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 연극 (88/88)


#88. 연극
2023.09.02.



 
결혼식이 전부 끝나고 황궁도 차차 정리되어갈 즈음.

어느덧 벨리아를 보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온 가족들이 모두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다가오고 말았다.

이번에 인사를 나누고 나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기약 없는 이별이었다.

클로제는 로니카 왕국에서 제국으로 떠나왔을 때처럼 눈이 퉁퉁 부어서 훌쩍였고, 헤럴드는 붉어진 눈가를 모른 척하며 애써 웃어 보였다.


“잘, 크흠! 잘 지내렴, 벨리아.”

그러나 목이 메는 건 막을 수 없는지, 괜히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곤 인사를 건넨다.


“오라버니도요. 로니카 왕국에 꼭 놀러 갈게요.”

“……그래. 내 결혼식에는 와야 하지 않겠니. 그러니 그때 보자꾸나.”

“물론이죠.”

헤럴드는 눈물을 꾹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클로제. 그만 울어.”

“으허엉!”

클로제는 벨리아의 옷을 붙잡은 채로 엉엉 울어댔다.

그런 어린 동생을 바라보는 벨리아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클로제는 더 있다가 가도 되는 게 아닌가?

그런 마음이 슬쩍 들기도 했지만, 지금의 제국은 위험했다.


‘라울이 조용한 게 너무 이상해.’

괜히 남아 있다가 사건에 휘말리기보다는 평화로운 로니카로 돌아가는 게 맞다. 그게 훨씬 안전할 것이다.

벨리아는 흔들리는 마음을 꽉 붙잡았다.


“내가 했던 말 기억하지?”

“걱정하지 마. 내가 앤 줄 알아? 흐윽.”

“약속 꼭 지켜야 해?”

커다란 눈에 눈물이 맺혀 있는 게 귀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벨리아는 애틋한 마음을 담아 클로제의 머리를 쓰다듬곤 몸을 돌렸다. 그곳엔 제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서서 벨리아와의 인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긴 인사가 끝난 모양이구나. 하여튼 유별난 남매들이라니까.”

왕비는 익숙한 듯 초연한 표정이었다.

괜히 민망해진 벨리아가 어색한 표정으로 웃음 지었다.


“건강하게 잘 지내렴. 2황자가 널 아껴주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네. 잘 지낼게요. 어마마마도 건강하시고요. 보고 싶을 거예요.”

아쉬움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하는 자신의 딸을 바라보던 왕비가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곤 벨리아를 슬쩍 안아본다.


“다 컸구나, 벨리아.”

“…….”

자신을 안아주는 어머니의 품이 너무나도 따뜻했다.

끝까지 잘 참아왔던 벨리아였지만, 그에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왕비는 품에 안은 벨리아의 머리를 쓰다듬다 살며시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깊은 사랑이 느껴지는 입맞춤이었다.


“자주 찾아오라고 하고 싶지만, 한동안은 어려울 거라는 걸 안다.”

왕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조심하렴. 아버지와 내가 네게 보호장치를 해두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는 거란다. 알고 있지?”

“네. 그럼요.”

2황자궁에 신성력으로 만들어둔 결계는 최후의 상황을 대비한 장치였다. 그렇기에 부디 그것을 사용하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대신관도 한마디 보태었다.


“내가 준 목걸이도 한시도 떨어뜨려 놓지 말고.”

“네, 꼭 그럴게요.”

벨리아는 푸근한 얼굴로 웃고 있는 대신관에게 다가가 주름진 손을 붙잡고 밝게 인사했다.

이제 정말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늘 널 위해 기도하마.”

왕비는 벨리아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곤 몸을 돌렸다.

칼리드와는 길게 말을 나누진 않았다. 그저 잘 부탁한다는 한마디뿐. 하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많은 이야기를 알아들었다는 듯, 칼리드가 정중하게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왕비는 그의 인사에 조금은 편안해진 얼굴로 마차에 올랐다.

그렇게 벨리아를 축하하러 왔던 가족들이 서서히 시야에서 멀어졌다.

