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악독한 시누이, 그게 바로 나야2022.02.02.
남의 일에 함부로 참견하면 안 된다. 특히 사랑싸움이라면 더욱더. 전생에서부터 들었던 이야기였는데, 왜 그 말을 따르지 않았는가. 제이나는 자신의 결혼식 단상에 서서 생각했다. 대체 왜 여기에 서 있는 거지? 이번만큼은 놓칠 수 없다는 듯, 주례를 서는 교황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냈다.
“그럼 맹세의 키스를 하겠습니다.”
제이나는 교황의 말에 삐걱거리며 상대의 얼굴을 보았다. 긴장한 그녀와 달리 신랑의 얼굴은 무심해 보였다. 제이나는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는 남의 일에 참견 안 할 거야!’
* * *
소설 『불행의 증거』는 여주인공 테레사 메니실의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짝사랑 일대기였다. 남주인 막시밀리안 윈터스는 다른 사람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상냥했지만, 자신의 약혼녀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늘 냉정하고 까칠했으며, 사랑을 갈구하는 테레사를 밀어내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막시밀리안과 황녀의 스캔들이 터졌다. 그는 황제가 가장 아낀다고 알려진 황녀, 아나이스에게서 테레사와 다른 모습을 보며 흔들렸다. 거기에 황실과 윈터스 가문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테레사에게 파혼을 강요했다.
‘결국 얼마 안 가서 파경에 이르렀었지.’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테레사는 그녀를 돌봐주던 황태자의 도움으로 몸을 숨겼다. 물론 뒤늦게 사랑을 깨달은 남주가 달려와 빌고 애원했지만, 이미 죽음을 앞둔 테레사는 그를 밀어냈다.
‘그것도 전부 자신이 죽고 나서 남주가 마음 아파할까 봐서였지만.’
착해도 너무 착한 그녀는 그렇게 쓸쓸히 홀로 죽었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도 막시밀리안을 걱정했다. 그가 상처받지 않을지 걱정하며 새로운 사랑을 찾길 바라는 절절한 모습에 함께 울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후회물을 읽을 때 다들 그런 생각을 하지 않나? 남주가 얼마나 처절하게 구를지, 얼마나 매달릴지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막시밀리안은 그 기준에 전혀 미치지 않았다. 그래. 그래서 악플 좀 달았다. 막시밀리안 개**, 여주한테 차라리 남조 좀 붙여 주세요. 둘이 행복하면 되잖아요. 남주** 죽이고 지옥 가겠습니다. 좀 과했다는 거? 인정한다. 그런데 그 새끼는 지나가다가 비명횡사해도 마땅할 놈이었다.
‘이건 기회야.’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에는, 이제 막 성인이 된 듯한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색이 옅어서 은발로 보일 정도의 긴 백금발이 햇빛에 반짝였다. 남주인 막시밀리안과 달리 어머니를 닮아 짙은 녹색인 눈동자. 지나가다가 뒤를 돌아볼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 이건 테레사를 구박하던 시누이, 제이나의 모습이었다. 제이나는 원작에서 메인 악당인 황녀나 막시밀리안보다 욕을 더 먹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는 속담을 그대로 구현한 조연. 그게 바로 나였다. 나는 제이나에게 빙의했고, 지금은 원작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아직 막시밀리안이 황녀에게 흔들리지도 않았고, 테레사가 상처받기도 전이란 뜻이다.
‘이놈의 가문 사람들은 전부 테레사에게 박했지.’
테레사와 막시밀리안의 약혼은 선대에서부터 내려온 오랜 친분 덕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윈터스 공작령에서 나던 마석이 특수한 가공을 거친 뒤 전기처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마석은 빠른 속도로 제국민의 삶에 파고들었다. 공작가의 재산은 엄청난 속도로 늘어났고, 제국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그러했다. 북쪽에서만 생활하던 윈터스 가문은 그 세력을 제도로 옮겼다.
‘그리고 황실에서 윈터스 공작령의 마석에 관심 갖기 시작하면서 정략결혼을 원했고.’
