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적과 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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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적과 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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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적과 아군
2023.08.22.
벨리아는 붉은색이 감도는 짙은 색상의 드레스로 갈아입고 연회장에 나타났다.
낮에 보았던 청초한 신부의 모습과 확연히 대비되는 그 모습에 사람들이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늘 깨끗하고 순수한 이미지였던 벨리아가 고혹적인 분위기로 나타나자 다들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라울도 마찬가지였다.
‘벨리아……!’
참을 수 없는 욕망이 치솟았다. 하지만 이곳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라울은 익숙하게 자신의 감정을 갈무리해 숨겼다.
“세상에. 벨리아 공주님 좀 봐요.”
“정말 너무 아름다우시네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공주님께선 성품이 무척 훌륭하시잖아요.”
귀부인들 사이에서 벨리아를 칭찬하는 소리가 하나둘 들려왔다.
그리고 그 찬사들은 엘린의 귀에도 들렸다.
벨리아가 미웠다. 주체할 수 없이 질투 났다.
엘린은 자신이 이런 감정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늘 모두의 중심에서 관심을 받기만 하다가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에게 밀려나는 것은 무척 불쾌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벨리아 공주를 마음에 품고 여전히 잊지 못했다.
‘……정말 싫어. 너무 싫어.’
벨리아가 환하게 웃으면 웃을수록 엘린은 점점 기분이 가라앉았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눠야겠어.’
단단히 뒤틀린 마음을 돌이킬 수가 없었다.
그때 라울이 엘린의 어깨를 슬쩍 감싸며 말을 걸었다.
“엘린. 우리도 오늘의 주인공들을 축하하러 가볼까요?”
그가 엘린에게 팔을 내밀었다.
그 행동을 멍하니 바라보던 엘린이 이내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
“……네. 전하.”
벨리아와 칼리드는 피로연장에 들어오자마자 단상 위에 있는 황제와 황후, 황비를 향해 다가갔다.
“오오. 이젠 공주가 아니라 황자비라 불러야겠지?”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들을 맞이했다.
“폐하의 은혜로 결혼식을 잘 마치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하하. 아니다. 어쩜 우리 황자비는 말도 이리 어여쁘게 하는지 모르겠군.”
황제는 과장된 몸짓으로 벨리아를 칭찬했다.
대신관이 제국에 올 수 있었던 것이 모두 벨리아 때문임을 알기에, 최근 황제는 벨리아를 볼 때마다 함박웃음을 짓곤 했다.
자신의 명성을 드높여줄 역사를 벨리아가 만들어주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벨리아는 그런 황제를 보고 미소 짓다 몸을 슬쩍 돌려 황후를 향해 인사를 건네었다.
“황후 폐하.”
그날 이후로 처음 마주하는 것이었다.
황후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히 해독제가 효과가 있는지, 위험한 수준은 아니었다.
“……이런 자리에 왜 나를 불렀느냐.”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풀풀 풍기며 황후가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불편하실 줄은 압니다만, 그래도 꼭 황후 폐하께서 지켜봐 주셨으면 했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황후의 타박에도 벨리아는 그저 웃었다.
저것이 진심이 아님을 알기에.
칼리드는 그런 황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결국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차후에 찾아뵙겠습니다, 황후 폐하.”
“……오지 마라. 귀찮기만 하다.”
“그래도 이젠 황실의 가족이 되었으니 정식으로 인사를 하러 가는 게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벨리아가 황후의 거절에도 방실방실 웃으며 그리 말하자, 결국 황후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 대화로도 충분했다. 이것으로 다시 황후를 만나러 갈 공공연한 구실이 생겼다.
그들은 황후를 만나러 가는 자신들을 의심하면서도 그 앞길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후 그들은 황비에게도 가벼운 인사치레를 건네었다.
하지만 확연히 황제와 황후에게 건네는 인사와는 차이가 있었다.
황후가 있는 자리에서 황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다들 이 모습을 보고 있겠지.’
그래. 모두 똑똑히 기억해 둬.
여전히 황후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음을.
