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 두 번째 결혼식 (83/88)


#83. 두 번째 결혼식
2023.08.15.



 
황제와의 만찬이 끝나고 온전히 가족들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었기에, 다 같이 2황자궁의 응접실에 모여 다과를 즐기기로 했다.


“할아버지!”

클로제가 대신관을 향해 우다다, 달려가 안겼다.


“어이쿠. 우리 꼬마가 많이 컸구나!”

클로제를 번쩍 들어 안아보던 대신관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원 얼굴 한 번 보기가 힘드니……. 어째 이리 볼 때마다 자라 있누.”

신국도 로니카 왕국도 아닌 잉고트 제국에서 이리 만나 안부를 묻는 상황이 우습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가족이라 벨리아도 슬쩍 기분이 들떴다.

제국에 올 때까지만 해도 자신과 칼리드의 결혼식이 이리 북적북적한 행사가 될 거라고는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었다.


‘아바마마도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정말로 온 가족이 모여 자신의 결혼식을 지켜볼 수 있었을 텐데.

물론 한 나라의 왕과 왕비 모두 자리를 비우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벨리아는 아쉬움을 꾹 삼켜내었다.


“오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아니다. 내 그래도 손녀의 결혼식은 와야 하지 않겠느냐.”

이전 삶에서 제 결혼식에 참석한 것은 클로제와 헤럴드뿐이었다.

그랬기에 어째서 어머니와 대신관인 할아버지가 결혼식에 참석하기로 결정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제가 열심히 노력한 행동들로 인해 변화한 상황이라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붕 들떴다.


“그럼 제 결혼식에도 오실 건가요?”

클로제가 발랄하게 물었다.

그러자 대신관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 물음에 곧바로 대답을 꺼내었다.


“물론이지. 헤럴드의 결혼식도, 클로제의 결혼식도 내가 반드시 참석해야지.”

그 긍정적인 대답에 헤럴드와 클로제 모두 방긋,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대신관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며 클로제를 놀렸다.


“그런데 우리 꼬마가 벌써 결혼 생각을 할 나이가 되었다니 이 할애비는 마음이 조금 슬프구나.”

“에이. 아직 그래도 몇 년은 남았는걸요!”

장난으로 던진 말이었으나 클로제가 웃으며 받아치자 대신관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곤 제 손녀를 바라보았다.


“잠깐! 설마 결혼하고 싶은 상대가 있다는 말이냐?”

클로제는 대답하지 않고선 그저 배시시 웃었다. 그에 벨리아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주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내려는 제 동생의 모습에 기가 막힐 뿐이었다.

티 내지 않고 얌전히 지내겠다고 이야기한 게 며칠 전이었는데!


“어머. 헤럴드. 이러다 두 번째 결혼도 빼앗기겠구나?”

“어마마마…….”

왕비가 그 모습을 지켜보다 슬쩍 농담을 던지자 헤럴드가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소소한 일상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낸 후, 벨리아가 왕비와 대신관을 모시고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그래서, 직접 살펴보니 어떠세요?”

벨리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이왕 대신관인 할아버지와 신녀였던 어머니가 제국의 황궁까지 왔으니 이곳의 삿된 기운들을 미리 확인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대신관은 벨리아가 무슨 의미를 담아 묻는 것인지 곧바로 눈치채곤 침음을 흘렸다.

어쩐지 반응을 보니 썩 좋은 얘기가 나올 것 같진 않았기에 벨리아는 작게 심호흡하곤 이야기를 들을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좋지 않다.”

대신관이 응접실을 한번 둘러보며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나마 여긴 좀 낫구나.”

그 말에 곁에 앉아 있던 왕비도 동의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신관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기운이 무척 탁해. 원래 황궁은 많은 이들의 사념들이 모여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곳은 조금 더 어두운 기운이 짙은 느낌이구나.”

그때 왕비가 입을 열었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부정적인 기운이 가득해.”

