제발 이 결혼식이 무사히 끝나기를 기도했다.
“두 사람은 앞으로…….”
결혼식 주례사는 어딜 가나 똑같구나. 길고 지루한 교황의 주례를 들으며 난 오라버니를 관찰했다. 그가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몰라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설마 메니실 가문과 테레사를 결혼식에 초대했을 줄이야. 식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자꾸 뒤를 힐끔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제 와서 테레사를 부른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끼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미련일까. 나는 불안함을 꾹꾹 누르며 막시밀리안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느새 식은 마지막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오라버니와 황녀는 서로를 마주 보고 사랑의 맹세를 시작했다.
“신랑, 신부를 반려자로 맞아 평생을 아끼고, 사랑하시겠습니까?”
“…….”
교황의 물음에 막시밀리안은 침묵했다. 그의 시선이 우리 가족, 정확히는 내 뒤쪽에 있을 테레사를 향했다. 애절함과 고통이 가득한 눈빛에 나와 아버지 둘 다 할 말을 잃었다. 정말 ‘있을 때 잘하지’라는 말을 메들리로 만들어 들려주고 싶었다.
“저는…….”
막시밀리안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등 뒤에서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톡톡,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갔다. 테레사가 식장을 빠져나가는 걸까. 그녀가 너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전 이 결혼 못 합니다.”
응? 테레사를 걱정하느라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만 집중하던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쟤가 뭐라고 말한 거지?
“죄송합니다, 황녀님. 그리고 여러분.”
꾸벅 인사를 마친 막시밀리안이 단상을 뛰어 내려갔다. 잘 올린 은발이 흐트러지고, 눈가에는 눈물까지 살짝 고인 채 슬로 모션으로 내 앞을 지나쳐 갔다. 그렇게 순식간에 식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나는 그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장면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식장에는 정적이 흘렀다.
“허…… 허억. 저…… 저!”
아버지가 뒤로 쓰러지는 것과 동시에 식장이 시끄러워졌다. 지금 남주가 식장에서 도망친 거니? 이런 미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