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 그저 명령을 해. (82/88)


#82. 그저 명령을 해.
2023.08.12.


달빛이 말갛게 방을 비췄다.

희미하지만 또렷한 빛에 의지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이 순간.

벨리아는 어쩐지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무슨 생각을 하지?”

의자에 앉아 자신의 품에 벨리아를 가득 채워 넣고 느릿하게 만족감을 표하던 칼리드가 그녀의 허리를 더 깊게 끌어안으며 물었다.


“그냥, 실감이 안 나요.”

벨리아가 작게 읊조리자 칼리드는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우리가 정말 결혼을 하는 걸까요?”

결혼식 날짜가 다가올수록 어쩌면 이 모든 게 꿈이 아닐까, 하는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와 함께하는 일상이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모든 일이 문제 없이 잘 풀릴수록.

혹시나 이 모든 행복이 한순간에 사라지면 어떡하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내게는 전부 괜찮을 거라고 얘기해놓고선 왜 그대가 자꾸 흔들리지?”

“모르겠어요.”

그저…….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한 순간 전부 잃었던 적이 있어서 그런가…….”

벨리아는 칼리드의 몸에 자신의 몸을 전부 기대었다.


“자꾸만……. 혹시나 이번에도 그러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목에 닿는 그의 입술의 감촉에 벨리아가 말을 멈췄다.

촉, 초옥. 하는 질척한 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돌려보려 했지만 칼리드가 꽉 끌어안고 있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읏, 하지 말아요…….”

그의 행동이 점점 집요해졌다.

뜨거운 숨결이 벨리아의 귓가를 간질였다.


“저 힘들어요. 그만해요…….”

벨리아가 자신의 몸을 지분거리는 칼리드를 향해 힘없이 말하자 그의 행동이 우뚝 멈췄다.


“으음.”

스스로도 찔리는 게 있던 칼리드는 피식 웃으며 모든 행동을 관둔 채, 그저 그녀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역시나 달았다. 그런데도 참아야 한다니. 고역이었다.


“알겠어.”

하지만 사냥개는 얌전히 주인의 말을 들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오는 싸늘한 바람이 달아올랐던 열기를 순식간에 식혀주었다.


“그대가 자꾸 흔들리니까 나도 불안해.”

“……미안해요.”

흩어질 것같이 가녀린 목소리였다.


“아니. 미안하라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러니까.”

칼리드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날 조금만 더 믿어달라고. 그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야.”

나날이 벨리아에 대한 마음이 커져만 가는데,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데, 그녀에게 그 무엇도 확신을 심어줄 수 없다는 게 답답했다.


“……믿어요.”

“그래. 그렇게 나만 보고 나만 믿고 내 말만 들어.”

라울 녀석과 비교하지 마. 그와 나는 전혀 달라.

칼리드의 목소리가 목울대를 긁으며 날카로워졌다.


“그대를 온전히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임을 명심해, 벨리아.”

그러니 그대는 걱정하지 말고 그저 명령을 해.

그의 목을 물어오라고.

* * *

로니카의 왕비와 신국의 대신관이 국경을 넘어 제국에 도착했다.

결혼식을 일주일도 채 남기지 않은 날이었다.

그들의 방문은 제국민들 사이에서도 엄청난 화제였다.

유일신을 섬기는 신관 중에서도, 신에게 가장 가까운 자.

게다가 로니카의 왕비는 신국의 제사를 주관하던 신녀였지 않은가.

사람들 모두 조금이라도 그 은총의 희미한 부스러기라도 받아보고자, 그들이 수도에 입성하는 길의 양옆으로 빼곡히 서서 진심으로 기뻐하며 반겼다.


“아버지.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네가 사적으로 무언가를 요구한 것은 이게 두 번째로구나.”

왕비는 싱긋 웃었다.


“처음은 로니카 왕과 결혼하겠다고 떼를 쓸 때였지. 어쩌다 그놈을 만나서는…….”

다시 생각해 봐도 영 마음에 차지 않은지 대신관이 츳, 하고 혀를 찼다.


“후후. 그래도 제가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좋으시잖아요.”

