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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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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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해명
2023.08.05.
“이건 또 무슨 이야기죠?”
왜 자신에겐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나.
서운한 기색이 잔뜩 어린 벨리아의 얼굴에 칼리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 마무리된 이후에 얘기해주려고 했어.”
그게 무슨!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았으니까.”
벨리아가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 칼리드가 선수를 쳤다. 그의 표정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결국 화를 내려던 마음이 꺾인 벨리아가 작게 숨을 내쉬곤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제대로 설명해 봐요.”
자신이 납득할 수 있도록.
벨리아의 단단한 눈빛에 칼리드는 어려운 말을 꺼내는 듯 무겁게 입을 뗐다.
“……라울이 남부와 동부를 묶어 연합을 맺었어.”
“뭐라고요?”
어째서, 벌써.
벨리아는 진심으로 놀라 눈이 잔뜩 커다래진 채 칼리드를 바라보았다.
이전 삶에서도 남부와 동부 귀족 연합이 라울과 뜻을 함께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건 몇 년은 더 지나야 구축될 연합일 텐데.
“언제부터…….”
칼리드가 벨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곤 토닥토닥 벨리아의 놀란 마음을 진정시켜주며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나도 소식을 받은 건 얼마 되지 않았어. 그래서 급하게 북부를 포섭해야 했지.”
하지만 칼리드는 1황자 측 사람들에게 엄청난 견제를 받는 상황이었고 이전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한량처럼 놀러 다니는 것처럼 위장하곤 직접 북부를 방문해 담판을 지었을 테지만 벨리아와 결혼한 이후엔 몰래 어딘가에 다녀오는 게 쉽지 않았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마스터가 움직이는 게 우리한테는 최선의 방법이었어.”
그래서 칼리드 대신 데릭이 움직여야 했다.
자신의 최측근은 모두 라울이 눈여겨보고 있을 테니까.
“그대가 루네스의 마스터를 포섭해 준 게 얼마나 큰일인지 모르겠지.”
하마터면 정말 다 어그러질 뻔했다며 칼리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일단 라울의 현 상황부터 설명하자면…….”
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칸테리프 공녀와 라울이 사교계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건 알고 있겠지?”
“네. 그래서 저도 카프리에 후작 영애와 함께 그들을 견제하는 중이었어요.”
“그런데 그건 사교계가 목적이 아니었어.”
그들이 남부와 동부를 엮고 있다는 걸 숨기기 위한 연막일 뿐이었다고 칼리드가 설명했다. 점점 행동들이 치밀해지고 은밀해졌다. 벨리아는 아연한 기분이었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움직이면서 그들의 움직임도 바뀌었겠지. 낙관적으로 보고 있던 상황이 그대와 내가 결혼하면서 달라졌으니까.”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벨리아는 충분히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자신들의 행동으로 그들의 행동 또한 변할 거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빠르다.
“그럼 데릭이 북부에 간 건…….”
“그래. 북부의 수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어.”
북부 연합은 그 어느 곳보다도 결속력이 강한 곳이었다. 그러니 수장이 이쪽의 손을 들어주면 자연스럽게 모두가 따라올 것이다.
“하지만 북부의 수장은…….”
그 사람이잖아요?
벨리아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북부의 수장. 에링턴 대공.
그는 현 황제의 동생이자, 제국의 하나뿐인 대공이었다. 언제나 영지에서만 머물며 국가의 중요한 일이 아니고선 중앙 정치에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기로 유명한 사람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전 삶에서 라울을 지지하게 만들기 위해 벨리아가 직접 그를 찾아갔었지만, 얼굴 한번 보지도 못한 채 쫓겨난 기억이 있었다.
“……에링턴 대공과 손을 잡는다니. 불가능해요.”
벨리아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때 데릭이 헛기침을 하며 자신에게 관심을 돌렸다.
“그 어려운 것을 제가 해내고 왔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주님.”
칼리드가 벨리아를 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
그러곤 이전부터 북부와는 꾸준하게 인연을 쌓으려고 했었다는 말을 시작으로, 그의 입에선 놀라운 이야기가 쏟아졌다.
벨리아와 만나기도 전부터 칼리드는 북부 귀족 연합의 수장과 연락책을 만들려고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역시 에링턴 대공은 쉽지 않은 상대였고, 칼리드가 직접 북부로 찾아가 아주 오랜 기간을 끈질기게 설득했다고.
‘그럼 내가 그를 찾아갔을 땐 이미 칼리드와 손을 잡은 상태였던 건가?’
이건 이전 삶에서도 전혀 알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정말 알면 알수록 놀라운 일투성이었다.
그렇게 에링턴 대공의 마음이 이쪽으로 거의 넘어왔을 무렵, 칼리드가 벨리아와 약혼을 하게 되면서 제약이 걸렸다.
“북부까지 다녀올 수 있는 사람이 마스터밖에 생각나지 않더군. 어차피 제국에도 와야 했으니, 겸사겸사 북부에도 들렀다 오라고 한 거지.”
칼리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미리 얘기해주지 그랬어요.”
“혹시나 실패할 수도 있잖아. 그럼 그대가 실망할 테니까 일이 마무리되면 얘기하려고 했었지.”
그 영감이 보통 꼬장꼬장한 게 아니라며 칼리드가 농담을 섞어 분위기를 풀었다.
“그래도 잘 마무리되었어.”
만족스럽다는 감정이 칼리드의 얼굴에 짙게 번졌다.
벨리아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동부와 남부는 1황자를, 서부와 북부는 당신을 지지하겠군요.”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조금 세력이 부족해. 라울이 칸테리프 공녀와 약혼하면서 간을 보던 중앙 귀족들이 모두 그쪽에 붙었어.”
