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뒤틀리기 시작한 원작2022.02.19.
테레사는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나와 카시안은 그 짧은 시간 안에 테레사에게 완벽하게 어울리는 드레스와 장신구를 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덕분에 그녀는 이 파티의 주인공이 되었다. 언제나 늘어뜨려 놓았던 적갈색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 올리고, 진주와 다이아몬드로 장식했다. 고급스러운 비단으로 만들어진 검은색 드레스는 보라색 튤로 장식해서 화려하면서 우아했다.
“세, 세상에. 저거, 그 덜떨어진 메니실 영애가 맞아요?”
막시밀리안의 옆에 붙어서 아양을 떨던 어린 영애가 넋이 나간 채로 말했다. 내가 당사자가 아니었지만,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멸시하고 모욕하던 사람이 180도 바뀌어서 나타난 모습에 다들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 누구의 반응보다도 막시밀리안의 반응이 궁금했다. 테레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할까? 아니면 다른 남자들의 시선에 전전긍긍할까.
“오라버니?”
그러나 내 기대와 달랐다. 막시밀리안의 눈이 미리 도착해 있던 카시안과 그녀의 약혼자에게 향하는 테레사에게 달라붙었다. 심지어 약간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아니, 대체 누가 누구한테 화를 내는 걸까.
“왜 테레사가 이 자리에 있는 거지?”
“그야 초대받으셨으니까?”
“초대를 받는다고 덜컥 이런 데를 와? 그것도 나한테는 그런 편지를 보내고서…….”
“어차피 파혼하면 남남인데 이제라도 새 남자를 찾을 생각인가 보죠.”
내 거침없는 대답에 그의 그림같이 고운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난 테레사와 파혼할 생각 없어.”
“흐음. 그래요? 난 여태껏 오라버니가 파혼하고 싶어서 그따위로 행동하는 줄 알았죠.”
내 막말에 막시밀리안은 입술만 달싹였다. 화를 참으려는 기색이 역력한 그를 데리고 일부러 테레사 쪽으로 향했다.
“언니! 오늘 너무 예뻐요.”
“제이나.”
밝게 웃으며 날 마주한 테레사의 얼굴이 막시밀리안을 보고 살짝 굳었다. 막시밀리안은 여전히 뚱한 얼굴로 그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군, 테레사. 그리고 이오른 경.”
“하…… 하하. 오랜만입니다, 소공작님. 그리고 공녀님.”
카시안의 남동생, 이오른은 며칠 전 보았던 막시밀리안의 추태를 떠올린 것인지 슬쩍 테레사의 옆에서 멀어졌다. 막시밀리안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꼴에 소유욕하고는.’
나는 테레사의 손을 잡아끌었다.
“오늘 모처럼 예쁘게 꾸몄으니까 지금까지 못 춰 본 춤을 마음껏 춰 보는 거예요.”
“하…… 하지만 난 약혼자가 있는데…….”
“언니, 막스 오라버니를 못 믿으세요? 오라버니는 그런 일로 화낼 사람이 아니잖아요.”
내 단호한 말에 무언가를 떠올린 듯 테레사의 얼굴이 굳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오늘 첫 춤은 파트너분이랑 추고, 그다음으로는 신청 오는 대로 다 받는 거예요.”
“누가 나한테 춤을 신청하겠어.”
테레사는 불안한 미소를 지으며 막시밀리안을 힐끔 보았다. 마치 그가 먼저 춤을 신청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응, 아니야. 걔는 그러기엔 자존심이 너무 세.
“무슨 소리예요! 이렇게 예쁜데.”
나는 단호하게 말하며 테레사에게 몇 번이고 자유롭게 춤을 추라고 권했다. 조용히 담소만 나누고 있는 와중에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하긴, 파혼 소문이 도는 커플이 각각 파트너를 데리고 왔으니 얼마나 웃겨 보일까. 하지만 이 화제도 얼마 가지 못했다.