윈터스 공작마저 이 결혼을 반기지 않았다. 아무래도 위세 높아진 공작가 안주인 자리에 메니실 가문의 영애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가문의 주인이 저러니, 그 밑에 있는 사용인들의 태도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교묘하게 테레사를 못살게 굴었다. 그녀가 공작저에서 먹고 마시는 것에 장난을 치거나, 귀족이라면 상상도 못 할 곳에서 기다리게 했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약혼은 벌써 끝나 버렸을지도 몰랐다. 테레사는 메니실 가문에 철저하게 이 사실을 숨겼다. 그녀는 약혼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으니까……. 물론 막시밀리안은 관심도 없었고.
‘이제는 안 돼. 내 앞에서 테레사를 괴롭혀?’
나는 설렁줄을 당겨 하녀를 불렀다.
“마리아, 오늘 메니실 영애가 언제 온다고 했지?”
“아마 곧 오실 겁니다, 아가씨. 오늘 티타임에 참석하실 건가요?”
“응. 준비해 두도록 해.”
사실 원작에서 제이나가 티타임에 참석하면, 테레사를 향한 괴롭힘의 수위는 더 높아졌다. 테레사를 괴롭혀서 제이나의 눈에 들고 싶어 하는 하인들 때문이었다. 제이나 역시 이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딱히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다를 거다. 내가 있는 한 그런 일은 공작저에서 더는 벌어질 수 없었다. * * * 나는 옷을 갈아입고 티 룸에 들어갔다.
“제이나, 어서 와.”
“제이나 아가씨, 어서 오세요.”
막시밀리안과 테레사는 이미 티 룸에 있었다. 나는 테레사의 건너편에 앉아 둘을 살펴보았다. 남자 주인공인 막시밀리안은 정말 끝내주게 잘생겼다. 나와는 달리 완전한 은발의 그는 섬세한 이목구비를 가졌다. 그리고 청순한 얼굴과 달리 몸은 마치 조각상처럼 완벽한 형태였다. 베이글이라는 게 저런 거구나 싶었다. 막시밀리안이 나를 향해 달콤하게 웃자 주변에 꼭 꽃이 피는 것처럼 보였다.
‘저 정도로 생겨야 여주가 목을 매는 건가.’
나는 혀를 차며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오라버니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여주, 테레사가 있었다. 뺨을 붉힌 채로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누가 보아도 사랑에 빠진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속이 터졌다. 얼굴에 속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제이나, 차가 입에 안 맞니?”
막시밀리안이 찻잔에 손도 대지 않는 내게 말을 걸었다. 아니. 네가 마음에 안 드는데요. 나는 여전히 뚱한 얼굴로 테레사를 관찰했다. 그녀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차를 마셨다. 분명 저기에 장난질을 쳐 놓은 게 틀림없는데.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마시냐고!
“저, 테레사 언니가 마시는 거로 마셔 볼래요.”
“제. 제 거로요?”
의도적으로 뱉은 내 말에 테레사가 당황하며 찻잔을 뒤로 물렸다.
“네. 언니가 마시는 건 마고 지방에서 올라오는 얼그레이죠? 요즘 그게 유행이라 구하기도 어렵다던데.”
억지였다. 하지만 유행한다는 건 사실이었다. 테레사와 약혼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막시밀리안이 손수 차를 내려 준 적이 있었다. 그때 사용한 찻잎이 마고 지방의 것이었다. 그렇게 유명한 브랜드는 아니었지만, 막시밀리안이 몇 년간 꾸준히 구매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지금 내 동생이 당신 걸 마시는 게 아깝다는 겁니까?”
테레사가 망설이자 막시밀리안이 한마디 했다. 저 밉살맞은 주둥아리. 어쩜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다 저렇게 재수가 없을까. 테레사가 당황한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못된 하녀들이 그녀의 찻잔에는 설탕 대신 소금을 넣어 대접해 왔으니까! 매번 그런 식으로 괴롭혀 왔지만, 테레사는 오로지 저 남자 주인공 새끼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이 모임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새것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공녀님.”
오라버니의 한 소리에 기회를 잡은 하녀들이 내게 다가와 새로운 차를 권했다. 하지만 안 될 일이었다. 난 저걸 마셔야 하니까.
