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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어쩌면 (84/88)


#84. 어쩌면
2023.08.19.


벨리아와 칼리드의 결혼식은 두 주인공의 입맞춤으로 화려한 시작을 알린 뒤, 예법에 맞게 차례대로 절차가 진행되었다.

결혼식장 한쪽에는 오랜 기간을 자신의 궁에서 나오지 않았던 황후도 모습을 드러내 자리를 지켰다. 그녀가 황제의 손을 붙잡고 함께 등장했을 때 엄청난 술렁임이 일었다.

음모론이긴 했지만, 실제론 황후가 죽었는데 그 사실을 황제가 숨기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으니, 그녀가 이 자리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킬지는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쓸데없는 행동을 할 생각이라면 지금 접어두는 게 좋을 거요, 황후.”

“…….”

황후는 황제와 나눌 이야기가 없다는 듯 그 어떤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고수했다.

그러곤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에 가 앉아 말없이 칼리드를 바라볼 뿐이었다.


“황후 폐하께서 본격적으로 사교계에 나오시는 건가?”

“에이, 설마…….”

많은 의견이 오갔지만, 그들의 의문을 풀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추측들만 난무할 무렵, 벨리아의 할아버지이자 신국에서 온 대신관이 오늘 결혼하는 연인을 축복하기 위해 단상에 올랐다.


“저는 언제나 사심을 배제하고, 주신께서 굽어 살펴주시는 모든 만물을 위해 기도해왔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만큼은, 저의 사적인 욕심을 담아 그들만을 위한 기도를 전하고 싶군요.”

대신관이 따스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제 진심은 주신께 닿으리라 믿기에, 그저 조용히 기도를 올리겠습니다.”

그러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단순한 행위였지만 대신관의 모습에서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인 힘이 느껴졌다.

장엄한 그 모습에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정적을 지켰다.

대신관은 무어라 중얼거리며 기도를 이어갔다.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밝은 빛이 하나둘 퐁퐁,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얼마간 그 빛무리가 생기는 것을 지켜보았을까.


“주신께서는 기꺼이 이들의 미래를 축복할 것입니다.”

대신관이 밝게 미소 지으며 양손을 살짝 위로 올렸다가 내렸다. 그러자 사라졌던 빛무리들이 빠른 속도로 다시 나타나더니 벨리아와 칼리드의 주변을 빙그르르 돌았다.
  

 
그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광경에 하객으로 온 모두는 입을 벌린 채 감탄을 내뱉었다.

그것은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경이롭다는 표정으로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여태 많은 결혼식을 지켜봤었지만, 신관이 축복을 내릴 때 이토록 밝은 빛을 뿜어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대신관이라는 이름이 괜히 있는 게 아닌 듯 엄청난 신성력으로 결혼식장을 환하게 밝혔다.


“와아.”

“정말 아름다워요.”

다들 멍하니 빛이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그 모든 빛이 사그라들었을 때, 그들은 벨리아와 칼리드의 몸에서 은은한 기운이 서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둘에게는 주신의 영롱한 빛이 깃들었습니다. 분명 함께 걸어가는 미래에는 고된 일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신관은 늘 가지고 다니는 다섯 성물 중 하나인 작은 지팡이를 품에서 꺼내었다.


“주신의 세 번째 종, 레히신. 이들의 증인이 되어, 주신의 이름 앞에 감히 선언합니다. 이들의 앞날엔 축복만 가득할 것을.”

대신관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떨떠름하게 웃으며 앉아 있는 자들도 있었다. 특히 황비의 표정이 무척 어두웠다.

이들의 결혼식이 이렇게 관심을 받고 회자될수록 가을에 있을 1황자의 결혼식이 볼품없어질 테니까.


‘로니카 공주라는 위치가 생각보다 더 대단했어.’

처음에는 그저 소국의 공주라고만 생각했다.

연합국처럼 아주 작은 왕국은 아니지만 어쨌든 로니카 또한 왕국이었고 제국에 비한다면 무척 작은 나라가 아닌가.

