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내 마음속 남주는 너로 정했다!2022.02.05.
다정한 테레사와 더 잘 어울리는 남자를 꼽자면 역시, 원작의 조연 황태자 나타니엘 시네스트라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건국 신화에 나오는 용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그는 막시밀리안과 완전 대척점에 있는 남자였다. 모두에게 상냥하고 테레사에게만 냉정한 남주와 달리 나타니엘은 테레사에게만 상냥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까칠했다. 그 상냥한 순정이 테레사만을 향한다는 점에서 더 완벽했다.
‘역시 남자 주인공을 바꾸려면 이 녀석이지.’
이미 내 마음속 합격 목걸이를 쥐여 주었지만, 일단 테레사의 의견이 제일 중요했다. 테레사의 의견을 물어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날 내가 테레사를 도와주고 난 뒤, 우리는 부쩍 가까워졌다. 정확히는 언제나 내게 호의를 베풀던 테레사를 내가 받아 주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 변덕스러운 성격이긴 했지만.’
원작에서 제이나는 전형적인 귀족 아가씨였다. 도도하고 까칠한 성격에 변덕이 잦았다. 하녀들은 지금 그 제이나가 영웅 놀이에 심취해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미지가 아주 바닥이네.’
하지만 그 덕에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하던 하녀들의 기억 속에서 나는 금방 잊혀졌다.
* * * 며칠 뒤, 나는 외출할 때 시중들 사람이 없다는 핑계로 테레사를 불러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거절했겠지만, 사람이 너무 좋은 테레사는 좋다고 따라 나왔다.
“어머, 여기 너무 예뻐요. 어떻게 이런 곳을 알고 있어요?”
“저희 가문에서 운영하는 티 룸인데, 오빠가 한 번도 안 데려왔어요?”
내 말에 테레사는 배시시 웃으며 변명하듯 말했다.
“막스가 많이 바쁘잖아요.”
할 말은 많았지만, 하지 않기로 했다. 테레사의 인생의 중심이 막시밀리안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으니까. 나는 티 룸의 명물인 히비스커스 아이스티를 시켰다. 처음 마셔 본 아이스티가 마음에 들었는지 테레사의 눈이 반짝거렸다.
“이거도 먹어 봐요.”
나는 같이 나온 에그타르트도 그녀 앞으로 밀어 주었다. 연신 맛있다면서, 여기 데려와 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테레사를 보며 기분이 이상했다.
‘왜 그런 놈에게 반해서…….’
측은한 마음을 숨긴 채로 은근슬쩍 묻고 싶었던 것을 꺼냈다.
“혹시 나타니엘 황태자 전하를 아세요?”
갑자기 끌려 나온 이름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소문은 좀 들었어요, 친구들한테요. 저는 사교계에서 활동을 잘 안 하니까요.”
“아…….”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맺어진 약혼 탓에 테레사는 사교계에 나갈 일이 없었다. 원작에서 나타니엘과는 어떻게 만났더라.
“그런데 황태자 전하는 갑자기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아, 뭐. 저도 곧 약혼해야 할 나이잖아요. 그래서 정보를 좀 수집해 볼까 해서요.”
“어머. 아가씨가 전하께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하긴, 매일 막스 얼굴을 보면 웬만한 남자는 눈에 안 차시긴 할 거예요.”
테레사는 내가 나타니엘에게 관심이 있다고 착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아는 모든 소문을 내게 말해 주었다. 눈을 반짝이는 모습이 꼭 나타니엘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많이 알고 계시네요, 언니.”
“막스보다는 못하지만, 황태자 전하께서도 정말 잘생기셨으니까요.”
이쯤 되면 테레사가 진성 얼빠는 아닐지 걱정되었다.
‘설마. 아니겠지.’
막시밀리안이 아무리 잘생겼어도 그따위로 굴면 천년의 사랑도 식을 것 같았다.
“언니는 왜 우리 오빠가 그렇게 좋아요? 제가 봐도 못되게 구는데…….”
내 말에 테레사는 잠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가만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가씨, 막스는 사실 상냥한데, 부끄러움을 많이 탈 뿐이에요.”
예? 누가요? 누가 상냥하다고 하는 거예요.
“항상 저한테 잘해 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랬는걸요. 저는 막스가 언젠가 그 수줍음을 이겨 낼 거라고 믿고 있어요.”
아니, 그때는 이미 늦어요. 우리 여주, 너무 대책 없이 착한 건 아닐까? 하긴 원작에서도 막시밀리안이 황녀에게 흔들린다고 고백하고 나서야 떠날 생각을 한 사람이었다.