이내 마차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즈음, 벨리아가 칼리드의 품에 기대어 눈물을 흘렸다. 헤어짐이란 늘 아쉽고 슬펐다.


“괜찮을 거야. 분명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 테니까.”

칼리드는 부디 이 위로가 전해지길 바라며 자신의 품에 안긴 벨리아에게 온기를 전했다.

* * *



“그 아이에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셈이냐?”

잠자코 멀어지는 황궁을 바라보던 대신관이 물었다.

그 물음에 왕비는 나중에 벨리아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서운해하려나, 하는 생각을 하며 슬쩍 미소 지었다.


“네. 주신께서도 그것까진 바라지 않을 테니.”

주신은 냉혹하고 자비로웠으며 공평했다. 하지만 그런 주신이라도 특별히 아끼는 이가 있었는데, 그런 주신의 사랑을 받는 이를 ‘신의 아이’이라고 부르며 신국에서는 무척이나 귀한 존재로 여겼다.

그리고 이번 세대에서 주신이 선택한 신의 아이가 바로 전 신국의 신녀이자 현 로니카의 왕비인 헤스티아였다.

이것은 벨리아조차 모르는, 신국의 다섯 대신관과 로니카의 왕만이 알고 있는 기밀이었다.

‘신의 아이’는 대륙에서 유일하게 주신의 의사를 바로 들을 수 있는 자이도 했으며, 누구보다도 강대한 신력으로 가장 신에 가까운 자였다.

신과 가장 가깝다는 것은 실제로 신의 능력 일부를 자신의 몸에 품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랬기에 헤스티아는 아주 자연스럽게 알아차렸다.

이 세계가 ‘되돌아온 세상’이라는 것을.


“시간의 흐름이 역행했다는 것은 누군가의 간절한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그것이 벨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났다면 필시 그 아이가 겪은 미래의 어떤 일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했을 것이고요.”

헤스티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창밖을 가만히 응시했다.


“시간의 흐름이 일순간 멈췄던 날. 그날부터 벨리아의 행동이 변했어요. 라울 황자를 밀어내고, 무언가를 이루고자 바쁘게도 움직이더군요.”

그녀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저 추측일 뿐이지만 라울 황자가 벨리아에게 참으로 나쁜 짓을 많이 한 모양이지요. 그리고…….”

그러곤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한숨과 함께 무겁게 말을 이어갔다.


“벨리아의 모든 행동이 로니카를 지키는 방향으로 흘렀어요. 그건 아마 로니카 왕국이 아주 끔찍한 일을 당했기 때문이겠죠. 어쩌면 그 아이가 겪었던 미래엔 로니카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지 않고서야 벨리아가 그리 끔찍한 표정으로 제국을 경멸할 리 없었을 테니까.

2황자를 선택한 것도 살고자 하는 발버둥일 것이다.

그런 제 자식을 어떻게 못 본 척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나를 제국까지 부르고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결계까지 주었다. 그건 괜찮으리라 생각하느냐.”

제 딸이 신의 대리인으로서 세상의 흐름에 관여한 것에 대해 걱정스러웠는지 대신관이 물었다.


“……주신께서도 제 자식을 안타까이 여기는 어미의 마음이라 이해해 주실 겁니다. 게다가 애초에 시간을 되돌리는 행위를 허락해 주신 것 또한 신의 자비였을 테니까요.”

헤스티아가 한없이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제가 개입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일 것 같군요. 걱정되지만 앞으로는 흘러가는 대로 두고 볼 수밖에요.”

변하는 새로운 세상에서는 벨리아가 부디 상처받지 않기를. 덜 아프기를.

그리고 부디 행복해지길 간절히 바라면서 헤스티아는 간절히 손을 모아 기도했다.

* * *

가족들이 떠난 황궁은 텅 빈 듯 황량한 느낌이었다.

