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멀지 않은 파국2022.02.26.
테레사는 막시밀리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랜 시간 동안 그의 옆을 지키며 그녀 역시 많은 일을 겪었다. 자신을 두고 다른 여자와 연회에 참석하는 일도, 제 약속을 깨고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것도 보았다. 어떨 때는 테레사와의 약속은 기억조차 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그를 사랑하고, 만일 처지가 바뀐다면 막시밀리안 역시 이해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널 어떻게 믿어? 만나자는 것도 편지도 거절하고 시간을 갖자고 하는 여자를?”
“내가 널 믿어 줬잖아. 내 약속 대신 다른 여자를 만나는 널, 다른 여자와 첫 춤을 추는 널 나는 매번 믿어 줬잖아.”
그렇게 하면 그가 자신에게 마음을 열 것이라 믿었다. 테레사는 아직도 그가 약혼자로서 처음 만났던 날에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 널 사랑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네가 날 믿는다면 나 역시 널 끝까지 믿을 거야.
그래서 온 힘을 다해 그를 믿었다.
“나라고 귀가 없는 줄 알아? 네가 뿌리고 다닌 염문들, 우리 사이에 대한 소문까지 전부 들었어. 하지만 막스, 그게 네 입에서 나온 게 아니어서 믿지 않았어.”
“그, 그건…….”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믿어 줬는데, 막스 너는 날 믿지 못하는구나.”
테레사의 눈동자에 담겨 있던 열기가 순식간에 식어 갔다. 그 모습을 두 눈으로 생생히 본 막시밀리안은 무언가 하지 않으면 그들의 사이가 끝이 날 거라는 걸 자각했다.
“테레사, 난!”
담을 넘어 뻗은 손이 테레사의 옷 끝을 스쳤다.
“미안해, 막스.”
“뭐?”
“영원히 네 곁에 남아서 널 지켜 주겠다는 약속, 못 지킬 것 같아.”
그런 약속을 했던가? 막시밀리안은 테레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약속을 왜 못 지킨다는 거지?
“네 잘못이 아니야. 내가…… 내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 미안해.”
“테, 테레사! 잠깐, 잠깐만 기다려!”
막시밀리안은 담을 넘어 그녀에게 뛰어가려다가 발이 꼬여 바닥에 떨어졌다. 평소 같으면 돌아와 괜찮냐고 물어봤을 테레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막시밀리안은 일어서지도 못한 채로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 * *
나타니엘은 어째서인지 내 옆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은인에게 험한 말을 할 수 없었다.
“저기 오는데?”
그의 말에 시선을 돌리자 테레사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르고, 표정은 굳어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둘의 파국이 생각보다 테레사를 위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느낌이었다.
“어, 테레사 언니…….”
“미안해, 제이나. 나 당분간 연락 못 할 것 같아.”
짧게 인사하고 떠나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타니엘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리를 떴다. 카시안에게 어서 테레사에게 가 보라 말하고 나는 막시밀리안을 찾았다.
“이 인간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멀지 않은 곳에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서 있는 막시밀리안을 발견했다.
“오라버니! 테레사 언니에게 뭐라고 말한 거예요?”
내 질문에 막시밀리안이 마법에서 풀린 것처럼 나를 보았다.
“테레사는?”
“먼저 돌아간다고 하고 가 버렸어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언니가 울어요?”
“테레사가 울었어?”
“방금까지 같이 있었잖아요!”
막시밀리안은 어딘지 퓨즈가 나간 것처럼 행동했다. 아무래도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일단, 공작저로 돌아가자.”
“…….”
출입구만을 보며 말이 없는 막시밀리안의 옷을 붙잡아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마부와 함께, 타고 온 마차에 그 큰 덩치를 억지로 욱여넣고 나자 땀이 흘렀다.
“출발합시다!”
마부에게 말하고 마차에 올랐다. 돌아오는 마차 속에서도 그는 말이 없었다.
‘왜 저래, 헤어지자는 이야기라도 들었나?’
