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뭐지, 이 작고 귀여운 생명체는?2022.02.16.
“동물인가?”
그냥 지나갈까 하는데 들리는 소리가 너무 처량했다.
“어디 다친 건가.”
결국 발걸음을 돌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수풀을 걷어 올리자 작은 동물이 몸을 둥글게 말고 있었다.
“도마뱀?”
작은 강아지 정도 되는 크기의 도마뱀은 등에 앙증맞은 날개를 달고 있었다. 날개 달린 도마뱀이 있던가.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곧 동물의 정체를 떠올렸다.
“설마 전설 속의 드래곤, 그런 건가?”
“삐이―”
작은 용은 고개를 겨우 들어 내 얼굴을 보더니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신기한 장면에 나는 무릎을 꿇고 아기 용이 기어가는 걸 구경했다. 원작에서 종종 용이 등장하긴 했으니 놀라긴 했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외모가 깜찍해 보였다.
“엇!”
아기 용은 얼마 가지 못해 다시 폭 넘어졌다. 나는 용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자세히 보니 몸에 껍질이 붙어 있었다. 등이나 배 부분은 다 떨어져 있었지만, 다리와 꼬리, 특히 얼굴 부분에는 아직 껍질이 남아 있었다.
“탈피 중이었니?”
전생에 너튜브에서 파충류를 돌보는 영상을 본 기억을 떠올렸다. 이대로 두면 관절이 꺾이거나, 잘못하면 염증이 생겨 절단해야 할 수도 있었다.
“일단 용도 파충류니까.”
바둥거리는 새끼 용을 단숨에 들어 올려 호수 근처로 갔다.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물에 몸을 적시고, 껍질이 불어나기를 기다렸다.
“삐, 삐이.”
“잠깐만 참아 봐.”
용은 마음에 안 드는지 꼬리를 마구 휘두르며 물을 튀겼다. 나는 단단히 한 손으로 새끼 용의 몸을 붙잡고 물에 불어서 말랑해진 껍질을 조심스럽게 벗겨 냈다. 새끼 용은 내가 도와주려는 걸 알았는지 곧 얌전해졌다.
“어이구, 잘한다. 그래, 그래. 아프지 않게 조심히 해 줄게.”
드디어 껍질을 다 벗겨 내자, 새끼 용이 재빠르게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 호수 한가운데로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바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신수라길래 뭔가 기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했지.
“그나저나 황태자 전하는 어디 계신 거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를 정리했다. 아까 아기 용을 도와주다 물이 튀어 엉망이었다. 이 상태로 나타니엘을 만나면 이상하게 여길 게 뻔했다.
“그만 돌아가야겠다. 분명 오늘 이곳에 오는 거로 알고 있는데.”
투덜거리며 몸을 돌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몸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응?”
나는 손으로 공중을 더듬거렸다. 마치 투명한 벽에 막힌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때 뒤에서 무언가 으스스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래, 마치 내 목숨은 한 개인데 건방지게 스무 개 정도 가진 것처럼 날뛰다가 걸린 그런 느낌인데…….
“대체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
음침한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찾았던 사람의 목소리였지만 반갑지 않았다. 나는 못 들은 척 앞으로 나아가려 애를 썼다.
“못 들은 척을 해?”
아까보다 한 톤 더 낮아진 목소리. 나는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하…… 하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황태자 전하.”
맑고 푸른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나타니엘은 상의를 벗고 있었다. 전생에 잡지에서나 보던 완벽한 비율의 남자 상반신을 3D로 보자 괜히 심장이 떨렸다.
“목숨이 한 백 개쯤은 되나 보군, 공녀.”
나타니엘은 물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요사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는 물 위를 걸어 내 앞에 섰다.
“저번부터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거 같더니, 어디의 누가 보낸 거지?”
가만히 있어도 위압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긴장감에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날카롭게 빛나는 붉은 눈이 아까 본 귀여운 생명체랑 아주 똑 닮았다.