게다가 아이들도 무척 어여뻐하지 않나.

헤럴드와 벨리아가 어릴 땐 종종 신국에 데리고 가서 신전에서 머물기도 했었다.

벌써 그 아이가 자라 결혼을 한다니.


“시간이 참 빨리 흐르네요. 그렇죠, 아버지?”

대신관은 제 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심각한 얼굴로 창밖으로 보이는 제국의 황궁을 바라보았다. 웅장하고 화려한 황궁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불쾌한 감각이 치밀어 미간을 찌푸렸다.


“……만나보진 않았으나, 현 황제가 썩 괜찮은 자는 아닌가 보구나.”

대신관을 따라 황궁을 향해 시선을 돌린 왕비도 씁쓸한 표정으로 동의했다.


“그러게요. 기운이 탁하네요.”

이런 곳에서 벨리아가 지내야 한다니.

왕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걱정하지 마라. 네 아이라면 어둠 속에서도 보석을 발견할 아이일 테니.”

한없이 딸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묻어나는 발언이었다. 그렇게 말하곤 대신관은 입을 다물었다.

황궁에서 불길한 기운이 감돌았다. 제 손녀가 겪어야 할 길이 순탄치는 않으리란 예감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신이시여. 부디, 모두를 굽어살펴 주십시오.’

속으로 자신의 신을 향해 간절한 기도를 올린 대신관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황궁의 정문에서 벨리아와 칼리드를 비롯해 황제, 황비, 라울 그리고 그의 약혼녀인 칸테리프 공녀까지 모두 나와 신국의 대신관과 로니카의 왕비를 맞이했다.

확실히 황제가 무척이나 신경을 썼는지, 황궁 입구에서부터 기사단이 도열해 웅장하게 환영식을 거행했다.


“하하. 이리 성대하게 반겨주다니요.”

“대신관께서 제국에 처음 방문하는 것인데 소홀할 수는 없지요. 안으로 드십시오.”

황제는 더없이 친절하고 부드러운 얼굴로 대신관을 직접 안내했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나머지 황실 식구들이 뒤따랐다. 황비의 곁에는 로니카의 왕비가 나란히 서서 같이 걸었다.


“왕비께선 제국엔 처음이시지요?”

“그렇습니다. 오는 길에 제국을 둘러보면서 무척 화려하고 아름다운 나라라 생각했답니다.”

“어머. 호호. 왕비께서 지내는 동안 부족함이 없도록 각별히 신경 써야겠군요.”

가식적인 대화들이 오가며 만찬이 준비되어 있는 중앙궁의 홀에 도착하자, 이미 완벽하게 준비가 되어 있는 테이블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가 직접 대신관에게 자리를 권했고, 그의 옆으로 로니카의 왕비가 앉았다. 그들의 맞은편에는 황제와 황비가 나란히 앉는다.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을 때, 황제가 시종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시종이 준비된 만찬을 각자의 자리에 놓아주었다.


“먼 길 오느라 힘드셨을 테니, 부담되지 않는 음식들로 준비하라 일렀습니다.”

황제는 대신관에게 한결같이 친절하고 상냥했다.

신국의 위상이 제국에 못지않은 만큼, 그를 대함에 조금의 소홀함도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황제의 태도는 자연스럽게 벨리아에게 향하는 관심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제국민들 사이에서 벨리아 공주에 대한 칭찬이 자자합니다.”

황제가 벨리아를 칭찬하는 말을 꺼내었다.

모름지기 누군가와 가까워지기 위해선 공통되는 관심사를 찾아내는 게 빠르다.

그리고 황제와 대신관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이라곤 벨리아뿐이었다.


“자선 사업부터 최근에 의료 사업을 진행하는 것까지. 아주 똑 부러지고 총명하지요. 제국의 복입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황제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다행이다 싶군요.”

대신관은 기분 좋다는 듯 껄껄 웃으며 벨리아를 따스하게 바라보았다.

벨리아는 그런 할아버지의 눈빛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아직 제대로 인사를 나누진 못했으나, 이미 눈빛만으로도 반갑고 그리웠다는 마음이 충분히 전해졌다.