“언니, 내 가족이지만, 우리 오빠 너무 믿지 마요.”
“아이참. 아가씨도 왜 그래요.”
오후의 햇살 아래 눈부시게 웃는 테레사의 모습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누군가를 그저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행복한 그녀인데.
‘일단 테레사가 정신 차리게 해야 해.’
눈에 단단히 씐 콩깍지를 벗겨 내는 게 먼저였다. * * * 돌아오자마자 하녀를 불러 막시밀리안의 행방을 물었다.
“오라버니는?”
“조금 전 들어오셨습니다. 2층 서재에서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녀의 말에 옷을 갈아입고 서재로 향했다. 고풍스러운 장식과 오래된 책이 가득했다.
“부르셨다고요.”
“아아. 그때 티 파티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막시밀리안은 내게 서류 봉투를 건네주었다. 안에는 얄팍한 보고서가 들어 있었다. 당연하게도, 차를 타 준 하녀와 하녀장에게 누군가가 돈을 보낸 증거들도 함께 있었다.
“꾸준히 테레사를 괴롭혀 모욕을 주려고 했다는군.”
막시밀리안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심경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나는 보고서를 계속 넘겼다. 한 가문에서만 시도한 것이 아니었다. 아주 작은 가문에서부터, 황실에 이르기까지 온갖 가문의 사주를 받은 증거들이 빼곡히 들어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대고 있었지만 목적은 하나였다. 그들은 테레사의 입에서 파혼이란 말이 나오길 바랐다. 이 약혼이 오롯이 테레사의 욕심으로 유지되고 있다 알았기 때문이다. 혹시 모욕을 못 이기고 파혼하게 되면 무려 윈터스 공작 부인의 자리가 공석이 될 테니까. 그 자리를 노리는 가문의 짓이었다.
“감히 내가 있는 자리에서 이런 짓을 하다니.”
막시밀리안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그들이 이런 일을 벌일 정도로 테레사의 위치가 떨어진 건 모두 자기 탓이면서.
“놀랍지도 않네요. 오라버니와 테레사 언니의 사이가 좋지 않은 건 비밀도 아니니까요.”
말이 냉랭하게 튀어 나갔다. 막시밀리안은 이마를 구기며 내게 물었다.
“이게 내 탓이라는 거니, 제이나?”
“그럼 저희 가문에 와서 차를 마신 테레사 언니 탓인가요?”
“이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오우…….”
이건 정말 상상도 못 한 쓰레기인걸. 내 눈빛에서 경멸을 읽었는지 막시밀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테레사에게만 박한 이유가 뭘까? 나는 원작을 읽는 내내 궁금했던 이유를 물었다.
“그냥 잘해 줬으면 이런 일이 안 생겼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내가 테레사에게 잘못한 일이 뭐가 있다고.”
아, 그냥 멍청이인 거구나. 나는 그에게 하나하나 손을 꼽아 알려 주었다.
“테레사 언니와의 약속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잖아요.”
“그건 테레사가 괜찮다고 했어.”
“그리고, 언니가 하는 부탁은 뭐 하나 들어준 적 없고요.”
“바빠서 깜빡한 거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생일 선물이나 기념일 선물 같은 거 챙긴 적 있어요?”
“테레사가 챙기는데 내가 왜?”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는 막시밀리안에게 최후의 비수 같은 말을 꽂았다.
“근데 왜 다른 여자들은 다 챙겨 줘요?”
“그…… 그건…….”
그래, 안 챙겨 주는 건 상관없다 치자. 그런데 약혼녀는 내팽개치고 다른 사람들을 알뜰살뜰 챙기는 게 문제 아닌가?
“그건 모두 일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이라 그런 것뿐이야. 다른 사심이 있던 것도 아니고.”
“그럼 명확해지네요. 테레사 언니가 오빠의 일적으로 필요한 사람들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게요.”
내 지적에 할 말이 없는지 막시밀리안은 입을 꾹 닫았다. 미간을 구기고 입술을 씹는 것을 보며 그가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런 표정을 지으면 매번 테레사가 그에게 사과했었지. 하지만 난 테레사가 아닌걸?
“우리 일이야. 네가 언제부터 테레사에게 신경 썼다고 이 난리야.”
“오빠가 신경 쓰지 않아서 가문 내부가 엉망이 되었잖아. 그러니까 나라도 신경 써야지.”
