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첫날밤
(87/88)
87. 첫날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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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첫날밤
2023.08.29.
결혼식을 하고 처음 맞이하는 밤.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는 의미로 보면 분명 틀린 말은 아니었다.
“칼리드.”
“응.”
제 부름에 얌전히 대답하는 칼리드를 바라보며 벨리아가 싱긋 웃었다.
그러곤 자신을 붙잡고 있는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갠 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힘을 주어 칼리드의 손을 떼어냈다.
“수작 부리지 말아요.”
예쁘게 웃으며 독설을 날리는 벨리아의 모습에 칼리드가 웃음 터뜨리며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얼굴이 닿아 있는 그의 가슴에서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느껴졌다.
“하하. 정말이지…….”
칼리드는 벨리아의 머리에 자신의 턱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하지만, 벨리아. 말은 바로 해야지.”
웃음기가 잔뜩 어려 있는 칼리드의 낮은 목소리가 머리를 가득 울렸다.
“이건 수작 부리는 게 아니라…….”
칼리드가 살짝 고개를 숙여 벨리아의 귀를 살짝 깨문 뒤 속삭였다.
“그대를 유혹하는 거야.”
허리가 찌르르 울릴 정도로 관능적인 그의 목소리는 신경을 밑바닥까지 자극했다.
벨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았다.
“들어가자.”
칼리드가 벨리아를 슬쩍 놓아주며 손을 붙잡았다.
“그렇지만…….”
“쉿.”
그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원래 신랑, 신부는 미리 자리를 비켜주는 게 예의지. 우리가 사라졌다고 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걸?”
칼리드는 그렇게 말했지만 벨리아는 괜히 멀어져가는 연회장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칼리드는 벨리아가 다른 곳에 신경 쓰게 둘 마음이 없는지 잠시 걸음을 멈춰 그녀를 향해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은 그들이 아니라 나를 더 신경 써 줘.”
그는 마음이 조급한 듯 발걸음에 속도를 더했다.
연회장에서 황자궁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젠장…….’
칼리드의 표정에서 점점 여유가 사라졌다.
급한 대로 이곳의 비어 있는 방에 들어갈까 싶기도 했지만, 그러면 벨리아가 싫어할 게 분명했다. 칼리드는 그 선택지는 과감하게 지웠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하루하루를 그저 살아갈 뿐이었던 칼리드는 벨리아를 만나서 세상의 색채를 알았다. 자신을 선택해준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이 황량한 황궁에서도 뭐든 즐거웠다. 삶에 생동감이 생겼다.
모든 건 벨리아 덕분이었다.
“난 오늘만 기다렸으니까.”
그는 그녀를 완벽하게 가지기 위해서 버텨온 시간을 보상받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밤.
그녀에게 톡톡히 받아낼 것이다.
* * *
“읏…….”
방에 들어오자마자 칼리드는 다급하게 벨리아의 입술을 찾았다.
잠시 숨을 돌릴 틈도 없었다.
“잠, 깐…….”
벨리아는 칼리드를 밀쳐보았다. 하지만 전혀 밀려나지 않는다.
칼리드는 입을 맞추면서도 한 손으로는 벨리아의 목덜미를 붙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등 뒤의 단추를 풀어내었다.
피로연에서 입은 옷이라 웨딩드레스처럼 안에 이것저것 껴입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그럼에도 덧대어진 천이 여러 겹이었다.
‘쯧. 다 뜯어버릴 수도 없고.’
마음 같아서는 죄다 잡아 뜯어 벗겨버리고 싶었다.
“후우…….”
칼리드는 심호흡을 하며 자신을 진정시켰다.
다정하게. 다정하게…….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그 소리를 외며 손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툭.
이윽고 벨리아의 겉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옷이 바닥에 떨어지며 나는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들렸다.
벨리아는 잠시 고조되는 분위기를 멈추고 싶었다.