원작에서는 막시밀리안이 먼저 파혼을 요구했다. 그녀를 사랑할 자신이 없다며, 뭐……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 가며 파혼을 강행했다. 그때 매달리는 테레사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리면 정말로 욕이 나왔다. 아무래도 테레사와 싸운 것 같았지만 나는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이제부터는 그들의 영역이었다. * * *
다음 날 오후. 아버지가 우리를 서재로 불렀다. 막시밀리안은 하룻밤 사이에 수척해져 있었다.
“메니실 가문에서 정식으로 파혼을 요청했다.”
“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가 입을 막았다. 그리고 곧바로 오라버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담담한 얼굴이었지만, 입매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설마 테레사가 파혼을 원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걸까?
“일단 결혼을 준비하지는 않았으니 적당한 위자료만 받고 끝낼 생각인데.”
“말도 안 돼요! 왜 메니실 백작가가 위자료를 저희한테 줘요?”
나쁜 짓은 막시밀리안이 다 하고, 상처는 테레사가 받았는데 돈도 메니실 가문이 내야 한다니. 이건 너무 불공평했다.
“제니, 파혼은 저쪽에서 원한 거잖니.”
“하지만 막스 오라버니가 테레사를 괴롭혀서 그런 거잖아요!”
“제니!”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오라버니가 테레사 언니에게 얼마나 냉담하게 굴었는지. 저희 가문 사람들이 사주를 받고 언니를 괴롭히기도 했고요.”
내 말에 아버지가 양심에 찔린 듯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만일 공작가의 하녀들이 테레사를 괴롭힌 걸 공론화하면 일이 아주 복잡해질 것이다.
“막스, 네 생각은 어떠냐?”
공작의 시선이 내내 말이 없는 막시밀리안에게로 향했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위자료를 받을 생각은 없습니다.”
“흐음.”
어쩐 일로 멀쩡한 말을 하지?
“파혼할 일도 없고요.”
“막스, 그게 무슨 말이냐. 파혼할 일이 없다니. 그쪽 가문에서 모든 피해를 감수하고 파혼하겠다고 한 건데……. 네가 바라던 게 아니니?”
공작은 막시밀리안의 말에 당황한 듯 보였다. 나 역시 그랬다. 얘가 차여서 맛이 살짝 간 거 아닐까?
“아니요. 제가 테레사를 설득하겠습니다. 그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말을 마친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와 아버지는 서재에 덩그러니 남아서 중얼거렸다.
“설마 네 오라비가 테레사에게 진심이었던 게냐?”
“글……쎄요. 저도 방금 알았는데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 * * 그날 이후로 막시밀리안은 매일같이 메니실 백작저를 찾아갔다. 거의 매번 문전 박대를 당했지만. 오늘은 물세례를 당했는지 온몸이 푹 젖어 있었다. 아버지는 못마땅한 얼굴로 막시밀리안을 보았다.
“쯧. 좋아하는 여자였으면 더 잘해 줬어야지. 저 등신 같은 놈.”
사실 아버지의 반응에 꽤 놀랐다. 원작에서 그는 테레사와의 약혼을 탐탁지 않아 했었다. 결혼을 약속했을 때보다 가문의 위상이 달라졌으니 꽤 아쉬운 약혼이긴 했을 것이다.
“아버지, 테레사 언니가 마음에 안 드셨던 거 아니에요?”
“뭐? 날 뭘로 보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냐.”
‘가문의 이득만을 계산하는 냉철한 귀족?’
나는 속으로만 조용히 생각했다. 원작과 다른 등장인물들의 반응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생각해 보면 테레사도 원작과 다른 모습을 보였으니, 다른 인물들에게도 분명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한 건 아닐까?’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내 생각을 모르는 아버지는 물에 젖은 생쥐 꼴로 한숨을 푹푹 쉬는 막시밀리안을 보며 말했다.
“네 어머니와는 사이가 영 안 좋지 않았느냐. 그래서 내 자식들은 기왕이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를 바란 거지. 네 오라비가 하는 짓을 봐라. 난 당연히 테레사를 싫어하는 줄 알았지.”
“그야…… 그렇죠.”
생각보다 진지한 아버지의 대답에 가슴이 뭉클했다. 그래도 아버지가 냉혈한은 아니었구나.
“그런데 이대로 테레사 언니가 마음을 안 돌리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글쎄. 뭐, 적당한 혼처 찾아서 보내 버려야지. 저놈은 좋은 걸 갖고 있어도 모르는 멍청이가 아니냐.”
