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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우리 언니 잘 부탁해요 (7/145)

7화. 우리 언니 잘 부탁해요2022.02.23.

16550840727452.png“전하.”

어쩔 수 없이 내가 알은척을 하자 그는 씨익 웃으며 한 발짝 다가왔다.

16550840727459.png“오랜만이군, 윈터스 영애.”

16550840727452.png“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

우리의 인사에 테레사가 작게 웃었다. 나는 뚱한 얼굴로 카시안의 옆구리를 툭 쳤다. 적어도 나보다는 안면이 있을 테니 그를 어디론가 보내 보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카시안은 내 신호를 무시했다. 그런 우리를 보며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말썽쟁이 동생이 된 거 같은 기분이었다. 나타니엘은 지나가는 시종에게서 샴페인 잔을 받아 우리에게 나눠 주었다.

16550840727459.png“메니실 영애, 오늘은 즐거웠네. 오랜만에 춤을 췄더니 아주 힘들었지만 말이야.”

16550840727519.png“오랜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멋진 춤이었습니다, 전하.”

테레사는 힘껏 그의 춤 실력을 칭찬했다. 그러면서 날 힐끔거리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저기요, 저는 그분에게 관심 없습니다. 너무 대놓고 주는 신호였지만,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카시안 역시 뭐가 재밌는지 히죽거리면서 사태를 관망했다. 웃고 떠들던 나는 이상하게 우리 주변을 맴도는 남자들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테레사가 있다는 것도.

16550840727452.png‘춤 좀 신청해 보고 싶은데, 황태자가 있어서 못 하는 거구나.’

나타니엘을 데리고 잠깐 자리를 피해 볼까 했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어떤 위험도 감수해야만 했다. 고작 황태자에게 미움을 살지 모르는 상황 때문에 춤 신청도 하지 못하는 남자에게 테레사를 넘겨줄 생각은 없었다. 그때였다. 훤칠한 키의 남자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재빨리 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준수한 얼굴, 떡 벌어진 어깨에 입고 있는 옷도 모두 고급이었다.

16550840727526.jpg“메니실 영애.”

게다가 목소리도 좋았다. 힐끔 카시안을 보자 그녀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합격이었다. 황태자와 잘되면 부와 명예, 사랑까지 한 번에 잡을 터이니 최고의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남자를 만나 보고, 그들 중 테레사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았다. 일단 그녀가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16550840727526.jpg“저는 드미트리 백작입니다. 늘 영지에만 있다가 이런 파티는 처음이지요.”

16550840727519.png“반갑습니다, 백작님.”

그는 긴장한 듯 목소리를 가다듬고 허리를 숙였다.

16550840727526.jpg“비록 제 춤 실력이 황태자 전하께 미치지 못하겠지만, 저와 함께 춰 주시겠습니까?”

완벽했다. 나타니엘을 치켜올려 주면서 정중하게 춤을 신청하는 드미트리 백작에게 하마터면 박수를 쳐 줄 뻔했다. 테레사는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는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16550840727519.png“영광입니다, 백작님.”

나타니엘과의 춤이야, 황태자라는 신분 때문에 쉽게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면, 이번엔 오로지 테레사의 의지였다. 플로어로 나아가는 모습에 내 심장이 다 뛰었다. 카시안 역시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항상 자신만의 틀에 갇혀 몸을 웅크리고, 막시밀리안의 눈치만 보느라 제 의견 하나 말하지 못했던 테레사였다. 그런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춤을 허락한 게 얼마나 큰일인지.

16550840727459.png“아주 울겠군, 공녀.”

나의 감동을 와장창 깬 건 나타니엘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옆에 있는 기둥에 기대 플로어를 바라봤다.

16550840727452.png“오늘의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게요.”

16550840727459.png“약속이나 지켜야 할 거야. 그 소문이 내 귀에 들어오는 순간 영애의 목이 날아갈 테니까.”

희번덕거리며 빛나는 그의 광기 어린 눈에 난 시선을 돌렸다. 언제 도망쳤는지 카시안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말없이 둘의 춤을 보았다. 나는 다시 밀려오는 감격에 흠뻑 젖어 있었고, 나타니엘은 시니컬한 추임새를 넣어 주었다.