‘귀엽다고 함부로 줍는 게 아니었는데.’
그제야 방금 사라진 귀여운 아기 용과 저 오만하고 까칠한 남자 사이의 연관성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했다가는 당장이라도 날 죽일 기세다. 일단 오리발을 내밀기로 했다.
“오, 오해세요.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요.”
내 말에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내게 다가왔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지만 투명한 벽에 막혀서 더는 뒤로 물러서지 못했다.
“그럼 말해, 여기까지 와서 날 찾아다닌 이유가 뭔지.”
“그날의 무례를 사과드리려고요.”
“정말 그것뿐이야? 황후나 황녀가 보낸 게 아니라?”
“그분들하고는 말도 섞어 본 적 없는데요.”
나타니엘은 내 말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피보다 붉은 눈이 분노로 번들거렸다.
“지…… 진짜예요!”
갑자기 표정이 변한 나타니엘이 다급하게 내 입을 막았다.
“분명 이리로 사라졌다! 찾아라.”
어디서 나타났는지 검은 옷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차림새의 그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찾았다.
“으악!”
날 받치고 있던 벽이 사라지면서,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정확히는 그 옆에 있는 수풀 위로. 작은 나무들에 부딪혀 팔이 따끔거렸다. 그러고 보니 입을 막고 있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걸 깨달은 순간, 배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설마.”
고개를 내리니 잔뜩 화가 난 얼굴의 새끼 용이 앉아 있었다.
“저…… 전하?”
“삐이!”
조용히 하라는 듯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내 입을 막았다.
“거기 누구냐!”
검은 옷의 남자들이 소리를 듣고 내 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나타니엘로 추정되는 새끼 용이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나는 재빨리 모자를 벗어 그의 위에 덮고 몸 뒤로 숨겼다.
“누구냐.”
잠시 뒤, 기사 하나가 내 목에 검을 들이밀었다. 금방이라도 휘두를 기세였다. 난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들고 말했다.
“전 그냥 신실한 신자입니다. 여기는 용의 흔적을 찾아 방문했을 뿐이고요.”
내 변명에도 그들은 검을 치우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 말을 믿는 것 같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더 당당해야 한다. 치마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난 필살기를 펼쳤다.
“저희 아버지는 제국을 수호하는 북부의 패자, 윈터스 공작입니다. 혹 이름을 들어 보셨는지요.”
우아한 말투였지만,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 라는 뜻이었다. 윈터스 공작의 이름을 듣자 그들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윈터스…… 영애란 말입니까? 어째서 기사 하나 없이 이런 자리에 오시는 겁니까.”
“저는 조용히 신의 흔적을 더듬는 신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대체 누구죠? 제가 신분을 밝혔으니 당신들도 밝히는 게 예의 아닌가요.”
내 말에 그들은 크게 당황한 듯 보였다. 그냥 어중이떠중이 가문도 아니고 윈터스 가문의 여식이니 모르는 척할 수도 없을 것이다.
“제 생명을 위협한 죄로 구금되어 보아야 정신을 차리시겠군요.”
내 협박이 먹힌 모양이었다. 그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공녀님. 저희는 황후 폐하의 가문인 트레비아 후작가의 기사단입니다.”
황후와 나타니엘의 사이가 안 좋았던가? 오라버니와 테레사의 사랑 이야기가 주요 사건이었기에 황실의 사정은 거의 몰랐다. 지금의 황후가 나타니엘의 친모가 아니니, 아마도 사이가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여튼 내가 알고 싶지 않은 일이니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그렇군요. 황후 폐하를 위해 이 일은 함구하도록 하죠. 하지만 다시는 이런 무례를 저지르는 일은 없어야 할 거예요.”
“실례했습니다.”
나는 검은 옷의 남자들의 인사를 받으며 천천히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순간.
“잠깐!”
“무슨 일이시죠?”
“모자를 두고 가셨습니다, 윈터스 영애.”