벨리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후 칼리드와 벨리아는 몸을 돌려 단상의 중앙에 멈춰 섰다.
“우리의 결혼식에 찾아와 준 모든 분께 감사를 표하며, 부디 즐거운 연회가 되길 바랍니다.”
칼리드가 모두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당당하고 깔끔한 태도였다.
분명 이런 주목받는 자리에서 인사말을 꺼내는 것은 늘 라울이었다.
그래서 칼리드가 좌중을 향해 잔을 들어 올릴 때는 어색한 기분이 들기도 했으나, 그의 태도가 무척 자연스러워 그런 기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음악이 바뀌었다.
벨리아와 칼리드는 융단이 깔린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이윽고 홀 중앙에 다다르고, 둘은 손을 맞잡았다. 칼리드의 한 손은 벨리아의 허리를 감쌌다.
“후우…….”
벨리아가 숨을 내쉬자 칼리드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긴장돼?”
“그럼요. 이 춤이 끝나면 시작이잖아요.”
이들은 우아한 선율에 맞춰 능숙하게 춤을 췄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잠시 후에 테사 공작과 인사도 나눠야 하고요.”
그렇게 말하며 벨리아가 빙그르르 돌았다.
그녀가 입은 붉은 드레스가 춤을 출 때마다 촤르륵, 퍼졌다 접히기를 반복했다.
“할아버님이라면 그대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실 것 같은데.”
“모를 일이죠.”
테사 공작이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직접 확인하기 전까진, 그 무엇도 섣불리 단정할 수 없었다.
“벨리아.”
“네?”
“라울이 이쪽을 보고 있어.”
칼리드가 벨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니 더 행복하게 웃어봐. 놈의 속 좀 뒤집어 놓게.”
벨리아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말이 진심임을 알아서 더욱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둘의 얼굴엔 연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 예쁜 연인의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얼굴에도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음악 한 곡이 끝나고 벨리아와 칼리드가 연회장의 가장자리로 나왔다.
“칼리드.”
그들에게 라울이 엘린과 함께 다가왔다.
“결혼을 축하한다.”
“……뭐, 그래.”
진심은 전혀 느껴지지 않지만.
칼리드가 이런 속마음을 숨기며 미소를 꾸며내었다.
“형님도 가을에 결혼식이 있으니 우리의 결혼식을 보면서 기분이 싱숭생숭했겠어.”
다분히 여러 의미를 담고 던진 말이었다.
“하하. 뭐, 결혼을 앞두면 누구든 마음이 묘해지니 이상할 것도 없지.”
하지만 라울은 여유롭게 받아쳤다.
“결혼 축하해요, 공주님.”
“고마워요. 칸테리프 공녀.”
엘린과 벨리아도 다정한 척 인사를 나눴다.
“오늘 무척 아름답군요.”
그때 라울이 벨리아를 바라보며 칭찬을 건네었다.
말 자체는 흔히 인사치레로 나누는 문장이었지만, 벨리아에겐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시선으로 자신을 볼 리가 없으니까. 진득하게 달라붙는 그의 시선에 벨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고마워요. 1황자 전하.”
“붉은색이 잘 어울려요.”
하지만 라울은 그치지 않고 벨리아에게 또다시 말을 걸었다.
“……그런가요?”
그와 더 나눌 말은 없었다.
잠시 그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축하는 고마워, 형님.”
칼리드가 씨익, 웃으며 벨리아의 어깨를 감싸 끌어안고는 말했다.
“우린 인사할 사람들이 많아서.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지.”
그렇게 몸을 돌려 다시 사람들의 인파 속으로 들어가는 칼리드와 벨리아를 바라보며 라울이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엘린에게 다정하게 물었다.
“우리도 이만 자리를 옮길까요?”
그러나 엘린의 표정이 좋지 못하단 것을 확인한 라울이 슬쩍 그녀의 뺨을 감싸 가까이 다가갔다.
“엘린? 혹시 몸이 안 좋은가요?”
라울은 햇살처럼 밝게 웃으며 엘린과 눈을 마주쳤다.
“몸이 좋지 않다면 말해요. 그대가 아프게 둘 순 없으니까.”