“싫어. 난 저게 좋아.”
당황해서 동공에 지진이 난 하녀들을 무시하고 날름 찻잔을 가져왔다. 그리고…….
“으윽! 이게 뭐야!”
“세, 세상에! 아가씨, 괜찮으세요? 어서 물을 가져와!”
나는 마시던 걸 그대로 뱉어 냈다. 이걸 대체 어떻게 마신 거야? 거의 소금물 수준이었다. 원작에서 테레사가 걸렸다는 불치병의 원인이 혹시 이건가. 티 포트에 남아 있는 차를 잔에 따라 살짝 마셔 본 막시밀리안의 얼굴도 사정없이 구겨졌다.
“지금 이걸 누가 내놓은 게냐!”
막시밀리안의 불호령에 하인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드디어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깨달은 것처럼 다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차를 탄 아이를 데려와. 당장!”
내 호통에 사색이 된 하인이 허둥지둥 티 룸을 나섰다. 잠시 후, 하인은 반쯤 정신이 나간 하녀를 끌고 왔다. 테레사보다 조금 나이가 많은 정도의 예쁘장한 하녀는 우리 앞에 납작 엎드렸다.
“감히 윈터스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해도 분수가 있지.”
“도련님, 시…… 실수였습니다. 한 번만 살려 주세요.”
나는 덜덜 떠는 하녀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이대로 본보기로 자르고 넘어갈까 싶었다. 그때, 하녀장 메건이 나섰다.
“소공작님, 제 밑에 있는 아이가 실수하였으니 저 역시 벌을 같이 받겠습니다.”
실수라니. 일부러 넣은 걸 다 아는데. 나는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 자네가 그 아이 대신 가문에서 쫓겨나도 상관없겠군.”
내 말에 메건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겠지.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아가씨. 하녀장은 가문을 위해 10년 넘게 일한 사람입니다.”
이제는 집사까지 나섰다. 막시밀리안 역시 적당히 넘어가고 싶은지 조용히 내 손을 잡았다. 하지만 어림없다. 우리 여주 눈에서 피눈물 나게 했으니, 나 역시 똑같이 해 줄 거다.
“실수라니. 우리 찻잔은 모두 멀쩡한데 테레사의 것만 그랬잖아? 우리 가문과 메니실 가문 사이를 이간질하고 싶어 하는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는지 어찌 알아.”
“제이나, 너무 넘겨짚는 건…….”
응, 넌 조용히 해.
“아니요. 오라버니, 이건 윈터스 가문의 명예와 관련된 일이에요. 세상에 어느 가문이 정혼자를 이따위로 대접하고 실수라고 그냥 넘어가나요?”
가문의 명예를 들먹이자 우리 대단하신 남주가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겠지. 테레사가 너무 착해서 그냥 넘어가 준 것이지 공론화되었다면 공작가의 명예는 바닥에 떨어졌을 것이다.
“하녀장과 차를 탄 아이를 감옥에 가두고, 뒤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도록.”
오라버니의 명이 떨어지자 다들 재빨리 움직였다. 우리의 순둥이, 테레사는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괜히 저 때문에…….”
“알면, 윽.”
나는 막시밀리안의 발을 콱 밟았다. 그가 가문의 대표이니 사과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내 눈빛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어. 영애 덕에 집안의 수치를 덜게 되었으니.”
그게 사과냐? 나는 입술을 악물고 테레사에게 사과했다.
“저희가 다 미안해요. 죄는 철저하게 밝혀내서 벌을 줄게요.”
내 사과에 테레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놀란 만도 하겠지. 제이나가 테레사를 얼마나 모질게 대했던가.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앞으로 힘든 일 있으면 꼭 저한테 말하세요.”
“고마워요, 제이나.”
내 말에 감격했는지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모습이 너무 예뻤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있으면 꼭 말하도록. 멍청하게 참지 말고.”
이런 감동적인 상황에 우리 오라버니는 초를 쳤다. 역시 테레사에게 막시밀리안 같은 쓰레기보다 더 잘 어울리는 남자를 찾아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