그러나 벨리아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녀의 시선이 데릭을 향했다.
“하지만 저희에겐 셀론 후작가의 후계자가 있죠.”
“하하하. 맞습니다. 제가 2황자 전하 쪽으로 붙기로 했지요.”
데릭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벨리아가 찌릿, 데릭을 노려보았다.
“후작가에는 언제 들어갈 거예요?”
생각해보니 데릭에게 할 이야기가 많았다.
그동안 연락도 잘 안 되더니!
“걱정 마십시오, 공주님. 얼마 전 셀론 후작과 신전에 방문해 친자 확인을 마쳤습니다. 조만간 후작가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데릭이 웃으며 말했다.
“후작은 제가 진료소에서 일하고 있는 치료사로 알고 있죠.”
데릭은 후작이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후작이 의뢰를 해왔을 때 일부러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덕분에 후작은 데릭이 루네스의 마스터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치료사로 속이려면 실제로 의학 지식이 있어야 할 텐데요.”
벨리아의 물음에 데릭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정보 길드를 운영하려면 자연스럽게 여러 잔재주를 익히게 됩니다. 치료사인 척 눈속임할 정도는 익혀두었습니다.”
그의 말에 벨리아가 안심했다는 듯 마주 미소 지었다.
“그리고…….”
데릭이 큰 결심을 했다는 표정으로 입을 뗐다.
“어머니의 병세가 아주 좋아졌습니다. 이젠 거동도 가능할 정도로 호전되었죠.”
“다행이네요. 제가 분명 효과 있을 거라고 했죠?”
“……정말, 감사합니다.”
데릭이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이 순간 벨리아는 그가 자신들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신의를 배신하지 않는 사람이야.’
데릭이 완전한 자신의 편으로 돌아선 것을 확인하니,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안심되었다.
그에 벨리아가 농담을 섞어 물었다.
“그보다 그 편지는 뭐예요?”
클로제가 전해준 편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실 여기에 올 때는 이걸 물어보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는데 다른 이야기를 하다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 그래도 클로제 공주님께서 곧바로 제 편지를 전해드린 모양이군요.”
데릭이 따스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그 표정이 클로제를 향한 감정인가 싶어 벨리아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데릭. 혹시 클로제에게 마음이 있나요?”
“어, 음……. 마음이 있고 없고를 이야기하기엔 클로제 공주님은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공주님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하긴.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몰래 도망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역시나 데릭은 클로제에게 마음이 없는 듯했다.
“그럼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 거예요?”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길래 데릭이 도망까지 친단 말인가. 황당하다는 듯한 벨리아의 물음에 데릭이 대답한 사정은 이랬다.
“클로제 공주님께서 저를 잘 챙겨주시긴 했지만, 마냥 상냥하신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쩐지 그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예리하신 분이라 요구하는 정보의 등급도 꽤 높은 편이었고, 저는 최선을 다해 그 요구를 들어드렸습니다. 그러다 점점 저를 부르는 빈도가 잦아졌고…….”
데릭의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지더니, 어느새 거의 기어들어 가듯 말했다.
“어느 날 제게 연인이 있느냐고 물으시더군요. 없다고 대답하자 자신과 결혼하자고…….”
데릭이 어색하게 웃었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클로제는 고백한 적 없다고 말하던데요?”
“좋아한다고 고백만 안 했지……!”
데릭이 울컥해서 소리치다 금세 정신을 차리곤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닙니다. 아무튼, 저도 양심이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데릭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벨리아와 칼리드는 용케 알아들었다.
“허……. 꼬마 공주가 보기보다 용감한데?”
“칼리드. 추임새 넣지 말아요.”
클로제가 생각보다도 훨씬 더 저돌적이었다.
“아무튼. 어차피 슬슬 제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고, 그런 일도 있다 보니 그 편지를 남기게 된 겁니다.”
데릭을 심문하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분위기가 그에게 사실을 털어놓으라 윽박지른 것 같이 무거웠다. 이런 사정인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상냥하게 털어놓으라고 했을 텐데.
“거기에 때마침 칼리드 전하께서 제게 의뢰를 넣으시기도 했고요.”
그의 말을 다 듣고 나니 왠지 마음이 복잡했다.
벨리아는 한숨을 포옥 내쉬곤 입을 열었다.
“곤란하게 해서 미안해요. 이건 클로제와 잘 얘기해 볼게요.”
벨리아가 난감해하며 말하자 데릭이 하하 웃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뭐, 저야 어린 공주님께서 제가 좋다고 해주시니 그저 감사한 일이지요.”
그는 오히려 자신이 면목이 없다고 사과를 해왔다.
‘으음.’
그러고 보니 데릭 정도면 꽤 잘생긴 편이고…….
사람을 대하는 일을 하다 보니 대화를 할 때도 상대에게 잘 맞춰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말투도 여유롭고 친절하지 않나.
이제 와 찬찬히 그를 뜯어보니 어린 클로제가 반할 만도 했다.
“그런데 혹시……. 클로제가 성년식을 치르고 나서도 데릭이 좋다고 쫓아다니면 어떨 것 같아요?”
벨리아의 깜짝 질문에 데릭이 난감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으음. 글쎄요. 생각해보지 않은 이야기라. 아마 그때쯤엔 마음이 변하지 않으실까요?”
데릭이 가볍게 대꾸했다.
그런 그를 보며 어쩐지 클로제가 조금 안쓰러워졌지만, 벨리아는 이내 고개를 흔들곤 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