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심술부리지 말아요.
(81/88)
81. 심술부리지 말아요.
(81/88)
#81. 심술부리지 말아요.
2023.08.08.
벨리아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자꾸만 어제 들었던 라울에 대한 정보가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난 삶과 비교했을 때 일이 진행되는 속도가 예측보다 훨씬 빨랐다.
‘동부 귀족들을 규합하긴 쉽지 않았을 텐데.’
이전 삶에서 동부 귀족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기억이 있었다. 북부 귀족들이 하나로 꽁꽁 뭉쳐 있는 것과 달리, 동부의 귀족들은 죄다 분열된 채 하나로 뭉칠 만한 구심점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런데 라울이 대체 어떻게…….
“하아…….”
벨리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슬쩍 열렸다. 그 사이로 클로제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언니?”
그 뒤론 헤럴드가 슬쩍 헛기침을 해댔다.
벨리아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잔뜩 굳어 있던 표정이 풀어졌다.
“들어와요.”
오늘은 오랜만에 남매들끼리 뭉쳐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던 참이었다.
바로 어젯밤 데릭에게 클로제에 대한 마음을 듣고 난 뒤라 괜히 제 동생을 보기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드는 벨리아였지만, 우선 그런 마음은 깊숙이 숨겨두곤 환한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얼굴이 많이 야위었구나.”
어제는 오자마자 황제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헤럴드는 벨리아와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벨리아가 마중을 나갔을 땐 아무래도 영 정신이 없었는지 오늘이 되어서야 헤럴드는 벨리아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2황자가 마음고생이라도 시키더냐?”
“아니에요, 오라버니. 전 정말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런데 왜 이리 야위었어. 내가 안부 편지에도 밥 잘 챙겨 먹으라고 그리 당부를 했는데…….”
헤럴드가 슬슬 당부를 가장한 잔소리를 시작하려 운을 떼자 벨리아가 서둘러 그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로 그를 이끌었다.
“날이 좋아서 창과 가까운 쪽으로 자리를 준비해 봤어요. 창문은 닫아두었으니 그리 춥지는 않겠지만, 혹시라도 춥다면 꼭 얘기해 주셔야 해요?”
벨리아의 걱정에 클로제는 뭘 이 정도를 가지고 호들갑이냐는 얼굴로 자신의 자리에 새침하게 앉았다.
실제로 클로제와 헤럴드는 마차 안에서 제국이 그리 춥지 않은 것이 신기하다며 대화를 나눴을 정도였다.
“그래도 아직 바람이 차.”
벨리아가 핀잔하듯 말했다. 괜히 이곳에 와서 몸이 상할까 걱정된다는 말투였다.
하지만 클로제는 우아한 태도로 제 언니의 말을 넘겨버리며 벨리아와 헤럴드에게 자리에 앉으라 권했다.
“이 정도면 완연한 봄이지 뭐. 어서 앉아. 언니도, 오라버니도.”
마치 제가 이곳의 주인인 양 편하게 행동하는 제 동생의 모습에 벨리아가 헛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윽고 미리 준비된 음식들을 시녀들이 가져와 각자의 자리에 놓아주었다. 그러곤 오랜만에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모두 자리를 비켜주었다.
벨리아는 제 동생과 오라버니와 함께 식사를 하며 그동안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다 최근 대륙 정세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헤럴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제는 네게 잘 대해주니?”
“음. 그냥 뭐, 형식적인 관계이긴 해도 제게 불이익을 주진 않아요.”
황제가 제게 원하는 게 남아 있는 이상, 결코 벨리아를 적대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 그건 다행이구나.”
벨리아는 제 오라버니의 표정에서 걱정이 담뿍 담겨 있다는 것을 읽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혹시 황제가 샤네탄 대로의 개방을 계속 요구하나요?”
그 질문에 헤럴드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라 예상했었다. 벨리아에게 넌지시 로니카 왕국에 이야기를 전하라고 이야기했던 이후로도 황제는 꾸준히 샤네탄 대로의 개방을 요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벨리아는 포크를 내려놓으며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조건은요?”
“몇 번 거절하니 점점 좋은 조건을 제시하더구나. 그래서 더 수상해.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들을 내세우면서 대로의 개방을 요구하는 건 이상하지 않으냐.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면 국가 간 이루어지는 거래에 제 잇속을 챙기려 하지 않을 리 없으니까.”
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러니 끝까지 받아주면 안 돼요.”
하지만 헤럴드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렇지만, 벨리아. 우리가 계속 버티고 있다면 황제가 네게 해코지를 할 수도 있어. 너는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데 우리 때문에 그런 수모를 겪게 할 수는 없지 않으냐.”
가족을 걱정하는 그의 마음이 따뜻했다. 하지만 제 오라버니가 걱정하는 수모는 이전 삶에서 이미 경험한 바 있었다. 샤네탄 대로를 개방했기 때문에.
벨리아에게서 얻어낼 것을 다 얻어낸 황제와 라울은 더는 벨리아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미 정복 전쟁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들에게 로니카 왕국의 공주는 필요가치가 없어진 것이다.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오라버니는 로니카의 국민을 짊어지고 있는 왕세자예요. 무조건 나라를 먼저 생각하셔야 해요.”
“알고 있다. 하지만 네 불행을 발판으로 삼아 우리가 행복하다고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겠느냐.”
“아뇨. 차라리 버티는 게 저를 불행하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오라버니. 쉽게 내어주면 그들은 분명 로니카를 얕잡아 볼 거고요. 적어도 몇 년만 버티면 되니까…….”