온몸에 홧홧하게 오르는 열기로 이미 양 볼이 발그스름하게 붉어진 채였다. 이대로 분위기에 휩쓸린다면 더는 이성을 붙잡고 있기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등 뒤는 벽으로 막혔고 앞은 칼리드가 꼼짝도 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
키가 큰 그와 입을 맞추기 위해서 벨리아는 까치발을 들며 버텼지만 이젠 한계였다.
평소엔 칼리드가 허리를 붙잡아 주었는데.
지금은 그 손으로 단추를 푸느라 오롯이 벨리아 혼자 힘으로 서 있으려니 다리가 덜덜 떨려왔다.
“힘들어?”
그것을 눈치챈 칼리드가 바삐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벨리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가볍게 촉, 입을 맞췄다 떨어져 그녀를 번쩍 들어 안았다.
칼리드는 저벅저벅 침대로 다가가 벨리아를 가볍게 눕혔다. 침대에 내려놓는 손길이 무척 다정했다.
그의 손이 이마에서 뺨을 지나 붉어진 입술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로니카 왕국에선 결혼할 때 선언문을 낭독한다지?”
제 얼굴을 지분거리는 그의 손길을 받아내던 벨리아가 그 말에 눈을 깜빡 감았다 떴다.
갑자기 왜 이 이야기를 꺼내는 거지?
생뚱맞은 이야기라 어리둥절했다.
눈꺼풀 속으로 잠시 사라졌다 나타나는 보라색의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던 칼리드가 다시 얼굴을 내려 벨리아의 눈가에 쪽쪽 입을 맞췄다.
“제국과 로니카의 결혼 풍습이 달라 아쉬웠겠어.”
“……괜찮, 읏.”
칼리드는 그녀의 대답을 다 듣기도 전, 벨리아의 목에 붉은 자국이 남을 정도로 입을 맞췄다.
그 행위는 영역을 표시하는 것처럼 집요했다.
울긋불긋한 흔적들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칼리드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게다가 그사이에 그녀의 옷도 하나 더 풀어 헤쳤다.
“벨리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벨리아가 감았던 눈을 뜨곤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이 지나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돼.”
애초에 그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칼리드가 저렇게 말하자 마음이 이상하게 가라앉는다.
그가 자신을 더 욕심내길 바랐다.
이처럼 자신의 의사를 묻는 것이 아닌, 이미 그렇게 되었다고 단정 지어 말해주길 바랐다.
‘……비겁해, 벨리아.’
사실 이런 생각조차 우스웠다.
칼리드가 자신에게 안달내도록 일부러 계속 여지를 남겨두었으면서.
그의 마음을 안심시켜주겠다고 말하면서도 단 한 번도 제 마음을 모두 드러내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렇게 진심을 내보이는 게 무서워서 도망친 주제에.
그가 라울과 다르다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그 손톱만큼 작은 마음이 벨리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도 진심을 배신하는 사람일까 봐.
사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버린 기억은 이토록 끔찍하리만큼 오랫동안 따라다녔다.
벨리아는 초조하게 자신에게 시선을 맞추고 있는 칼리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젠 내가 먼저 손을 뻗어야 해.’
그가 없으면 더는 버틸 수 없는 건 벨리아였다.
그는 벨리아에겐 빛이었고 구원이었으니까.
소극적이던 벨리아의 표정이 변했다. 입가엔 은은한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제가 만약 없던 일로 하자고 하면 어쩌려고 그런 질문을 꺼내는 거죠?”
그 물음에 칼리드가 이를 악물었다.
“……그딴 소린 꺼낼 생각도 하지 마.”
“그런데 왜 물어봐요.”
애초에 들어줄 생각도 없었으면서.
눈을 흘기며 묻는 벨리아의 물음에 칼리드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기억하고 있으라고.”
무엇을?
의아해하는 벨리아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던 칼리드가 말했다.
“그대의 곁에 있는 게 나라는 사실을.”
탐욕이 가득한 그의 대답에 벨리아는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그래. 이렇게 계속 욕심을 내.
감히 당신의 마음이 변할까 불안해 할 수도 없게끔.
“당신도 돌이킬 수 없게 돼요. 괜찮나요?”
벨리아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꺼내 보았다.
