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이제 그만 그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려요2022.02.12.
카시안의 명에 후작가의 기사들이 나와 막시밀리안을 끌고 나갔다. 문밖으로 쫓겨나자마자 막시밀리안은 어디론가 달려갔고,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알만 굴리고 있는데 조용히 카시안이 나타났다.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적개심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냉랭한 눈빛이었다. 그녀는 막시밀리안을 노려보며 내게 말했다.
“소공작은 인격에 문제가 있어요. 어떻게 만난 적도 없는 남자들과 테레사의 사이를 의심할 수 있죠? 본인은 황녀 전하를 옆에 끼고 나타났으면서.”
“네?”
“공녀님은 테레사를 아끼는 것 같으니 부탁 좀 드릴게요. 소공작에게 테레사를 이런 식으로 대할 거라면 차라리 파혼하라고 말씀 좀 해 주세요. 테레사는…… 절대 먼저 그 사람을 포기하지 못할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 버렸다. 나는 문 앞에 온 마차에 올라타고 나서야 무언가 깜빡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 황태자 전하…….”
갑자기 벌어진 사건에 그를 데려온 게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렸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쥔 채로 한숨을 쉬었다.
* * * [단독! 윈터스 공작가와 메니실 백작가의 이상기류] 다음 날, 신문 1면은 테레사가 막시밀리안의 뺨을 친 사건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기사를 본 아버지는 당장 우리를 불러들였다. 공작은 둘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기사가 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막스.”
“…….”
“왜 말이 없어! 제이나, 네가 설명해 봐라.”
막시밀리안이 경고하듯 나를 노려봤지만 그런다고 해서 참을 내가 아니었다. 테레사 쪽에서 파혼을 말하기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위자료였다. 먼저 파혼을 요청하는 쪽에서 위자료를 지급하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었다. 공작가가 보기엔 액수가 크지 않았지만, 메니실 가문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파혼하는 데에도 돈이 문제라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은 아버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지위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해서 공작가의 명예가 실추되는 일에 예민했다. 그러니 지금 이 문제의 근원이 막시밀리안에게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위자료는 거의 받지 않으실 게 뻔했다. 원작에서도 그랬으니까.
“아버지, 저희 가문에 다른 가문의 첩자가 잔뜩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뭐?”
이것도 숨겼나 보네. 나는 그간 테레사가 우리 가문 내에서 겪은 일을 말했다. 얼마나 많은 가문이 윈터스 공작가의 고용인들을 이용해 그녀를 음해하고 괴롭혔는지를 말이다.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냐! 가문의 적자가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는 자리에서!”
아버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셨는지 소리를 질러 댔다. 막시밀리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 오라버니는 메니실 영애에게 어떠한 언질도 없이, 다른 여성들과 연회에 입장해서 추문을 퍼뜨렸답니다.”
다혈질인 아버지는 한쪽에 쌓여 있던 서류를 오라버니에게 집어 던졌다.
“네가 정녕 제정신이냐? 약혼녀가 있는 새끼가, 뭐 어쩌고 저째!”
그리고 나는 마지막 카운터를 날렸다. 마치 불난 집에 가스통을 집어 던지는 격이었다. 그 집이 우리 집이라는 게 약간 슬펐지만.
“그리고 어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메니실 영애에게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난 거냐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몰아붙였다는군요.”
“이…… 이 미친놈이!”
결국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라버니를 쥐어패기 시작했다. 한때 제국 최고의 기사였던 공작이 막시밀리안을 때리는 소리는 경쾌하기까지 했다. 한참을 두들겨 패던 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당장 가서 사과해! 가서 무릎을 꿇고 빌어서라도 메니실 영애의 사과를 받아 와!”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집무실에서 쫓겨났다. 막시밀리안은 입술을 깨물고 날 보며 말했다.
“이제 속이 시원해?”
“그냥 내버려 뒀으면 아버지는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셨을걸? 오라버니가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는지 모르실 테니 오히려 메니실 가문을 추궁하셨을 거야. 그리고 우리의 착한 테레사 언니는 자기 잘못이라고 말해 주겠지.”
