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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있을 때 잘하라니까 (9/145)

9화. 있을 때 잘하라니까2022.03.02.

며칠 뒤 외출을 한 뒤 돌아온 아버지는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16550841279818.jpg“막스!”

16550841279822.png“오라버니는 메니실 백작저에서 아직 안 돌아왔어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쪽 뺨이 부은 막시밀리안이 들어왔다.

16550841279818.jpg“너 맞은 게냐?”

16550841279832.png“…….”

16550841279818.jpg“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게야!”

16550841279832.png“별거 아닙니다. 그냥, 그냥…….”

무언가 말하려던 막시밀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를 보며 공작이 소리치듯 말했다.

16550841279818.jpg“이 한심한 놈아! 이제 그만해라. 그런다고 그 아이가 마음을 돌리겠느냐!”

16550841279832.png“테레사가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분명 제 이야기를 들으면……!”

막시밀리안의 표정은 마치 바람나서 정인을 버린 사람이 테레사인 것처럼 억울해 보였다.

16550841279818.jpg“오해는 무슨 얼어 죽을 오해!”

기다렸다는 듯이 아버지는 참았던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16550841279818.jpg“네놈이 맨날 테레사를 피해 다닌 걸 내가 모를 줄 아냐! 언젠가 둘이 이야기해서 잘 풀 줄 알았더니 결국 이 꼴이야. 내가 오늘 나가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 줄 알아?”

16550841279832.png“…….”

16550841279818.jpg“네놈이 이 여자 저 여자 간 보는 바람에 테레사가 차 버린 거라고 하더구나. 네놈이 어미를 닮아서 한 여자에 만족할 줄 모른다고!”

생각보다 높은 수위의 비난에 나도 막시밀리안도 놀랐다. 그간 우리 가문에서 어머니의 이름을 언급하는 건 금기시되어 왔다.

16550841279818.jpg“내가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겠느냐! 대체 평소에 행실이 어땠길래!”

16550841279832.png“아닙니다. 전 어머니랑은…….”

16550841279818.jpg“됐다! 더는 듣고 싶지 않아. 내일 당장 메니실 가문에 위자료도 필요 없으니 파혼하자고 할 거다.”

16550841279832.png“아버지!”

공작은 막시밀리안의 만류를 뿌리치고 쿵쿵거리며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덩그러니 남은 그는 나라 잃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를 보다가 몸을 돌렸다. 멍청이에게 걸맞은 결말이었다. 나는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며 다음 계획을 점검했다. 막시밀리안의 미래는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사실 공작가라는 대단한 배경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는가. 그것보다 테레사의 앞날을 걱정했다. 오랜 약혼과 꽤 많은 추문으로 결혼이 쉽지 않을 것이다.

16550841279822.png‘역시 남편감을 미리 골라 두길 잘했어.’

나는 어떻게 하면 두 사람을 만나게 해 줄 수 있을지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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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나타니엘은 오전부터 기분이 안 좋았다. 이른 아침부터 황제의 시종장이 찾아와 점심 약속을 통보한 탓이었다. 일가족이 참석해야 한다는 말이 그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나타니엘은 이를 갈며 집무실에 처박혀 서류를 뒤적거렸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그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부관인 마커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16550841279818.jpg“전하, 지금 가시지 않으면 늦으실 겁니다.”

나타니엘의 붉은 눈동자가 마커스를 노려보았다. 마커스는 움찔하며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꽉 움켜쥐었다.

16550841311827.png“얼마나 남았지?”

16550841279818.jpg“한 30분쯤 남았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마친 나타니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피할 수는 없었다. 그는 동관에서 나와 천천히 본관으로 향했다. 지나갈 때마다 자신을 힐끗거리는 시선들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16550841311827.png“쯧.”

마치 서커스단의 괴물이라도 보는 것 같은 시선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16550841311827.png‘진짜 드래곤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걸 알면 아예 박제를 할 기세로군.’

제국 사람들의 용에 대한 신앙은 어마어마했다. 아무리 장자라지만 한미한 가문의 어머니를 둔 그가 황태자 자리를 지킬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는 제국민들의 신앙심이었다. 그러나 나타니엘은 그것이 그리 썩 반갑지 않았다.

16550841311827.png‘귀찮은 짓만 늘릴 뿐이야.’

그에게 용의 피를 타고났다는 건 제약이 많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과 같았다. 신과 똑 닮은 인간이 태어났으니 그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크겠는가. 그는 저를 새끼 동물로밖에 취급하지 않던 사람을 떠올렸다.

16550841311827.png‘이상한 여자였지.’