“제 손녀이긴 하나, 아직 어려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도 이치에 밝고 따스한 아이이니……. 분명 제국에서도 잘 지내겠지요.”

황제는 대신관의 말에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맞습니다. 이미 공주의 인기가 대단합니다. 하하하.”

만찬의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종종 벨리아와 칼리드에게도 이야기가 이어졌고, 화기애애한 대화가 계속됐다.

하지만 그 속에서 홀로 동떨어진 듯 말없이 앉아 있던 자도 있었다.


 


‘……짜증 나.’

엘린 칸테리프였다.

모든 화제의 중심은 2황자와 벨리아 공주였다.

그들의 결혼식을 위해 모인 이들이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지만, 엘린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2황자 칼리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만하고 성격 나쁜 망나니 황자가 아니었나.

고작 로니카 왕국의 공주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렇게나 다른 대우를 하는 건 너무 우스웠다.


“……엘린. 표정을 푸십시오.”

라울이 엘린의 손을 꼭 잡아주며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소리로 말했다.

무척 사소한 행동이었지만, 엘린은 그에 마음이 스르륵 풀렸다.


‘그래. 나에겐 전하가 있으니까.’

엘린은 굳었던 얼굴을 풀고 사르르 웃어 보였다. 라울도 그런 엘린을 보고선 안심이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속마음은 전혀 다를지라도 어쨌든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은 그랬다.

그때 대신관이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사적으로는 제 손녀의 결혼식이기도 하니, 부부에게 내리는 축복은 제가 직접 하고 싶군요.”

결혼식을 축복하기 위해 제국에서 고위급 신관이 올 예정이긴 했지만, 확실히 대신관이 직접 축복해주는 것은 의미가 남다르긴 했다.

그리고 그것은 두고두고 회자될 역사적인 순간이 될 것이다.


“으음. 이미 오기로 한 신관이 있을 텐데요. 게다가 곧 1황자의 결혼식도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느냐는 말을 하려던 황제의 말을 칼리드가 재빨리 나서서 끼어들었다.


“그리해주신다면 저희는 무척 기쁠 것 같습니다, 할아버님.”

예정된 신관에게는 양해를 구하면 된다.

대신관은 신국에 방문한다 해도 한번 마주하는 것조차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관에겐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은 것과 다름없으리라.

그러니 분명 그는 대신관에게 축복의 순간을 양보할 것이 뻔했다.


“오. 그런가? 벨리아는 어찌 생각하느냐.”

대신관이 자연스럽게 벨리아에게 질문을 이어갔다.


“할아버지께서 저희의 결혼식을 축복해주신다면, 그건 저에게도 더없는 영광이죠.”

“하하하. 그리 생각하는 녀석이 신국에 한 번을 오질 않아?”

장난스러운 말투로 벨리아를 나무라는 대신관을 보며 로니카의 왕비가 후후, 웃는다.

황제도 그런 그들의 모습을 살피며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그래도 이리 뵈니 정말 좋아요, 할아버지.”

벨리아는 눈웃음까지 지으며 사랑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대신관이 껄껄, 큰소리로 웃는다.

기민하게 분위기를 파악한 황제가 라울의 얼굴을 슬쩍 확인하곤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라울보다도 칼리드가 눈에 띄게 되겠지만 제국과 신국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대신관의 호의를 이 자리에서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럼 신관에겐 잘 설명해 두겠습니다. 제국에서 가장 신실한 신관이라 어렵게 일정을 맞췄지만, 어쩔 수 없지요. 하하.”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내색을 풍기던 황제를 살핀 대신관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곧 있을 1황자의 결혼식에는 그 신관이 축복을 내려주면 되겠군요. 제국에 그런 신실한 종이 있다니. 무척 다행입니다.”

대신관이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사실 주신을 모시는 신관은 고하가 나뉘어있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제 손녀의 결혼을 축복하고 싶었던 것뿐이니, 전혀 문제는 없겠군요.”

이런 대신관의 말에 결국, 황제는 씁쓸한 표정으로 그렇게 하면 되겠다며 맞장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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