황제가 워낙 로니카를 신경 쓰길래 조금 알아보긴 했지만, 황비는 벨리아가 자신들에게 별 위협이 되진 않는다고 여겼다.

아무리 로니카의 공주가 대신관의 손녀라고 해도, 신국은 워낙 폐쇄적인 곳이고 타국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게 지금까지의 불문율이었으니까. 그래서 황비는 대신관이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었다.


‘그런데 고작 제 손녀의 결혼식을 위해 신국을 벗어날 정도였다니……!’

뼈 아픈 실수였다.

황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웃는 낯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입꼬리가 떨리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겨우 결혼할 여자 하나 때문에 2황자의 위상이 이렇게나 달라지다니.

절로 이가 갈렸다.


‘끝까지 라울이 공주와 약혼할 수 있도록 황제에게 밀어붙였어야 했는데……!’

칸테리프 공작가와 이어주겠다는 황제의 말에 그대로 수긍한 게 잘못이었다.

그때 황제가 그녀를 향해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황비. 너무 마음 쓰지 마시오. 내 1황자의 결혼식엔 이보다도 훨씬 성대하고 화려하게 준비하라 일러둘 테니.”

“제 부족한 마음마저 헤아려주시다니……. 폐하께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니오. 충분히 이해하오.”

황비는 곁에 황후가 앉아 있음에도 그녀를 완벽하게 무시하며 황제의 어깨에 슬며시 머리를 기대었다.

황후는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럼. 맹세를.”

대신관의 말에 벨리아와 칼리드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곤 대신관이 건네주는 정화수를 각자 입에 머금고 입을 맞췄다.

이것으로 모든 절차가 끝났다.


“이로써 둘이 부부가 되었음을, 주신 앞에 선포합니다.”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후 벨리아와 칼리드는 자리를 옮겨 그들을 위해 마련된 마차에 올라탔다.

사방이 막혀 있어 외부에서 안을 볼 수 없게 만든 마차가 아닌, 벽면이 없어 어디에서도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마차였다.

이는 황족들이 수도를 한 바퀴 돌며 제국민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하기 위한 것으로, 보통 결혼식에 많이 사용되곤 했다.

칼리드가 먼저 마차에 올라탄 후 벨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벨리아는 그 손을 붙잡아 마차에 올랐다. 내부에는 폭신한 모피가 깔려 있어 날이 제법 쌀쌀했음에도 그리 춥지 않도록 해둔 게 눈에 띄었다.


“고생했어.”

칼리드가 작은 목소리로 벨리아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벨리아가 씨익 웃으며 답했다.


“당신이야말로 고생했어요.”

시작하자마자 입을 맞춰오길래 조금 걱정했는데 나름 잘 참아낸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결혼식에서 그러면 어떡해요!”

벨리아가 소곤거리며 그를 타박했다.

그러나 칼리드는 당당했다.


“그대가 너무 예뻐서 어쩔 수가 없었어. 그러게 내가 미리 드레스 입은 모습을 보여달라고 했잖아. 그럼 단련이 되었을 테니 이런 일이 없었겠지.”

그의 뻔뻔한 대답에 벨리아가 눈을 흘겼다.


“신부의 드레스를 미리 보겠다는 신랑이 어디 있어요!”

“하하. 그렇게 말하며 보여주질 않으니까 내가 보자마자 키스를 할 수밖에 없었겠지?”

“합리화하지 말아요, 칼리드.”

말과는 달리 벨리아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그의 행동에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어쨌든. 무사히 식은 끝났잖아.”

“맞아요. 식은 끝났죠.”

가장 간단하고 쉬운 행사 하나가 끝났을 뿐이다.

이제 수도를 한 바퀴 돌며 그들의 결혼을 축하하는 제국민들에게 인사를 할 것이다. 그러고는 다시 황궁으로 돌아와 피로연을 참가할 예정이었다.

그곳에서부턴 다시 전쟁터였다.

마차가 천천히 이동했다.