“전하…….”
엘린이 그의 말에 작게 감동하려는데, 라울이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가볍게 엘린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에 놀라 히끅! 딸꾹질하는 엘린을 보며 라울이 눈을 반달로 접고 말했다.
“그럼 이만 칸테리프 공작에게 가죠.”
“……네, 네에!”
그녀의 대답을 들은 라울이 엘린의 손을 단단히 붙잡고 앞장서서 공작이 있을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의 표정은 아까의 다정함과 따스함은 찾아볼 수 없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 * *
“공주님! 아니……! 황자비 전하!”
칼리드와 함께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와 벨리아를 불렀다.
레이첼이었다.
“정말 축하드려요!”
상기된 표정으로 다가온 레이첼이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오늘 정말 너무너무 아름다우셨어요!”
양 볼을 감싸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레이첼의 곁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머리를 한 손으로 꾹 눌렀다.
“레이첼. 전하께서 곤란해하시잖니.”
“아. 그렇지! 공, 아니 비전하! 여긴 제 둘째 오라버니예요.”
레이첼의 옆으로 키가 무척 큰 한 남자가 정중히 예법에 맞춰 인사를 해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로커스 카프리에입니다. 중앙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칼리드는 이미 그와 잘 아는 사이인지 별다른 인사를 하지 않았다.
“어머, 반가워요. 로커스 경.”
“이리 인사를 나눌 수 있어 영광입니다.”
통통 튀는 레이첼과 다르게 무척 차분한 느낌이었다. 기사라기보다는 학자의 느낌에 훨씬 더 가까웠다.
그런 상반되는 모습이 신기해 벨리아가 그를 흥미롭게 바라보자, 칼리드가 슬쩍 그녀의 시야를 가리며 로커스에게 말을 걸었다.
“여긴 어쩐 일로 왔지?”
“그야……. 당연히 전하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서 왔겠죠?”
“헛소리하지 말고.”
그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무척 능청스럽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칼리드는 익숙한지 자연스럽게 그의 말을 잘랐다.
“하하하. 또 왜 그리 날을 세우십니까. 좋은 날인데.”
“난 네 그런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그들이 투닥투닥 말다툼을 하는 사이, 벨리아는 레이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잘 지냈어요?”
“그럼요!”
레이첼이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벨리아는 입 모양이 보이지 않도록 입가에 샴페인 잔을 가져다 대곤 작은 소리로 물었다.
“……제가 부탁한 건 어느 정도 진행됐나요?”
레이첼은 그 물음에 눈을 빛내곤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인다. 무척이나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예상보다도 빨리 마무리될 것 같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 그런데…….”
레이첼이 말을 하다 멈췄다. 그러더니 흐뭇하게 웃으며 묻는다.
“결혼식 당일까지 일 얘기 하시려고요?”
“……시간이 없잖아요.”
벨리아가 부끄럽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후후. 나중에 자료 확인하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그녀의 호들갑에 벨리아가 씨익 웃었다.
레이첼이 벨리아의 일을 돕기 시작한 이후, 카프리에 후작은 자식들에게 자신이 2황자의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레이첼은 벨리아의 자선 사업과 관련된 일 이외에도 최근엔 조금 더 은밀한 일까지 수행하고 있었다.
‘……칸테리프 공작에게 큰 선물을 줄 때가 됐어.’
이대로 라울의 힘이 계속 커지게 둘 수는 없으니까.
벨리아가 재밌다는 듯 미소 지었다.
“자료는 잘 보관하고 있도록 해요. 차후 결혼식 일정이 모두 끝나면 다시 이야기하죠.”
레이첼과는 그때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면 될 것이다.
그렇게 미래에 대해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큰 키에 몸집이 다부진, 인상이 무척 강인해 보이는 자가 이들에게 저벅저벅 다가왔다.
“칼리드 전하. 오랜만입니다.”
“……할아버님.”
서부 귀족 연합의 수장이자 칼리드의 외할아버지인 테사 공작이었다.
과연 그는 칼리드에게 적일까, 아군일까.
벨리아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