원작에서 몇 번이나 있었던 일이었다. 테레사는 막시밀리안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들을 언제나 함구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관계가 끝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앞으로 테레사에게 잘해 주면 되잖아! 그날 네 말을 듣고 너무 화가 나서 그런 거지, 본심은 아니었어.”
“진심도 아닌 말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건 더 나쁜 거 아니야?”
내 말에 막시밀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오라버니는 지독한 사람이야.”
“제이나!”
“그렇게 소리 질러도 소용없으니 알아서 해.”
본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나는 이 기회에 둘이 완전히 갈라서게 만들 계획이었다. * * * 며칠 뒤 테레사에게서 편지가 왔다. 편지의 내용은 평범했으나 막시밀리안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진심인지 모르겠지만 막시밀리안은 매일같이 테레사에게 찾아가 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몰래 메니실 가문에 보낸 그간의 사정을 적은 편지 덕에 가문 차원에서 둘의 만남을 막아 버렸다. [나와 막시밀리안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이나와는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시간이 된다면 내일 백작저에 와 주겠어요?] 정중한 편지 내용에서 은연중에 막시밀리안과의 파혼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보였다. 쇠뿔도 단김에 빼자고, 나는 당장 방문하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며칠 만에 만난 테레사는 수척해져 있었다. 그간 얼마나 울었는지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언니…….”
“어서 와요, 제이나.”
희미하게 웃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다른 건 몰라도 그녀가 막시밀리안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이쪽이에요. 메니실 백작저에는 처음 와 보셨죠?”
안내받은 티 룸은 아담하지만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자리에 앉은 내 앞에 차와 쿠키가 놓였다.
“와 줘서 고마워요, 제이나.”
“뭘요. 몸은 좀 괜찮아요?”
“그냥 그러네요. 막시밀리안은 잘 지내요?”
“오라버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원래도 잘 먹고 잘사는 놈이니까.”
“다행이네요.”
말하는 모습에서 힘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는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날의 이야기를 함부로 꺼내지 않았다. 테레사가 말해 주기를 기다렸고, 마침내 그녀가 연회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막스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은 좀 달랐어요. 나에게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봤어요.”
테레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 일의 전말을 이야기했다.
카시안의 남동생이 오랜만에 돌아와서 인사를 하고 있는데 막시밀리안이 끼어들었다. 그러더니 그녀가 바람을 피웠다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간 테레사의 평판을 떨어뜨리기 위해 퍼뜨린 더러운 소문들이 막시밀리안의 입에서 나왔다. 테레사가 돈을 보고 매달리고 있다는 둥, 다른 남자가 있다는 둥. 테레사의 파혼을 바라던 사람들이 퍼뜨린 소문을 여과 없이 모두 뱉어 냈다고 한다. 작게 말하고 있었지만, 끓어오르는 분노가 여실히 드러났다.
“모르고 있는 줄 알았어요. 단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 없었는데.”
결국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하는 테레사를 보며 난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 소문들이 진짜냐고 몰아붙이는데 더는 참을 수가 없었어요.”
나는 테레사가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그간 흘린 눈물보다 더 크게, 마음 아파했던 시간보다 더 길게. 그러기 위해서는 테레사가 그녀의 사랑을 냉정하게 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테레사 언니, 막스 오라버니가 잘했다는 건 아니에요.”
나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
“하지만, 저는 언니가 매번 이런 식으로 일을 혼자서만 안고 가려는 건 문제라고 봐요.”
“제이나…….”
근본적으로 둘의 문제는 서로 너무 대화가 없다는 것이었다. 테레사는 상대를 생각해 준답시고 혼자서 끙끙 앓았고, 막시밀리안은 눈치가 쥐뿔만큼도 없어서 신경 쓰지 않았다. 관계는 누군가의 희생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테레사만 바뀐다고 해서 이 일이 해결될 게 아니란 뜻이었다. 근본적으로 막시밀리안이 바뀌지 않는다면, 이 커플의 미래는 어두웠다. 그리고 원작을 읽은 나는 알고 있었다. 막시밀리안이 바뀌는 건, 테레사를 잃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라는 걸.
“사랑한다면 서로 더 많이 이야기하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말해야 해요. 말하지 않으면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잖아요?”