결국 둘만의 일이라며 말을 돌린다. 대체 저놈의 문제는 뭘까. 빙의하고 몇 주가 지났지만, 막시밀리안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좋은 사람이었다. 가령 고용인들에게 대하는 태도라든가, 내게 하는 행동들을 보면 아주 배려가 몸에 배어 있었다. 세심하게 챙겨 주는 모습만 보면 혹시 상대에게 마음이 있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테레사에게만 달랐다. 너무 익숙해져서 배가 부른 걸까? 더는 머리가 아파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있을 때 잘해요, 오빠.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그에게 쏘아붙이고 서재에서 나왔다. 당황한 그가 쫓아 나왔지만 나는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쩌면 막시밀리안의 말이 맞았다. 내가 너무 과몰입했을지도 모른다. 전생에도 오지랖이 넓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원작을 처음 읽었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응원하던 테레사가 허무하게 죽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끝나 버린 원작을 보고 얼마나 상심했었는지.
‘내가 있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나는 원작과 제이나의 기억을 총동원해서 나타니엘과의 접점을 찾으려 애를 썼다.
‘그래도 공녀인데 황태자와 접점이 아주 약간은 있겠지.’
내게 온 초대장을 확인하며 그와 만날 만한 모임을 찾았다. 그리고 그것들 중 벨리시아 후작 영애의 생일 연회 초대장이 끼어 있었다. 벨리시아 후작가는 황제의 누이가 시집간 가문이었다. 덕분에 후작가가 주최하는 연회에는 황실 사람이 늘 참석했다. 원작에선 나타니엘이 이 연회에 참석한다는 소문에 사람이 몰리기도 했다.
‘정작 테레사는 황태자에게 별 관심이 없었지만.’
게다가 벨리시아 후작 영애와 테레사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이기도 했다. 만일 이번에 황태자와 친분을 쌓는 데 실패하더라도 후작 영애와 안면을 익혀 두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당장 참석하겠다는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어쩌면 둘을 만나게 해 줄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혹시 알아? 황태자가 테레사를 보고 첫눈에 반할지?”
그런 상상을 하자 편지를 쓰는 움직임이 빨라졌다.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 * * 연회에는 나 혼자 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테레사를 만나 후작 영애, 카시안을 소개받기로 했다. 도착해서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자 혼자인 날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이런 걸 테레사는 매번 겪었겠지.’
원작에서 막시밀리안은 테레사의 사교 모임에 동석한 적이 없었다. 생각할수록 괘씸했다.
“아가씨!”
멀지 않은 곳에서 테레사가 손을 흔들었다. 곱게 차려입었지만, 그녀의 성격답게 수수한 차림새였다.
‘다음에는 옷도 신경 써야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빠르게 테레사의 곁으로 향했다.
“카시안, 이쪽은 제이나 윈터스 공녀님이셔.”
“만나서 반갑네요, 윈터스 공녀님.”
푸른빛이 도는 흑발을 틀어 올리고, 크림색 드레스를 입은 카시안의 눈이 노골적으로 날 훑었다. 눈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가 있어서 그런지 시선이 더욱 날카롭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내게 좋은 감정이 있진 않은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빙의 전에 테레사가 흘린 눈물의 절반 이상이 내 지분인 탓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벨리시아 영애.”
카시안이 날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나는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원작에서 사이다를 공급해 주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으니까. 쌀쌀맞은 그녀의 태도에도 나는 둘 옆에 찰싹 붙어 있었다. 언제나 테레사를 냉대하기만 하던 내가 그녀와 친하게 이야기를 나누자 주변의 시선이 조금 달라졌다. 카시안 역시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둘이 친하게 지낸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돌던데, 사실인가 보네요.”
“그동안 사소한 오해가 있었지만, 전부 풀었답니다. 저는 이제 테레사 언니가 없으면 어쩌나 싶다니까요.”
나는 일부러 과장되게 큰 소리로 말했다. 귀족들이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우리 쪽을 힐끔거렸다. 모두 소문이 진짜인지, 아니면 가짜인지 알고 싶은 듯한 표정이었다. 내 의도를 알아차린 듯 카시안은 표정을 바꾸고 나를 친절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마치 3년 만에 만난 절친한 친구처럼 우리는 웃고 떠들었다. 테레사 역시 오랜만에 편안한 자리에 나와 놀아서인지 표정이 좋아 보였다.
“아! 맞다. 아가씨, 오늘 황태자 전하가 오신다고 하셨어요.”
“예?”
테레사가 갑자기 나타니엘 이야기를 먼저 꺼내자 나는 크게 당황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황태자 때문에 테레사와 친한 척한 거라고 오해할 것 같은데. 눈을 굴려 카시안을 보자 그녀의 표정이 그러면 그렇지,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