누군가의 저주로 가득 찬 것처럼 제국의 황궁에서는 끔찍한 원념이 끊임없이 비명을 질러대었다.


“벨리아. 정말 괜찮겠느냐?”

왕비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막상 도착해 확인한 제국의 황궁은 생각보다 더 어두운 곳이었다.

밝고 생기가 넘치는 로니카 왕성과는 전혀 다른 곳이다.


“네. 괜찮아요. 제가 선택한 길이잖아요.”

벨리아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가 바라니 허락을 해 주었으나 직접 살펴보니 더욱 걱정이 앞서는구나.”

왕비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벨리아가 이곳에서 잘 버틸 수 있을지…….

분명 잘 해내리라 믿어주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심정으로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칼리드는 좋은 사람이에요.”

“……1황자보다는 나아 보여 더 말하지 않았지만, 그도 손에 피를 많이 묻힌 자야.”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제 어머니를 바라보던 벨리아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쩔 수 없어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선 더 많은 피도 묻혀야 하는 자리예요.”

게다가 그는 황제가 될 것이다. 원치 않더라도 그는 많은 이들의 목숨 위에 서야 하고, 악의가 가득한 끔찍한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리고 벨리아는 그런 그의 손을 잡고 끝까지 함께할 작정이었다.


“제게 맡겨주세요. 잘 버텨볼게요.”

벨리아의 표정이 단단했다.

그 의지로 가득 찬 얼굴을 잠시 지켜본 왕비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말려봤자 소용없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어쩜 이리 고집스러운지. 제 아버지를 똑 닮았어.”

왕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대신관이 푸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집은 너도 만만치 않았지. 헤스티아. 로니카 왕과 결혼을 허락해주지 않으면 두 번 다신 신국에 발도 들이지 않을 거라고 협박했던 건 기억나지 않느냐?”

“아버지, 그건…….”

“하하하. 그런 널 보고 손녀를 보니, 아주 익숙한 모습이라 놀랍지도 않구나.”

처음 듣는 이야기에 놀라워하며 벨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런 손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대신관의 표정은 다시 어두워졌다.


“조심하거라, 벨리아. 네게 위험한 일이 많을 것 같다.”

“명심할게요.”

벨리아는 일부러 더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때 대신관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이걸 받거라.”

작은 흑요석이 박혀 있는 목걸이였다.

대신관이 내미는 것을 조심스레 받아든 벨리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정화수에 한 달을 담가 두었던 흑요석에 내 신성력을 담아 목걸이를 만들었다.”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로 작은 크기의 목걸이였지만, 대신관의 신성력이 들어있다면 엄청난 가치가 있음이 분명했다.


“많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니 한시도 몸에서 떨어뜨리지 말거라.”

당부의 말을 꺼내긴 했지만, 실제로 목걸이를 만드는 과정은 무척 까다로웠다.

결혼해 고향이 아닌 타국에서 머물 제 손녀를 위해 대신관이 무척 신경써서 만든 물건이었다.

삿된 것으로부터 보호하고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 미약하게나마 벨리아를 도울 수 있기를 바라며.

한눈에도 귀한 것임을 알아차린 벨리아가 목걸이를 빤히 바라보다 감격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감사해요. 할아버지.”

진심이었다.

목걸이의 효능보다도, 이것을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하던 할아버지의 마음이 무척 고마웠다. 벨리아는 곧바로 목걸이를 목에 걸고는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며 웃었다.

* * *

어느덧 결혼식 당일이었다.

벨리아는 그동안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2황자궁에 신성력으로 작은 장치를 만들었다.

가족의 힘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쪽쪽 뽑아낸 기분이라 조금은 죄송스럽기도 했지만, 이런 기회를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마침 일주일이나 시간이 있었지 않나.


‘생각보다 빨리 만들어져서 다행이었어.’

그렇게 이것저것 준비를 하다 보니 어찌나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지.

벨리아는 시녀들의 도움으로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으면서도 머릿속으론 끊임없이 다른 생각을 이어갔다.