칼리드와 함께 황제에게 인사를 하고 중앙궁을 나오며 괜히 허한 기분에 벨리아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가족이 모두 떠나서 아쉬운가?”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벨리아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칼리드는 벨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곤 가볍게 껴안았다 놓아주었다.


“음?”

“그대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말에 벨리아가 씨익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외롭지 않아요.”

정말이었다.

그저 가족들을 못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속상하고 아쉬운 거지, 외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당신이 계속 옆에 있어 줄 거잖아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벨리아는 가족들을 떠나보낼 때 칼리드가 건네던 위로를 떠올렸다.

서툴렀지만 그의 진심은 확실하게 와닿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잘 견딜 수 있으니까.”

벨리아가 씩씩하게 웃어 보였다.


“어서 황후궁으로 가요.”

민망함에 붉어진 뺨을 감추며 벨리아가 총총 앞장서서 걷는다.

그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칼리드가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의 옆자리를 사수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산책하듯 걷다 보니 어느덧 황후궁에 다다랐다. 정말 오랜만에 와보는 곳이었다.


“들어갈까요?”

“……그래.”

이전에 왔을 땐 벨리아만 황후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지만, 오늘은 칼리드도 함께 만날 예정이었다.

황후와 대화를 나눴을 때 좋게 마무리된 적이 없었기에 칼리드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벨리아가 칼리드의 손을 꼭 붙잡았다.

벨리아가 방문했을 때는 침실에 딸린 응접실에서 황후와 대화를 나눴었다. 하지만 오늘은 공식적인 방문이었기에 장소가 바뀐 모양이었다.

둘은 화려하게 꾸며진 커다란 응접실에서 황후를 기다렸다.

잠시 후 시녀들이 황후의 방문을 알렸고, 그녀의 도착과 함께 응접실 테이블에는 먹음직스러운 다과들이 하나둘 놓였다.


“오랜만이구나.”

황후는 마치 어제 만난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듯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좋은 꼴을 보겠다고 여기까지 왔는지.”

혀를 차며 싸늘하게 칼리드와 벨리아를 바라보던 황후가 인상을 찌푸렸다.

벨리아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차분히 말을 꺼냈다.


“황후 폐하. 지난번에는 제대로 이야기도 못 나누지 않았습니까.”

“……이번엔 찻물을 뒤집어쓰고 싶은 모양이구나.”

찻잔과 주전자를 집어 던졌던 그날의 행동에 관해 이야기를 꺼낸 황후가 고개를 휙, 돌렸다.

벨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시녀들을 향해 말했다.


“그대들 앞에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으니 다들 자리를 비켜주게.”

“하지만…….”

시녀들이 벨리아의 말에 거절을 표하려던 찰나.

칼리드가 싸늘한 안광을 빛내며 그녀들을 노려보았다.


“지금 황자비의 말을 무시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

칼리드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게 아니라면. 나를 무시하는 거겠군.”

“아닙니다! 전하! 그게 아니라……!”

시녀는 다급하게 변명을 꺼내었지만, 칼리드는 그녀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차갑게 미소 지었다.


“안타깝게도 난 그리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야.”

칼리드의 입꼬리가 올라갈수록 시녀는 점점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2황자에 대한 소문은 많았다.

버려진 황자, 망나니 황자, 안하무인의 오만한 황자.

여러 말들이 있었으나 지금 이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수식어는.

잔혹하고 무자비한 황자.

2황자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을 가차 없이 죽였다는 이야기가 시녀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시녀가 말을 더듬었다.


“저, 전하. 전하께서 오해하신 듯…….”

“오해? 그건 내가 판단해.”

하지만 이번만 자비를 베풀겠다는 것처럼 칼리드가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너희들은 운이 좋은 편이야. 감히 나의 비의 앞에서 끔찍한 꼴을 보여줄 순 없으니.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얌전히 나가.”

칼리드의 말에 시녀들이 서둘러 감사를 표하곤 모두 빠르게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황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생각보다 연기를 잘하는구나.”

“뭐. 보고 배운 게 있어서 말입니다.”

칼리드가 황후와 비슷한 표정으로 비뚜름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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