아.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제 모자에 손대지 마세요. 제가 직접 들 테니까.”
그들은 약간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친절을 베풀었을 뿐인데 내가 너무 정색하며 소리를 지른 탓이었다. 나는 민망함을 숨긴 채 묵직한 모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재빨리 자리를 피해, 신전 옆에 세워 둔 검은 마차에 올랐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조심스럽게 모자를 내려놓자 그 안에서 나타니엘로 추정되는 검은 새끼 용이 기어 나왔다.
“나타니엘 전하?”
뚱한 표정의 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짧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말하면 죽는다는 건가요?”
고개를 끄덕였다. 깜찍한 외모를 가진 주제에 하는 행동은 폭군이 따로 없었다.
“전하, 제 목을 자르는 것보다 저랑 협상하시는 게 더 간단하지 않을까요?”
순간 새끼 용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본인은 나름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지어 보였나 본데, 내 눈에는 귀엽기만 했다.
“제가 전하의 비밀을 지켜 드리는 대신, 제 작은 소원을 들어주시는 거죠!”
고개를 갸웃거리던 새끼 용이 빛에 휩싸이더니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원하는 게 뭐야.”
“별거 없답니다. 이번 황녀 전하의 생일 연회 때 메니실 영애를 지켜 주세요.”
“정말 그걸로 되겠나?”
“네.”
“내가 그녀 옆에 서 있다고 지켜질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그녀에게 못된 말을 하는 사람이 줄겠죠. 테레사 언니 눈치는 안 보겠지만, 전하 눈치는 볼 테니까요.”
나타니엘은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자신의 비밀을 감추고자 하는 그에게 이 정도면 꽤 싸게 먹히는 거래였다. 나는 참을성 있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좋아. 대신 약속은 꼭 지켜야 할 거야.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니까.”
“감사합니다, 전하!”
드디어 준비가 끝났다.
* * * 연회 당일. 막시밀리안은 내게 에스코트를 제안했다.
“테레사 언니는?”
“원래 이런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잖아. 게다가 테레사와 연락도 안 되니까.”
그가 테레사에게 단 한 번도 에스코트 제안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잊었나 보다. 지금은 받아 주지도 않겠지만.
“좋아요. 멍청한 오라버니를 위해 제가 참석할게요.”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막시밀리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꼭 그렇게까지 말해야 해?”
“네.”
단호한 대답에 그는 입만 벙긋거리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준비를 시작해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아직도 정신 차리지 못한 막시밀리안과 더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는 옆에서 말하다 보면 테레사에게 잘해 주게 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미 글러 먹은 것인지, 아니면 원작의 한계인지 막시밀리안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솔직히 크게 실망했다.
‘이제 신경 쓰지 않을 거야.’
막시밀리안은 후회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에서 끝나겠지만, 테레사는 아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던 그녀의 불치병. 원작에서는 정확한 병명을 알려 주지 않았지만, 그간 그녀가 받은 스트레스가 원인인 것처럼 서술되어 있었다.
‘실연이 죽음보다는 낫겠지.’
나는 좀 더 냉정해지기로 했다. * * * 우리는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말이 없었다. 하지만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매끄럽게 웃으며 연기를 시작했다.
“어머, 윈터스 소공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프리우스 백작님.”
“공녀님, 오늘 너무 아름다우십니다.”
“칭찬이 너무 과하십니다.”
우리의 등장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겨울 정도로 미모를 찬양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억지로 웃어서 입꼬리에 경련이 일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등장할 때가 되었는데.
“벨리시아 가문의 이오른 경과 메니실 가문의 테레사 양이 입장합니다.”
호명되는 이름에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시밀리안을 힐끗거렸다. 그들 모두 둘의 약혼 관계가 아슬아슬하다는 기사를 읽었을 것이다. 참석자들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우리 남매를 보았다. 내 손을 잡은 막시밀리안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끼익, 문이 열리고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테레사가 들어왔다. 평소의 수수한 모습을 벗어던진,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