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테사 공작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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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테사 공작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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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테사 공작의 목적
2023.08.26.
단상 위에서 지켜보던 황제와 황후, 황비는 모두 이미 돌아간 뒤였고, 피로연의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 갔다.
벨리아와 칼리드는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는 것을 피해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작은 휴게실에 도착하자 테사 공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일부러 이렇게 자리를 만드는 것을 보면, 제게 할 말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이전 삶에서의 테사 공작가는 스러져가는 가문으로, 이미 기세가 등등한 1황자에 밀려 저무는 세력이었다.
황후가 죽고 라울이 황태자로 임명되면서 제국의 권력 구도는 완전히 1황자 쪽으로 기울었다.
그 이후 테사 공작은 원래도 영지에서 잘 나오지 않았지만, 그 이후엔 더더욱 영지에 박혀 수도에는 거의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자주 보진 못했으나, 마주칠 때마다 언제나 정중한 태도였다는 건 벨리아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래도 사사로이 제 남편의 외할아버님이 되는데, 그동안 인사 한번 못 드린 것 같군요.”
벨리아는 이야기를 나누기에 앞서, 그와 자신의 관계가 무척 가깝다는 것을 강조했다.
“하하. 제게는 그리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테사 공작은 정중히 그녀에게 거리를 두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칼리드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리 까탈스럽게 굴어서 기분이 나아지나?”
“하하. 까탈스럽다니요.”
“빤히 다 알면서 왜 사람을 떠보지?”
칼리드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타박하자 공작이 칼리드에게 질문했다.
“비전하께서는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대부분.”
칼리드의 대답에 테사 공작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내가 가장 믿고 있는 두 사람이니, 너무 그리 날을 세우진 마.”
하지만 그의 말에도 벨리아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이었다.
어째서 지난 삶에서 그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지? 칼리드가 황위를 원하지 않아서?
모든 의심은 일단 거기에서 시작했다. 칼리드가 싸우지도 않고 그대로 패배를 인정했기에, 그의 주변의 인물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때 테사 공작은 무엇을 하였나.
그리고 북부의 에링턴 공작은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카프리에 후작은 왜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지?
하나둘 칼리드의 사람들이 밝혀지면서 벨리아의 마음은 점점 더 복잡해져 갔다.
‘그때와 달라진 게 너무 많아. 이젠 내가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많아졌어.’
칼리드가 테사 공작을 믿고 있다.
하지만 테사 공작은 끝까지 칼리드에게 신의를 지켰는가?
그 점을 알 수 없으니 답답했다.
‘그리고 가장 화가 나는 건…….’
그 당시의 칼리드에 대해서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벨리아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대체 그때의 칼리드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던 걸까.
분명 의심스러운 움직임이 있기는 했다. 그래서 라울에게 칼리드를 조심하라고 얘기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그대로 동부의 영지에 머물렀던 건지…….
“벨리아. 공작은 나를 그다지 황자처럼 대해주진 않지만, 그래도 배신할 사람은 아니야.”
결국 벨리아는 한숨을 내쉬곤 결국 본론을 꺼냈다.
“……솔직히 공작께서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목적 뒤에 숨겨진 공작의 저의를 확인하고 싶었다.
벨리아의 차가운 목소리에 테사 공작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전하께서 저를 의심하는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 또한 그러하였으니까요.”
아직은 서로를 신뢰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칼리드의 말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곳은 만약의 상황조차 만들 수 없는 치열한 전장이었으니까. 그래서 확인이 필요했다.
테사 공작이 얼굴에 가득 머금고 있던 미소를 거뒀다.
“제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는 형형한 눈빛으로 벨리아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평온한 죽음을 맞지 않길 바랍니다.”
“……위험한 발언이군요.”
벨리아의 미간이 슬며시 찌푸려졌다.
함부로 꺼낼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제가 원하는 것과도 비슷해요.”
벨리아도 라울이 처절하게 무너지고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고 싶었으니까.
누군가를 파멸시키기 위해 움직인다는 건 어찌 보면 부정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분노는 누군가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저는 원래 칼리드 전하가 가져야 했던 것을 모두 되찾아 줄 생각이에요.”
벨리아의 말에 칼리드가 씨익 웃으며 동조했다.
“뭐, 나의 비가 그렇다니 나도 협력할 수밖에.”
“사이가 좋아 보여 보기 좋습니다.”
테사 공작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러곤 허망한 시선을 창밖으로 돌린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딸은 황후가 되어 황궁에 들어와 버려진 인형처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황제는 그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고 있지 않지요. 그런 제 딸을 보며 부모 된 마음으로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손자에 대한 사랑도 분명히 있었으나 테사 공작은 자신의 손으로 황궁에 떠나보낸 딸에 대한 자책감이 훨씬 컸다.
그 오랜 시간을 황후궁에서 자신을 스스로 가두고 살아온 딸의 얼굴을 보았을 때, 테사 공작은 끓어오르는 살심을 누르기가 힘들었다.
황제는 뻔뻔하게도 곁에 있던 그 계집과 시시덕거리느라 바빠, 자신이 황궁에 와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이젠 황제에게 테사 공작가가 필요 없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것조차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걸까.
예전엔 그나마 시늉이라도 하던 행동조차 이젠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제가 자주 수도에 왔었어야 했나, 자꾸만 매 순간이 후회되더군요.”