지당하신 말씀이었다. 당장이라도 테레사에게 연락하고 싶었지만 당분간은 자제하기로 했다. 막시밀리안이 당하는 꼴을 보니 내 편지가 무사히 도착할지 모르겠다. 메니실 가문 사람들이 윈터스 석 자만 보고 편지를 버려 버릴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오랜 약혼이 깨지면 양쪽 다 손해를 보겠지만, 역시 여자인 테레사가 더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원작에서 테레사는 의부증 환자로 몰렸었다. 가는 곳마다 욕을 먹고, 멸시를 당했다. 원래도 소심했던 테레사는 조금씩 더 움츠러들었고, 잠 못 드는 밤이 많아졌다.
‘만병의 원인은 스트레스지.’
나는 단숨에 카시안에게 편지를 썼다. 평소 테레사와 접점이 없는 사람들을 모아 티 파티를 열 것을 제안했다. 특히 바람난 남편을 둔 귀부인들이나 정부가 있는 약혼자 때문에 마음고생 했던 아가씨들을 초대해 달라 했다. 소문이란 건 원래 피해자에게 몰입할수록 더 멀리, 더 크게 나는 법이었다. * * * 벨리시아 저택에 도착한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마도 안에서는 티 파티가 한창일 것이다.
‘주인공은 늦게 나타나는 법이지.’
나는 방긋 웃으며 집사에게 내 방문을 알리라 말했다.
“아가씨, 제이나 공녀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어머, 들. 어. 오. 라. 하. 세. 요.”
카시안의 연기는 생각보다 어색했다. 저 언니, 저런 거 정말 못하는구나. 두 번 다시 시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안에 있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어서 오세요, 윈터스 공녀님.”
다들 무던한 성격이라 그런지 날 그렇게까지 경계하지 않았다. 우리는 차와 쿠키를 먹고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그러고 보니 제이나 양은 아직 약혼자가 없네요. 혹시 마음에 두신 분이라도?”
마음이 편해졌는지 카시안의 연기가 자연스러워졌다. 나는 살짝 눈을 내리깔며 길게 한숨을 쉬곤 말했다.
“아시다시피 저희 집안이 요즘 결혼 문제 때문에 시끄럽잖아요.”
“아…… 맞아요.”
“그렇죠. 소공작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좀 피곤하겠어요.”
모두 걱정 어린 말을 해 주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탄 섞인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요. 제가 매번 오라버니한테 테레사 언니한테 잘하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자신들이 알고 있던 이야기와 조금 다른 이야기가 나오자 다들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 착한 테레사 언니가 도저히 오라버니의 성질을 못 견딘 거죠.”
“어머.”
“하긴, 소공작님이 다른 아가씨들에게 과하게 친절하긴 하셨죠.”
예전부터 막시밀리안의 행동에 불만이 많았던 귀부인이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맞아요. 오라버니를 두고 다들 최고의 신랑감이니 뭐니 하는데, 사실 전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테레사 언니였으면 너무 화가 날 것 같아요. 그거 생각하면 결혼이 좀 무섭기도 하고…….”
“그렇죠, 소공작님이 약혼녀에게 너무 무심했어요.”
내 반응에 슬슬 한마디씩 얹기 시작했다. 타이밍을 잡은 나는 막타를 쳤다.
“저번에는 테레사 언니랑 같이 있는데, 다른 아가씨를 에스코트하는 것도 봤거든요. 정말 제 얼굴이 다 화끈거려서.”
다들 경악하며 입만 벙긋거렸다. 그리고 동시에 과거에 자신들이 겪었던 비슷한 경험들을 말했다. 그녀들의 분노가 폭발한 건 순식간이었다.
“정말 너무하시네요!”
“메니실 영애가 그걸 참아 주셨단 말이에요?”
“세상에,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다행히 한마음 한뜻으로 막시밀리안을 욕해 주었다. 아마 집으로 돌아가면, 그녀들의 남편과 약혼자에게도 이 이야기를 하며 잔소리를 해 댈지도 몰랐다. 나는 이 파혼의 오욕을 오롯이 막시밀리안이 뒤집어쓰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