16550840727459.png“그렇게 남 생각 하다가 뒤통수 맞는다.”

16550840727452.png“제 뒤통수는 제가 지킬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솔직히 조심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닌 황태자였다. 원작에서 그는 믿었던 부관에게 크게 배신당하고 테레사의 죽음을 막을 수 없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감히 내 앞에서 뒤통수를 논해?

16550840727459.png“제이나 윈터스.”

싸늘한 그의 반응에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놈의 입. 자꾸 막시밀리안에게 하던 대로 말이 나간다. 원래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원작의 고구마 때문에 성격을 다 버린 것 같았다.

16550840727452.png“말이 헛나왔습니다, 전하.”

16550840727459.png“그대의 목숨이 하나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될 거야.”

16550840727452.png“예, 예.”

건성으로 대답하는 날 보며 나타니엘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내 어깨를 툭툭 치고는 말했다.

16550840727459.png“우리도 춤이나 추지.”

16550840727452.png“예? 저희가요? 왜요?”

그의 말에 하마터면 놀라서 기절할 뻔했다. 나타니엘의 표정이 사나워지자 난 조신히 손을 모아 고개를 조아렸다.

16550840727452.png“감사합니다, 전하. 가문의 영광입니다.”

16550840727459.png“비아냥대지 말고, 빨리 잡기나 해.”

아아, 이렇게까지 얽히고 싶지는 않은데.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그의 손에 내 손을 올렸다. 나타니엘은 가볍게 날 끌고 플로어 중앙으로 향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향했다.

16550840727452.png“꼭 저랑 추실 필요는 없잖아요.”

16550840727459.png“그러지 않으면 메니실 영애만 곤란해질걸.”

16550840727452.png“왜요?”

내 질문에 나타니엘은 무심한 얼굴로 날 한 바퀴 빙그르르 돌리며 말했다.

16550840727459.png“당장 내일 아침에 메니실 백작을 폐하께서 부르실 테니까.”

16550840727452.png“오우.”

그래, 생각해 보니 원작에서 나타니엘은 놀라울 정도로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의 아버지인 황제는, 혹시 아들의 성적 취향이 남다른지 걱정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나타니엘이 갑자기 여자와 춤을 추었다니. 당장 둘을 약혼시키려고 난리일 것이다.

16550840727452.png‘어, 하지만 이러면 완벽한 전개인데.’

내가 꿈꿔 온 엔딩이기도 했다.

16550840727459.png“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나 보군.”

16550840727452.png“네? 아니요?”

16550840727459.png“공녀는 표정을 숨길 줄 몰라. 앞으로 거짓말하면서 살지 말도록. 다 티 나니까.”

날 비웃는 그의 태도에 발끈했다.

16550840727452.png“예, 예. 그럼 전하의 비밀도 숨기기 어렵겠네요.”

16550840727459.png“그렇군.”

서늘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 뒷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입을 닫았다. 오래 살려면 침묵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16550840727459.png“그래, 침묵은 중요하지.”

드디어 만족했는지 나타니엘이 날 보며 웃었다.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줄 알았던 춤이 드디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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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마침 막시밀리안도 돌아와 있었다. 그의 표정은 놀라울 정도로 차가워져 있었다. 막시밀리안과 마주친 테레사의 눈이 흔들렸다. 테레사의 주변에 있던 남자들의 시선에도 꿋꿋이 버티던 막스는 잠시 뒤 몸을 돌려 다시 밖으로 나갔다. 화가 난 게 틀림없었다. 테레사는 날 보았다.

16550840727452.png“가서 제대로 이야기하고 와요, 언니.”

16550840727519.png“응. 그래야겠어요.”

16550840727452.png“언니의 마음을 솔직하게 전달하면 분명 괜찮을 거예요.”

여기서부터는 정말 그들의 문제였다. 외부자인 내가 끼어들 수 있는 최대한까지 끼어든 셈이다.

16550840727452.png“언니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난 항상 응원할게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인 테레사는 막시밀리안을 쫓아 밖으로 나갔다.

16550840727459.png“저러다가 붙잡히면 어쩌려고?”

내 머리꼭지 위에서 황태자가 물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16550840727452.png“그럼 죽을 때까지 패서라도 저거 사람 만들어야죠.”