“나타니엘 황태자 전하와 아나이스 황녀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의 이름이 호명되자 아까보다 더 소란스러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황녀와 황태자 사이가 정말로 안 좋았기 때문이다. 아나이스 황녀의 어머니, 현 황후는 아직 열 살도 안 된 헨리 황자를 황태자 자리에 앉히고 싶어 했다. 그러니 황태자와 아나이스 황녀의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황녀의 생일 연회에 참석해 달라 했으니.
‘그 자리에서 날 안 죽인 게 다행이야.’
나는 내 목숨이 정말 열 개쯤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사실에 부르르 떨었다. 관현악단의 연주가 멈추자 일순 침묵이 찾아왔다. 그 정적 속에 아나이스 황녀가 단상에 섰다. 오늘의 주인공답게 화려하게 치장한 아나이스는 양 볼을 붉힌 채로 말했다.
“오늘 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나타니엘 오라버니께서 함께해 주셔서 더욱 뜻깊은 하루가 될 것 같네요.”
사정이 어찌 되었든, 나타니엘이라는 장식품을 달고 나온 게 기쁜지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순수하고 밝아 보였다. 원작에서 황녀가 막시밀리안에게 눈치 없이 들이댔다는 걸 알고 있기에 썩 좋게 보이지 않았다.
“모쪼록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짧은 인사가 끝나자 왈츠가 흘러나왔다. 나타니엘과 아나이스의 춤이 끝나자 이오른은 테레사를 데리고 자연스럽게 우리와 멀어졌다. 오라버니는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너, 테레사가 여기 오는 거 알고 있었어?”
“응.”
“그런데 왜 나한테 이야기 안 했어?”
아니 그걸 왜 내가 너한테 말해야 해요? 어이가 없어 내가 코웃음을 치자 막시밀리안이 발끈했다.
“그런 정보는 여동생인 네가, 악!”
“미안. 실수였어.”
나는 일부러 높은 구두 굽으로 그의 발등을 콱 밟아 주었다. 멍멍이 소리는 더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야, 너 진짜 이럴 거야?”
“오라버니야말로 자기 약혼녀는 자기가 챙겨야죠. 그런 걸 왜 저한테 떠넘기세요.”
내 발길질을 막시밀리안이 잽싸게 피했다. 나는 재빨리 방향을 바꿔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윽.”
“어머, 죄송.”
신사라면 레이디가 발을 밟거나 스텝이 꼬여도 티를 내서는 안 되었다. 막시밀리안은 입술을 깨물며 소리를 참으려 애를 썼다. 어느새 우리의 춤은 전투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어떻게서든 한 대 더 치려는 나와 피하려 애를 쓰는 오라버니 사이의. 곡이 끝났을 때, 우리 둘은 마치 백 미터 달리기를 한 거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막시밀리안은 날 노려보고 테레사에게로 몸을 돌렸다.
“어디가?”
“당연히 약혼녀와 춤을…….”
자신만만하던 막시밀리안은 말을 잃었다. 단상 위에서 관망하고 있던 나타니엘이 플로어로 내려온 것이다.
“세상에, 전하께서…….”
“누구에게 갈까요?”
귀족들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여태껏 황태자는 연회를 주최한 가문의 사람이 아닌 다른 여자와 춤을 춘 적이 없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비해 병적일 정도로 여자관계가 청결했다.
‘막시밀리안과 달리 말이지.’
내 픽에 뿌듯해하며 앞으로 벌어질 일을 기대했다. 나타니엘은 긴 다리를 움직여 플로어를 가로질렀다. 그가 향한 곳은 카시안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테레사의 앞이었다.
“다음 상대가 없다면 나와 한번 춰 주었으면 하는데.”
“네…… 네?”
나타니엘의 정중한 춤 신청에 테레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꼭 쥔 주먹 안, 손바닥에 땀에 젖었다.
“손이 부끄러운데, 대답해 주겠나?”