그러자 칼리드가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벨리아의 목을 바라보며 그곳에 자신이 남긴 자국을 손으로 느리게 어루만졌다.
벨리아의 몸에 자신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운 것처럼.
칼리드는 배부른 맹수와도 같은 표정으로 벨리아와 시선을 맞췄다.
“내가 그대에게 돌이킬 수 없다는 얘기를 꺼낸 건.”
칼리드가 시원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내게 다른 여자가 생기면 떠나겠다는 헛소리를 할 생각은 애초에 접으란 소리야.”
벨리아가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를 처음 만났던 날 그런 말을 했었다. 그것도 자신의 입으로 직접.
‘……안 돼.’
놓칠 수 없다.
놓을 수 없다.
처음엔 분명 그럴 마음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벨리아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 칼리드가 잔뜩 놀란 표정의 벨리아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아까 로니카에서 하던 선언문에 대해서 얘기를 꺼냈던 거 기억해?”
갑작스러운 물음이었지만 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한 이야기이지 않나.
“그 선언문에선 언제나 부부가 될 연인이 사랑을 맹세하더군.”
맞다. 로니카 왕국은 제국과 다르게 신관이 축복을 내리기 직전, 서로의 사랑이 영원함을 맹세하는 선언문을 낭독한다.
하지만 그것은 정략결혼이 대부분인 귀족 사회에선 그다지 의미 없는 일이었다. 왕족은 더더욱 그랬다.
“벨리아.”
칼리드가 벨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사랑스럽고도 애틋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듯.
녹아내릴 듯 달콤한 목소리였다.
“그대와 평생을 함께할 것을 신께 맹세해.”
로니카에서 결혼하는 연인들이 낭독하는 선언문에 늘 적혀 있던 뻔한 문구였다. 우습게도 그 뻔한 문구는 결혼의 신성함을 가장 대표적으로 표현하는 말이기도 해 벨리아는 내심 낭만적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제국의 황자와 결혼을 결심하던 순간부터 벨리아는 자신이 이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고이 접었었다.
‘그랬는데…….’
칼리드가 맹세를 입에 담는 순간, 벨리아는 기쁘고 감격스러우면서도 왜인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칼리…….”
겨우 입술을 떼어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찰나.
칼리드가 가볍게 입을 맞추며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러더니 벨리아가 감히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내었다.
“사랑해.”
세상이 멈춘 기분이었다.
벨리아는 놀라서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바, 방금 뭐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 벨리아를 똑바로 응시하던 칼리드가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사랑해, 벨리아.”
또르르.
벨리아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뺨을 타고 툭, 떨어져 내렸다.
코가 시큰거렸다. 엉엉, 소리를 내어 울고 싶었다.
하지만 벨리아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표정도 찡그리지 못한 채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릴 뿐이었다.
“사랑해.”
칼리드가 그렇게 말하며 벨리아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그러곤 조심스러운 손길로 흘린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내 촉촉하게 젖은 벨리아의 눈동자가 칼리드를 향했다.
“……안아줘요.”
벨리아가 눈물의 흔적이 가득한 얼굴을 애써 웃어보이며 말했다.
“오늘 우리 첫날밤이잖아요.”
칼리드가 그 말에 눈을 사르르 접으며 미소 지었다.
“그래. 첫날밤이지. 그러니 이젠 첫날밤에 할 일을 해볼까?”
칼리드의 도발적인 말에 벨리아가 배시시 웃으며 그의 목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그러곤 상체를 들어 칼리드에게 깊게 입을 맞췄다.
마치 이게 시작이라는 듯. 끈적한 감정이 그대로 녹아내리는 키스였다.
“칼리드…….”
벨리아가 칼리드를 보채듯 불렀다.
유난히 그가 약한 어투였다.
칼리드의 눈빛이 순식간에 사납게 변했다.
“하, 벨리아. 이건 그대가 자초한 거야. 알지?”
칼리드는 더는 거리낄 게 없다는 듯, 다급하게 벨리아의 숨을 삼켰다.
그녀의 숨이 뜨겁고도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