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대체 언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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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대체 언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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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대체 언제부터?
2023.08.01.
헤럴드는 로니카 왕국의 대표로 제국의 황제와 만남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벨리아는 클로제만 데리고 방으로 향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클로제는 벨리아가 머무는 방을 둘러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와아. 여기가 언니가 머무는 방이야?”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 안에 놓인 가구부터 소품까지 하나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확실히 여기에 그 조각상이 있으면 어울리진 않았겠네.”
클로제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표정을 발견한 벨리아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그 얘기야?”
도대체가 그 못생긴 조각상 얘기는 빠지질 않는다.
클로제도 자신이 말해놓고 우스운지 킬킬, 웃음을 흘리고는 방을 크게 한 바퀴 돌며 구경했다. 그러다 문득, 클로제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여긴 뭐야?”
“응?”
클로제의 물음에 벨리아가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그리고 그곳엔 의아한 표정으로 문고리를 붙잡고 있는 클로제가 있었다.
“잠깐!”
“으응? 왜?”
“클로제! 손!”
늘 차분하던 벨리아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에 놀란 클로제가 서둘러 잡고 있던 문고리를 놓았다.
“뭔데 그렇게 소리를 질러?”
“거기, 열면 안 돼.”
저 문을 열면 칼리드의 방으로 이어진다.
아무리 약혼도 했고 곧 결혼할 사이라곤 해도, 실제론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 남녀 사이가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부부처럼 방을 연결해 드나들 수 있다는 것을 어린 동생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
‘물론 곧 진짜 부부가 되긴 하겠지만…….’
아니다. 그래도 안 된다.
벨리아가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클로제는 이제 고작 16살이 되었을 뿐이었으니까.
“흐응?”
하지만 그런 벨리아의 사려 깊은 마음을 외면이라도 하듯, 클로제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아하?”
“왜 그렇게 웃어?”
“아니이. 이 문을 열면 2황자가 뿅! 하고 나타나기라도 하나 싶어서어?”
클로제가 의미심장하게 말끝을 질질 끌었다.
정말 누굴 닮아 저리 눈치가 빠른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
“후후후. 알겠어!”
클로제가 통통 뛰어 소파에 철퍼덕 앉았다.
“클로제. 자세가 그게 뭐야.”
벨리아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오랜만에 본 클로제는 더욱더 뻔뻔해져 있었다.
“뭐 어때! 어차피 언니밖에 없는데.”
설마 평소에도 저러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클로제는 정말 그러고도 남을 애였기에 벨리아는 흠칫 몸이 떨렸다. 그렇게 제 동생을 심각하게 걱정하는 벨리아를 향해 클로제가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댔다.
“그보다! 언니! 진짜 오랜만인데! 잘 지냈어?”
“그럼. 잘 지냈지. 너는?”
“나야 뭐…….”
클로제가 씨익 웃었다.
그 표정을 보곤 벨리아는 문득 이전에 클로제에게 받았던 편지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요즘 관심 있는 게 생겼다며. 그게 뭔데?”
하지만 클로제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응? 뭔데?”
벨리아의 재촉에 말할까 말까 고민되는지 입술을 달싹이던 클로제가 이내 입을 꾹 다물고는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일단, 이거.”
“이게 뭔데?”
“데릭이 언니 만나면 전해달래.”
데릭이?
벨리아가 의아해하며 실링으로 단단히 붙여둔 편지를 개봉했다.
대체 왜 클로제에게 편지를 건네준 거지? 따로 보내는 게 훨씬 빠르게 도착했을 텐데…….
여기까지 생각하던 벨리아가 멈칫, 굳었다.
“……너. 그 이름 어떻게 알았어?”
클로제에겐 데릭의 정체를 알려준 적이 없었다. 처음 소개해주었을 때도 정보 길드 지부장인 레인으로 인사를 했었다.