나타니엘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나마저 두근거릴 정도로 멋진 모습이었다. 마치 공주님께 춤을 청하는 동화 속 왕자님처럼 보였다. 지금 이곳에 있는 모든 여자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느새 연회장은 숨소리도 들릴 정도로 고요해졌다.
“네.”
테레사는 나타니엘의 손 위에 제 것을 올렸다. 음악이 시작되자, 그들은 손을 잡고 매끄럽게 플로어로 향했다.
“이, 이게 무슨…….”
막시밀리안은 입을 떡 벌린 채로 눈앞에 벌어지는 장면을 보았다. 나타니엘과 춤을 추는 테레사를 보며 마치 배신당한 것처럼 부르르 떨었다.
“왜 그러세요, 오라버니. 혹시 질투하세요?”
내 말에 반박하려던 막시밀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불과 1년 전, 연회에서 비즈니스를 위해 다른 여자와 첫 춤을 추었던 그였다. 그때 불안한 눈으로 그를 보던 테레사에게 날린 한마디.
- 설마 쪼잔하게 그런 걸 질투하는 거야? 이건 그냥 비즈니스라고.
그 말에 테레사가 입을 다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전 오라버니가 쪼잔하게 이런 거로 화내는 소인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막시밀리안은 입술을 깨물며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화가 난 듯 발소리를 크게 내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물론 그 소리가 테레사에게 들렸을 리가 없었다. 아름다운 커플이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었다. 사실 나타니엘이 이 정도까지 해줄 줄은 몰랐다. 그냥 옆에 서 주거나, 말을 거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황태자 전하, 당신의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겠습니다. 나는 굳게 다짐하며 흐뭇하게 둘을 보았다. 둘의 춤을 흐뭇하게 구경하는 내게 카시안이 다가왔다.
“왜 하필 황태자 전하야?”
“네?”
“남자도 많은 데 왜 하필 황태자 전하냐고.”
“그야 테레사 언니의 눈높이를 맞추려면 황태자 전하밖에 없으니까요?”
내 말에 카시안은 입을 꾹 닫았다.
“또, 막스 오라버니가 열등감을 느낄 정도로 높은 지위에 잘생긴 얼굴을 가진 미혼 남성은 황태자 전하뿐이죠.”
“그래도, 저 남자는 너무 위험해.”
위험? 위험은 우리 같은 엑스트라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었다. 저 사랑에 푹 빠진 듯 달게 웃는 나타니엘을 보라. 역시 붙여만 놓으면 알아서 불꽃이 튈 줄 알았다.
“봐요. 황태자 전하도 푹 빠지신 것 같잖아요.”
카시안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나를 보았다. 뭔가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나는 손가락을 들어 춤을 추고 있는 둘과 질투 어린 표정의 막시밀리안을 번갈아 가리켰다.
“솔직히 저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요?”
“그래. 인정하지.”
막시밀리안의 표정에서 아까 이오른을 향했던 적개심의 몇 배는 될 듯한 감정이 보였다. 곧 음악이 끝났다. 그림 같던 둘의 춤이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동화 속 신데렐라가 된 것 같은 테레사에게 호감을 갖게 된 사람이 많아 보였다.
‘어째 오라버니 꼴이 좀 우습게 되었네.’
테레사의 변화가 기쁘면서도, 원작 남주인 막시밀리안의 처지가 조금 마음에 걸렸다. 물론 그가 테레사에게 한 일들을 떠올리면 그 걸쩍지근함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춤을 마친 테레사가 내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상기된 채였다.
“제이나, 막스는?”
오자마자 막스를 찾다니. 역시 한 번에 마음을 바꾸는 건 힘든 일이겠지. 그래도 그녀가 다른 남자와 무리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사람들과 섞이기 시작한 건 좋은 신호였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온다고 했어요. 기다리다 보면 오겠죠.”
그것보다 테레사가 달고 온 남자가 거슬렸다. 나타니엘은 단상 위의 자리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지 우리 주변을 어슬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