게다가 자신에게 거래를 제안하는 대범함도 보여 주었다. 그것도 어처구니없는 목적이었다. 자신을 위한 것도, 가문을 위한 것도 아닌 오라버니의 약혼녀를 위해서였다. 당돌했던 제이나의 얼굴을 떠올린 나타니엘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16550841279818.jpg“어, 형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나타니엘은 고개를 돌렸다. 막냇동생인 헨리 황자가 달려와 그의 다리에 매달렸다.

16550841311827.png“오랜만에 보는구나, 헨리.”

16550841279818.jpg“그간 잘 지내셨죠?”

16550841311827.png“그럭저럭 지냈단다.”

나타니엘은 헨리의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아버지를 닮은 곱슬거리는 금발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16550841346272.png“황태자 전하.”

16550841311827.png“오랜만에 뵙습니다, 황후 폐하.”

그리고 그 뒤로 밀리아 황후와 아나이스 황녀가 등장했다. 나타니엘의 다리에 붙어 있던 헨리를 강제로 떼어 낸 황후는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16550841346272.png“얼마나 바쁘신지 얼굴을 뵙지 못한 지 꽤 되었네요.”

16550841311827.png“제 얼굴을 보셔 봐야 그리 기쁘지 않으실 텐데요.”

16550841346272.png“그건 직접 봐야 알지 않을까요?”

황후는 나타니엘이 싫었다. 나타니엘 때문에 자신의 아들이 황태자 자리에 앉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 외에도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었다. 황후는 제국민들이 신성하다 여기는 그의 검은 머리와 붉은 눈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16550841311827.png“싫어하지 않으십니까? 제 얼굴이요.”

16550841346272.png“그 무슨…….”

마치 제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저 태도도 싫었다.

16550841279818.jpg“형님, 오해입니다. 어머니께서는 형님은 외모 빼고는 볼 게 없다고 그러셨단 말입니다.”

16550841346272.png“헨리!”

아나이스가 재빨리 헨리의 입을 막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넷 사이에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16550841279818.jpg“응? 다들 밖에서 뭐 하고 있어.”

뒤늦게 발걸음을 옮긴 황제가 그들을 발견하기 전까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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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식사 자리에서도 어색함은 계속되었다. 오직 아무것도 모르는 황제만 싱글벙글했다.

16550841346272.png“그러고 보니, 윈터스 소공작이 파혼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황후는 자연스럽게 윈터스 공작가의 이야기를 화제에 올렸다. 공작가의 재력이나 지금의 위상을 생각해 보면 이쪽으로 끌어들일 좋은 기회였다.

16550841279818.jpg“막스가? 고 녀석, 얼굴만 밝히고 다니더니 그 참한 아가씨를 놓치는구나.”

황제는 어렸을 때부터 보아 온 막시밀리안의 성정을 떠올리며 파혼에 대해 총평을 내렸다. 황후는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는 아나이스를 노려보고는 입을 열었다.

16550841346272.png“그래서 말인데, 폐하. 아나이스의 짝으로 윈터스 소공작은 어떤가요?”

16550841279818.jpg“막스 그 녀석을?”

황제는 영 탐탁지 않은 눈치였다. 윈터스 가문의 힘을 업은 황후파의 뒷공작이 눈에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성가신 건 딱 질색이었다.

16550841279818.jpg“난 그 딸을 황태자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심 윈터스 공작가가 황태자의 든든한 뒷배가 되길 바라며 황제가 나타니엘을 보았다. 제 아들은 놀라울 정도로 무심한 얼굴로 칼질을 하고 있었다.

16550841279818.jpg“네 생각은 어떠냐, 나타니엘?”

16550841311827.png“전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16550841279818.jpg“허허.”

황제가 저렇게 반응하자 황후는 바짝 약이 올랐다. 자신이 먼저 혼담을 꺼냈는데 엉뚱한 놈이 결혼하게 생겼으니 몸이 달았다.

16550841346272.png“폐하, 그러지 마세요. 아나이스가 윈터스 소공작을 오랫동안 짝사랑해 왔답니다.”

16550841418457.jpg“네?”

갑자기 이름을 불린 아나이스가 불안하게 눈을 깜빡거리며 황후를 보았다.

16550841346272.png“그렇지?”

16550841418457.jpg“아, 네…… 네.”

아나이스는 우물쭈물하며 마치 대본을 읽는 것처럼 딱딱하게 말했다.

16550841418457.jpg“전부터 쭉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약혼녀분이 있어서 아무 말도 못 한 것이고요.”