이게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올해 겨울이 지날 때까지는 무조건 버텨야만 했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클로제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럼 부분만 개방해 우리가 얻을 건 얻으면서 시간을 끄는 건 어때?”
그 말에 벨리아가 깜짝 놀라 클로제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제국이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며. 그럼 조건을 몇 가지 수용하고 무역 통로로만 개방하면서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본 후 최종 결정을 하겠다는 게 낫지 않아? 그럼 언니 말대로 몇 년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전 삶에서 샤네탄 대로의 개방이 불러온 비극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기에 벨리아는 무조건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 어떠한 개방도 허용할 수 없다고.
하지만 클로제의 말처럼 임시 조약을 맺어 일부만 개방한다면 오히려 로니카에 엄청난 이득을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황제는 로니카에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면서까지 조약을 맺고 싶어 하니까 분명 흔쾌히 허락할 거야.’
그러곤 곧 완전한 개방을 앞두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게다가 기간을 정한 임시 조약이라면 차후 칼리드가 황제가 되었을 때 적절한 조건으로 재협정을 맺을 수도 있다.
벨리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샤네탄 대로의 임시 개방으로 로니카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고, 황제의 야욕은 잠시 소강상태를 이룰 것이다.
몇 년의 유예를 둔다는 것으로 시간을 번다면 벨리아와 칼리드에게도 유리하다. 그 기간 안에 황제는 죽고 칼리드와 라울의 황위 다툼이 있을 테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마, 언니. 어차피 서로 이득을 노리는 사이잖아. 우린 우리의 이득을 노리면 돼. 그리고 언니는 우리가 시간을 끄는 동안 원하는 걸 얻을 작정인 거 아냐?”
“너, 그걸 어떻게…….”
“뭘 어떻게야. 상황 보면 뻔하지 뭐.”
클로제가 찡긋 한쪽 눈을 감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왜에? 언니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똑똑해서 놀랐어?”
벨리아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클로제가 꺄르르 맑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정말로 클로제는 벨리아의 생각보다 훨씬 영특한 아이였다.
“하하하. 그렇구나. 그럼 이 부분은 로니카로 돌아가면 바로 회의를 진행해 봐야겠다.”
헤럴드도 만족스러운 의견이라 느꼈는지 표정이 밝아졌다.
클로제는 포크로 콕콕 샐러드를 찍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식사하면서 우울한 이야기는 하지 말자. 즐거운 이야기만 해도 모자랄 시간이잖아?”
맞는 말이다.
벨리아와 헤럴드는 클로제의 말에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다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 * *
정말로 클로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데릭을 좋아한다는 클로제의 말에 걱정이 가득했는데. 오늘 이야기를 나눠보니 생각보다도 더 어른스럽고 영리했다.
‘게다가 아까 헤어지기 전, 제 입으로 성인이 될 때까진 얌전히 지내겠다고 다짐했으니까.’
클로제에게 정보가 필요할 때는 데릭이 아닌 일반 길드원과 이야기를 하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클로제가 입을 삐죽 내밀며 불만스러워하긴 했으나, 어쨌든 잘 해결된 것 같다.
“하아…….”
벨리아는 지친 몸을 휘적휘적 움직여 침대 위에 그대로 쓰러졌다.
“꺅!”
벨리아는 갑자기 느껴지는 이상한 촉감에 놀라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도 정신이 없어서 침대에 누가 있는 것도 모른 채 그대로 누워버리다니.
“하하하.”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지만, 이불 속에서 웃고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으니, 어딘가 안심이 되면서도 화가 불쑥 솟았다.
벨리아는 괘씸한 마음을 담아 베개를 하나 잡아서 퍽퍽, 내려쳤다.
“진짜 이게 무슨 짓이에요, 정말!”
왜 아는 척도 안 하고 이불 속에 숨어 있던 거람?
칼리드는 베개에 맞으면서도 뭐가 재밌는지 계속 웃기만 했다.
이 상황이 너무 황당했다.
결국, 화를 내다 말고 피식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 표정을 곧바로 잡아낸 칼리드가 팔을 뻗어 벨리아를 끌어안고는 침대에 누웠다.
“놀랐나?”
“……그럼 당연히 놀라죠.”
“하하.”
“웃지 말아요. 진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벨리아가 그의 품에서 투덜거렸다.
그러자 칼리드는 벨리아를 꼬옥 끌어안고는 말했다.
“보고 싶어서 왔더니 자리에 없더군. 그래서 내가 먼저 목욕재계하고 기다렸지.”
그가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가족들과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나?”
벨리아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칼리드가 벨리아의 어깨를 콱 깨물었다.
“나를 버려두고 아주 즐거웠나 보군?”
“심술부리지 말아요. 오늘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겠다고 미리 얘기했잖아요.”
“그래도 내 눈앞에 늘 그대가 있었으면 하니까?”
칼리드가 웃으면서 말하자, 벨리아의 얼굴에 열이 홧홧하게 올랐다.
“그으! 저 아직도 당신한테 화 풀린 거 아니니까……. 이렇게 치근덕거리지 말아요…….”
벨리아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리듯 말하자 칼리드는 또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벨리아.”
촉.
가볍게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내가 말끝, 늘리지 말랬지.”
칼리드의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갔다.
하지만 목소리에 서려 있던 웃음기는 점점 사라졌다.
분위기가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대가 그렇게 말하면…….”
천천히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듣던 벨리아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아…….’
순간, 자신이 그에게 삼켜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시선이 제게 못이 박힌 듯 고정되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사냥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자꾸 그다음을 재촉하는 것으로밖엔 안 들려.”
이윽고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순식간에 그녀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