결혼식을 축하하러 와 준 사람들을 지나쳐, 황궁의 정문을 나섰다.

그들의 뒤로는 기사단이 도열해 함께 행진을 이어갔다.


“벨리아 공주님!”

“전하! 축하드려요!”

“공주님!”

길거리마다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어떤 이들은 직접 준비한 꽃잎을 뿌리기도 했다.

어쩐지 감격스러웠다.

벨리아는 손을 흔들며 그들의 얼굴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한 명 한 명 눈을 맞췄다.

그들 중에는 벨리아가 후원하는 보육원의 아이들도 있었고, 예술가도 있었다.

거기다 치료사부터, 한 번씩 진료소를 둘러볼 때 마주쳤던 환자들까지도 손수건을 흔들며 그녀를 향해 축하의 말들을 건넸다.


“공주님! 행복하세요!”

행복하라는 그 말이 귀에 꽂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도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잘못되진 않았어.’

벨리아는 그들의 축복을 받으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칼리드가 제게 말했던 것처럼 그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애정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벨리아. 이 모든 이들이 그대의 뒤를 받쳐줄 거야.”

제국의 아래에서 위로 향하리라는 첫 다짐처럼.

이미 기반은 단단히 다져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대는 걱정하지 말고 앞만 보고 가면 돼.”

칼리드는 벨리아의 손을 꼭 붙잡았다.

벨리아는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모두를 바라보았다.

그래, 어쩌면.

그저 끔찍하기만 했던 잉고트 제국이 사랑스러워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수도를 한 바퀴 돌아 마차는 다시 황궁으로 향했다.

꽃으로 장식된 예쁜 마차를 바라보며 라울이 조소를 지었다.

칼리드와 벨리아는 행복해 보였다.


‘……행복이라.’

라울의 얼굴 위로 기묘한 그늘이 짙어졌다.

과연 저 행복이 얼마나 갈지.

그의 어둡고 혼탁한 눈빛이 벨리아를 향했다.

벨리아의 눈이 반쯤 접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칼리드를 붙잡고, 시선도 그를 향했다. 숨길 수 없는 애정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더 예뻐졌군. 전보다도 훨씬.’

그녀를 볼 때마다 갈증이 치밀었다.

갖지 못했기에 더 욕심이 생기는 걸까. 아니면 제 것을 빼앗긴 분노일까.

라울이 피식, 비소를 흘렸다. 그러곤 집요하게 그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바람에 흩날리는 사소한 모습까지도.


“전하. 이만 들어가요.”

꽃마차를 바라보며 불안한 눈빛을 하던 엘린이 조심스레 라울의 팔을 끌었다.

이제 연회가 시작될 것이다.

다른 귀족들은 모두 연회장에 들어갔는데, 이들만 테라스에 남아 칼리드와 벨리아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래야지요.”

하지만 라울은 시야에서 마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엘린은 초조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한동안 괜찮았는데.


“전하.”

엘린의 재촉에 그제야 라울이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엔 한없이 다정한 미소만 어려 있었다.

방금까지 싸늘하게 웃고 있었으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표정은 따뜻하기만 하다.


“미안하군요, 엘린.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럼 들어갈까요?”

라울이 부드럽게 엘린의 손을 붙잡았다.

* * *

결혼식에 참석했던 이들은 벨리아와 칼리드가 마차를 타고 수도를 돌며 제국민들을 만날 때, 미리 연회장에 들어와 피로연를 즐기고 있었다.

곧 주인공이 옷을 갈아입고 이곳에 등장할 것이다.


“어머, 폐하. 그게 정말인가요?”

“그럼.”

이 피로연에 황제와 황비는 그 무엇도 거들지 않았음에도, 뻔뻔하게 가장 높은 단상에 앉아 하하, 호호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옆에는 황후가 표정 없는 얼굴로 그저 의자에 앉아 아래를 내려보았다.

그렇게 음악이 흐르고 사람들이 우아하게 파티를 한창 즐기던 무렵.

오늘의 주인공이 도착했다는 외침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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