16550840727459.png“대단한 애정이군.”

나타니엘이 소리를 내며 웃었다. * * * 막시밀리안을 쫓은 테레사는 정원 깊은 곳에 멈춰 있는 그를 발견했다.

16550840727519.png“막스?”

1655084084723.png“오지 마.”

평소와 달리 잔뜩 흥분한 그의 목소리에 테레사는 멈칫했다. 하지만 다시 그에게 다가갔다.

16550840727519.png“막스, 가까이 갈게.”

1655084084723.png“오지 말라니까!”

달빛 아래에 드러난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테레사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다른 남자와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질투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16550840727519.png“우리 이야기 좀 해야 하지 않을까?”

1655084084723.png“무슨 이야기? 내가 매번 찾아갈 때는 모르는 척했잖아.”

막시밀리안의 차가운 대꾸에도 테레사는 그에게 다가갔다. 어째서인지 이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예감. 테레사는 낮은 담 너머에 있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16550840727519.png“막스.”

돌아보는 막시밀리안의 무심했던 눈에 다른 감정이 떠올랐다. 경멸, 분노, 질투 같은 온갖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테레사는 움찔하며 잡고 있던 막시밀리안의 손을 놓았다.

1655084084723.png“너도 똑같아.”

16550840727519.png“막스?”

1655084084723.png“너도 어머니랑 똑같은 여자였어.”

또렷이 드러난 분노에 테레사는 당황했다. 막시밀리안은 맹수처럼 테레사를 물고 뜯었다.

1655084084723.png“결국 너도 네 외모를 무기 삼아 날 휘두르려 하겠지.”

16550840727519.png“막스, 아니야. 그런 거.”

1655084084723.png“아니긴 뭐가 아니야.”

테레사는 현재 공작과 별거 중인 윈터스 공작 부인의 과거를 떠올렸다. 제국을 휘청이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공작 부인은 자신의 미모를 잘 알고 있었다. 황제조차 원했던 그녀는 가족의 강요로 인해 윈터스 공작과 강제로 결혼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공작 부인과 달리 당시의 윈터스 공작령은 가난하고 거친 곳이었다. 춥고 황폐한 북부에서의 시간은 공작 부인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몇 년 뒤, 마석 사업의 성공으로 부와 명예를 거머쥔 공작가가 중앙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완전히 변해 있었다. 윈터스 공작 부인은 외모를 이용해 끊임없이 추문을 일으켰다. 아름다운 외모에 이끌리는 남자들이 많았고, 그녀 자신도 그것을 즐겼다. 결국 윈터스 공작과의 마찰로 별거 생활에 들어간 것도 그때쯤이었다.

1655084084723.png“내가 처음부터 말했잖아. 너와의 약혼을 허락한 이유는 네가 다른 여자들처럼 외모를 이용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16550840727519.png“내가 언제 내 외모를 이용했다는 거야. 난 그냥 이곳에 참석했을 뿐이야!”

1655084084723.png“그럼 왜 나한테 함께 가자고 말하지 않았는데!”

테레사는 막시밀리안의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막시밀리안은 그녀가 핑곗거리를 찾는다고 생각했다. 한껏 비아냥거려 줄 생각으로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

16550840727519.png“그런 걸, 어느 여자가 파트너에게 묻는데?”

1655084084723.png“뭐?”

눈물 섞인 목소리. 막시밀리안은 테레사의 눈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흑진주 같은 눈동자가 물기로 반짝거렸다.

16550840727519.png“원래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청하는 거잖아.”

막시밀리안은 그제야 제이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테레사에게 물어봤냐는 말.

1655084084723.png“하지만 넌 매번 거절했었잖아.”

16550840727519.png“전부 네가 싫어해서 거절했던 거였어. 내가 이런 자리에 나가는 거 싫다고, 다른 남자랑 손잡고 춤추는 거 마음에 안 든다고 그랬잖아.”

1655084084723.png“그런데 오늘은 대체 왜!”

소리를 질러 놓고 막시밀리안은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16550840727519.png“우리가 함께한 지 벌써 20년이 넘었어. 이제 그 정도면 날 믿어 줄 줄 알았어.”

그를 보는 테레사의 눈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처음 보는 그 감정에 막시밀리안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수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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