내 말에 테레사는 생각에 잠겼다. 우리는 오랫동안 말없이 차를 마셨다. 제일 중요한 건 테레사가 막시밀리안에게서 애정을 거둬들이는 일이었다. 나는 그녀가 마음을 정리하길 바라며 말했다.
“그리고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내가 생각해도 우리 오빠는 쓰레기예요. 이제 그만 그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려요.”
테레사는 내 말에 흐릿하게 웃어 보였다. 언제나 맑고 다정했던 웃음이 아닌,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미소였다. * * * 내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테레사는 오라버니와의 만남을 피했다. 당분간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다는 그녀의 답장을 받자 막시밀리안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둘의 불화는 매일 신문에 생중계되었다. 백작저에 칩거 중인 테레사와 달리 일이 많은 탓에 막시밀리안은 이곳저곳 얼굴을 보일 곳이 많았다. 파혼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했는지 가는 곳마다 여자를 소개하려 하는 통에 막시밀리안은 예민해져 갔다.
‘아직 구르려면 한참 남았지.’
테레사를 보지 못하는 건 슬펐지만, 막시밀리안이 괴로워하는 걸 가까이서 보는 거로 때웠다. 게다가 나 역시 다른 계획으로 바빴다. 지난번 연회에서 나타니엘과의 만남에 실패했으니 다른 곳에서 둘을 만나게 해야 했다.
‘일단 황태자 전하와 친분을 좀 쌓자.’
다행히도 황태자와 친분이 있는 사람을 알았다. 바로 카시안이었다. 비록 그녀의 집에서 쫓겨나면서 우리의 짧은 우정은 박살 났지만, 도전은 해야만 했다. 편지지를 꺼낸 나는 확신에 차서 글을 써 내려갔다. 나는 남자는 새 남자로 잊어야 한다며, 카시안의 도움을 받아 테레사에게 남자를 소개해 주고 싶다고 적었다. 덤으로 테레사가 얼마나 외모를 중시하는지도. 그리고 마지막에 내가 생각하는 새로운 남자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 * * 편지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다행히도 카시안은 내 의견에 동의해 주었다. 우리는 편지를 통해서만 연락을 주고받았다. 혹시나 이야기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테레사의 평판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막시밀리안과 파혼하지 않은 상태였고, 사교계에서 그녀의 평판은 최악이었으니까. 우리는 모든 일을 조심히 실행했다. [황녀 전하 생일 축하연이 멀지 않았죠. 제가 그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테레사를 데리고 갈 테니, 준비해 주세요. ― 카시안]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쓰여 있지 않았지만 나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카시안은 며칠 전부터 나타니엘이 교외에 있는 신전에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일단 나는 그와 조심스럽게 접선하기로 했다.
‘기분 나빠하면 나도 카시안도 끝이야.’
원작에서 나타니엘은 꽤 잔인하게 묘사되었다. 심기를 거스르면 그 강대한 힘으로 상대의 머리를 날려 버리는 장면이 종종 있었다.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다.
‘예의를 지키자!’
나는 몇 번이고 속으로 생각하며 마차에 올랐다. * * * 마차를 타고 도착한 신전은 중앙의 대신전과 다르게 평범한 모습이었다. 황태자나 되는 그가 왜 이곳에 왔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조심스럽게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에는 기도하는 사제들 몇 명만 있을 뿐이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나타니엘을 찾았지만, 신전 내부에는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성소에 계신 걸까?’
신자들이 이 작은 신전에 올 이유는 용이 몸을 씻었다는 호수밖에 없었다. 씻으면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있긴 하던데.
‘차라리 돈을 주고 사제에게 치료를 받지.’
아무리 판타지 세계라지만,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오래된 이야기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신실한 신자들만 방문하는 장소였다.
‘나타니엘이 신실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니 일단 성소로 향했다. 가는 길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넓고 푸른 호수가 드러났다. 생각보다 인기가 없는지 주변에는 개미 새끼 하나 지나다니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돌며 나타니엘을 찾았다. 그러나 그 키 큰 남자의 털끝 하나 보이지 않았다.
“삐유.”
“찾던 사람은 없고 어디서 이상한 소리만…… 응?”
어디선가 들리는 울음소리에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주변을 살피자 낮은 관목이 흔들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