“공주님. 너무 아름다우세요.”

거울에 비친 벨리아의 모습은 정말로 순백의 신부, 그 자체였다. 새하얀 피부와 은발, 그리고 하얀 드레스까지 어우러지면서 청초하면서도 고귀한 분위기를 뿜어내었다.

그녀를 치장해주던 시녀들조차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정도로 무척 아름다웠다.


“고맙구나.”

그제야 생각을 멈춘 벨리아는 멍하니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 모습을 보는 건 두 번째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결혼한다는 사실에 마냥 기쁘고 설레었던 건 처음 웨딩드레스를 입었을 때였다. 그땐 바보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기쁘기만 했었다.


“오늘 분명 전하께서 공주님께 또 반하실 거예요!”

시녀들이 칭찬의 말을 이어갔다.

벨리아는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서 살폈다.

제가 봐도 꽤 예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건 분명히 처음 결혼을 할 때와는 다른 감상이었다. 낯설지도, 설레지도 않았다. 긴장되는 마음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러나 벨리아의 표정은 밝았다. 벨리아가 거울을 등지고 돌아섰다.


“모시겠습니다.”

“그래.”

천천히 걸음을 내디뎌 방을 나섰다.

궁을 나서자 벨리아를 맞이하기 위해 준비된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신부를 위한 마차답게 무척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하얀 마차에 색색의 꽃들로 장식해 보자마자 사랑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오늘의 주인공을 위해 전하께서 직접 준비한 마차입니다.”

마부가 깍듯하게 설명했다.

이윽고 벨리아가 마차에 올라타자, 마차는 결혼식이 열리는 식장까지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말발굽 소리마저 경쾌했다.


‘정말로 칼리드와 결혼하는 건가……?’

분명히 아까까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심장이 콩콩 뛰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조금 긴장한 것 같기도 하다. 오지 않을 것 같던 날을 맞이하니 실감이 안 났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결혼식을 생각하기보다 오히려 익숙하게 진행해왔던 다른 일들을 떠올렸었다.

그런데 결혼식을 위해 화사하게 꾸며진 황궁의 모습과 사용인들이 모두 나와 자신이 가는 길을 축복해주는 모습에서 점점 이 모든 순간이 선명해졌다.

덜컹거리던 마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공주님. 이제 나오시면 됩니다.”

제국에선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의 모습을 신랑이 끝까지 보지 못하도록, 신부는 마차로 식장의 입구까지 이동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래서 결혼식이 시작되고 신부가 입장할 때, 신부가 마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모습을 처음 마주하는 신랑의 얼굴을 지켜보는 게 결혼식을 보러온 하객들의 또 하나의 재미 요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바꿔 말해, 신부 또한 예복을 입은 신랑을 처음 마주한다는 것이었다.


“후우…….”

음악이 크게 울려 퍼지고, 마차의 문이 열렸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벨리아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양옆에선 사람들이 꽃비를 뿌렸고, 환호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녀가 걸어갈 길의 끝에 아주 근사하게 꾸민 칼리드의 모습이 보였다.

그를 발견하고 나자 심장이 주체할 수 없게 뛰었다.

현실감이 없으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이라 기분이 묘했다.


‘…….’

그리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칼리드의 마음 또한 다르지 않았다.

어쩌자고 저렇게 예쁜 건지. 모두가 그녀를 볼 수 없게 만들어버리고 싶다가도, 온 세상에 이 사람이 내 여자라고 자랑하고 싶었다.

조심스레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충동이 고개를 들었다. 당장이라도 이 길을 따라 뛰어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의 표정이 점점 위험해졌다. 입을 벌리고 사냥감을 기다리는 맹수의 얼굴이었다.

그렇게 벨리아가 긴 꽃길을 걸어 칼리드의 앞에 다다랐을 때.

그는 주체하지 못하고 벨리아에게 입을 맞췄다.

사람들의 경악과 즐거움이 가득한 목소리들이 사방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그들의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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