아나이스까지 나서서 원하니 황제도 뭐라 하기 어려웠다. 황제는 그녀에게 부채 의식을 갖고 있었다. 나타니엘의 친모가 살아 있을 때, 현 황후는 황제의 정부였다. 둘은 황후의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싸웠다. 밀리아는 황제의 마음을 이용해 궁으로 들어가려 했고, 전 황후는 외척의 힘을 빌려 자리를 지키려 했다. 지루한 싸움은 전 황후가 몸이 쇠약해져 죽고 나서야 끝이 났고, 마침내 밀리아는 황후로 입궁할 수 있었다. 밀리아가 전 황후의 추적을 피해 숨어 지내던 때 태어난 아나이스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황후는 그 점을 아주 잘 이용해 황제를 움직였다.

16550841279818.jpg“그래, 그럼 한번 이야기나 꺼내 보거라. 그쪽에서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16550841346272.png“감사합니다, 폐하!”

윈터스 공작이 황후의 입발림에 홀랑 넘어갈 정도로 멍청한 위인도 아니니 황제는 일단 허락하기로 했다. 기뻐하는 황후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나타니엘을 보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서는 권태로움만 엿보였다.

16550841346272.png‘언젠가 네 코를 납작하게 눌러 주마.’

황후는 굳게 다짐하며 입 안으로 고기를 밀어 넣었다. * * * 생각했던 것보다 막시밀리안이 입은 타격은 꽤 커 보였다. 꼭 폐인처럼 저택 안을 굴러다녔는데, 원작을 읽은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16550841279832.png- 테레사가…… 그럴 리 없어.

  간혹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릴 때도 있었다. 한심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고 있을 시간도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16550841279818.jpg- 황실에서 혼담이 들어왔다.

  어느 우울한 아침 식사 시간, 아버지가 막시밀리안을 보며 말했다.  

16550841279818.jpg- 너와 아나이스 황녀 전하를 결혼시키고 싶다는구나.

16550841279832.png- 전, 저는 못 합니다. 아직 테레사에게 확답을 듣지 못했어요.

16550841279818.jpg- 이미 너희 둘은 남남이야.

  공작의 말에도 막시밀리안은 완강하게 테레사가 그럴 리가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지루한 공방이 다시 계속되었고, 나 역시 조금씩 지쳐 갔다.

16550841279822.png‘좋아서 날아다닐 줄 알았더니 대체 왜 이제 와서 질척거리는 거야.’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테레사에게서 비밀스럽게 편지가 날아왔다. 담담한 내용의 편지 끝에는 언제나 달려 있던 막시밀리안의 안부를 묻는 내용이 없었다. 그것을 확인한 나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로 둘이 끝났구나, 하는. 나는 당장에 테레사에게 답장을 보냈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누군가는 막시밀리안의 말도 안 되는 착각을 깨 줘야 했다. * * * 막시밀리안은 오랜만에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찻집의 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생을 통틀어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한 적은 없었다.  

16550841279822.png- 테레사 언니가 한번 보자고 하네.

  요즘 들어 원수처럼 굴던 제이나가 어쩐 일로 기특한 일을 했다.

16550841279832.png‘제대로 사과하면 괜찮을 거야.’

그날은 자신의 말이 너무 심했다고,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은 없을 거라 약속하면 될 일이었다. 땀에 젖은 손을 바지에 몇 번 닦고 나자 누군가가 문을 두들겼다.

16550841279818.jpg“기다리시던 손님이 오셨습니다.”

문이 열리자 로브를 둘러쓴 테레사가 보였다.

16550841279832.png“테레사!”

16550841471203.png“오랜만이야, 막스.”

막시밀리안은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반대편에 앉은 테레사가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보였다.

16550841279832.png“그간 잘 지냈어?”

16550841471203.png“그냥저냥 지냈어. 막스, 너는?”

16550841279832.png“나야 뭐…….”

인사를 마치고 나자 기묘한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 사이에 이 정도로 긴 침묵이 흐른 적은 없었기에 막시밀리안은 꽤 당황했다. 생각해 보니 테레사가 말이 없었다. 언제나 그녀가 일상을 말하고, 자신은 들어 주는 것이 다였다.

16550841471203.png“막스, 할 말이 없다면 이만 가도 될까? 나는 좀 불편해서.”

16550841279832.png“아, 아니야. 꼭 네게 할 말이 있어서.”

새삼 자신의 무심함을 자각한 막시밀리안은 테레사에게 미안한 마음이 더 커졌다. 다시 한번 그녀와 잘해 보고 싶었다. 제가 생각했던 미래에 테레사가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막시밀리안은 떨리는 숨을 고르며 준비해 둔 말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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