그랬다면 조금이라도 황제가 황후의 눈치를 봤을까 싶어서.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언젠가 황제에게 돌려주리라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다 문득 황제가 사랑하는 아들 라울이 아닌, 자신의 딸의 아이인 칼리드를 황제로 만드는 게 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복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럴 리가요.”
벨리아가 코웃음을 쳤다.
“그럴 만한 이성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황후 폐하를 방치하지도 않았겠지요.”
그 말에 테사 공작이 눈을 감고 잠시 침묵했다.
이내 고개를 들어 벨리아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훨씬 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제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벨리아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 공작에게 요청할 게 있어서 자리를 마련한 거예요.”
그리고 그 뒤를 이어받아 칼리드가 말했다.
“에링턴 대공과 협력해서 황궁 쪽을 향해 방어선을 구축해 줬으면 해.”
그렇게만 된다면 혹여 황궁에 병력을 밀고 들어갈 상황이 왔을 때 뒤에서 든든하게 지원해줄 수 있는 기지가 만들어질 것이다.
물론 1황자 측에 들키지 않도록 아주 조금씩 이동해야겠지만, 이건 앞으로의 일을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병사들이 이동하는 것을 그들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테사 공작은 고개를 흔들었다. 실질적으로 눈에 띄지 않고 이동하기란 어려웠다. 명분이 필요했다. 그때 벨리아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혹, 공작께선 작년에 제가 지은 진료소에 대해 들어보셨는지요.”
“그러고 보니 동북부를 중심으로 진료소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그곳에서는 치료 봉사도 이어가고 있고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물자를 보관하기도 하지요.”
거기까지 들은 테사 공작이 바로 이해했다는 듯 물었다.
“……진료소를 추가로 건설할 예정은 없으십니까? 동북부를 넘어 서부에도 진료소가 지어지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치료 봉사라니. 이런 뜻깊은 일에 꼭 후원하고 싶군요.”
폭설과 한파가 예상되는 지역에 우선적으로 진료소를 만들었기에, 아직 서부에는 진료소가 거의 지어지지 않았다.
현재 지어진 진료소는 제국민들 사이에서 무척이나 반응이 좋았고, 진료소가 지어지지 않은 지역에서는 자신들의 고향에도 진료소가 지어지기를 소망했다.
그렇기에 테사 공작의 지원을 받아 서부에 진료소를 추가로 건설하는 건 결코 의심스러운 행보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건설을 지원한다는 목적하에 공작령의 병사들을 위장해 옮겨둘 수도 있고, 진료소의 지하창고에 비밀리에 병장기 등의 물자를 보관할 수도 있을 테니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공작가의 후원이 있다면 무척 기쁠 것 같네요. 시기는…….”
최대한 빠를수록 좋겠군요.
벨리아가 미소 지었다.
“그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조금 더 고안해봐야겠지만, 방법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테사 공작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벨리아를 지긋이 바라보다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제게 바라는 것은 그것이 전부입니까?”
다시 묻는 그의 물음에 벨리아가 쉬이 입을 떼지 못했다.
테사 공작에게 바라는 것이라…….
사실 그리 거창한 건 아니었다. 그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칼리드를 배신하지 마세요.”
그에게 바라는 것은.
사실 이것 하나뿐이었다.
* * *
피로연은 점점 분위기가 고조되어갔다.
테사 공작을 돌려보내고 난 후, 벨리아와 칼리드는 2층 난간에 기대어 연회장을 함께 바라보았다. 다들 표정이 밝았다.
라울과 엘린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고 1황자 편에 서 있는 귀족들도 대다수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러니 지금 남아 있는 자들은 중립을 지키는 자들. 그리고 벨리아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자들. 모두 예상한 일이었다.
“어때요?”
“이들을 전부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하군.”
칼리드가 괜히 앓는 소리를 꺼냈다.
그에 벨리아가 피식 웃으며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인 거 티 나요, 칼리드.”
“그런가?”
칼리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채워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들. 칼리드는 자신이 주인공인 행사에서 이런 따뜻한 분위기가 이어졌던 적이 있었나, 잠시 떠올려 보았다.
……단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칼리드가 주인공인 파티가 거의 없기도 했지만, 있더라도 대부분은 라울에게 다가가 그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을 할 뿐이었다.
‘벨리아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바뀌었나.’
꾸준히 느끼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니 새삼스럽다는 감정이 들고 만다.
“내기할까?”
칼리드가 벨리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무슨 내기요?”
의아한 표정의 벨리아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사람들을 향해 돌렸다.
“저들이 우리 편이 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어쩐지 악당 같은 표정이었다.
벨리아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지긋이 시선을 맞췄다. 그러곤 자신만만하다는 듯 웃음 지었다.
“으음. 그럼 제가 이길 텐데요?”
“과연 그럴까?”
둘은 서로를 바라본 채로 씨익, 짙게 미소를 짓는다.
그들의 표정은 어딘가 닮아 있었다.
칼리드는 들고 있던 잔을 곁에 있던 테이블에 내려놓고 자유로워진 손으로 벨리아의 허리를 붙잡았다.
“어?”
그러고는 놀란 벨리아를 보며 즐거운 표정으로 슬쩍 자신에게 밀착시켜 끌어당겼다.
“그보다, 벨리아.”
그의 목소리가 은근하게 귓가에 울렸다.
“오늘 우리 첫날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