깜짝 놀란 표정의 벨리아를 바라보며 클로제가 도리어 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보 길드 사람이 본명으로 자길 소개할 리가 없잖아. 당연히 가명이라 생각하고 캐 봤지.”
클로제는 그것도 몰라? 하며 샐쭉한 얼굴로 다리를 동동거렸다.
“캐 봤다고? 왜?”
“왜긴 왜야. 궁금하니까 알아본 거지.”
뭔가 이상했다.
“그보다 거기 뭐라고 적혀 있어? 얼른 읽어 봐.”
재촉하는 클로제도 이상했고, 이 편지를 클로제의 손에 보낸 데릭도 이상했다.
벨리아는 석연치 않은 마음으로 편지를 꺼내 읽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뭐라고?’
벨리아가 기가 막혀 클로제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 표정이야……? 뭐라고 적혀 있는데?”
본인도 찔리는 게 있는지, 이제야 슬쩍 눈치를 본다.
아직 젖살이 통통하게 남아 있는 클로제를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벨리아는 다시 한번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클로제가 데릭을 좋아한다니. 그래서 지부를 옮기겠다고?’
갑자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왔다.
고작해야 1년도 지나지 않은 이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황당함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얘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벨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편지에 불이 붙는 것을 확인하고 벽난로 안으로 던져넣었다.
“언제부터였어?”
“뭐가?”
“너 데릭 좋아한다며.”
“그렇게 적혀 있어? 역시 그래서 도망친 거였네.”
클로제가 태평한 얼굴로 대꾸했다.
벨리아는 생각할수록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 로니카의 어린 귀족 영식들과 잘 지내는 것 같았는데!
왜 하필 많고 많은 사람 중 데릭이란 말인가!
결국 침착함을 잃은 벨리아가 또 버럭 소리쳤다.
“너 지금 열여섯 살이야! 성년식도 안 지났다고!”
“알아. 누가 뭐래.”
“데릭이랑 아홉 살이나 차이 나는 건 알아? 그는 나보다도 나이가 많아!”
벨리아가 기겁해서 소리쳤다.
“상관없어. 헤럴드 오라버니보단 어리잖아. 그리고 언제는 결혼할 때 나이를 따져가며 혼처를 찾았나?”
클로제가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 물었다.
“……내가 성년식만 지났어도 확 결혼해버리는 건데.”
작게 중얼거린 소리를 들었는지 벨리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뭐?”
“아냐, 아무것도.”
클로제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나 데릭한테 좋아한다고 고백한 것도 아니야. 나도 양심이 있는데. 그 사람이 먼저 눈치채서 튄 거야.”
뻔뻔한 클로제의 말에 벨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없던 두통이 짜르르 생기는 기분이었다.
‘데릭은 대체 뭘 어쨌길래……!’
애가 이 모양이 되는가.
아니. 아니다.
이건 클로제가 문제…….
“하아.”
이젠 누굴 나무라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때 클로제가 씨익 웃으며 물었다.
“그보다 신분으로 반대하는 건 아니네? 난 그걸 더 걱정했는데.”
그 말에 벨리아가 아차 싶었다.
‘그래서 데릭이 셀론 후작가로 들어가지 못하는 거였나?’
클로제가 그의 신분을 알게 된다면 더욱 적극적으로 나올 게 분명하니까.
하지만 셀론 후작이 앞으로 1년도 채 살지 못할 것을 떠올리면, 데릭이 어서 후계자로 나타나 주어야 했다. 카프리에 후작가가 숨겨진 조력자라고는 하나, 더 세력을 넓혀야 할 필요가 있었다.
가뜩이나 최근에 라울과 엘린이 적극적으로 사교계에서 자리를 만드는 통에 영 골머리 썩는 일이 많았는데.
“설마 네가 요즘 흥미가 생겼다는 게 데릭이야?”
“맞아.”
“그만둬.”
단호한 벨리아의 말에 클로제가 얼굴을 찌푸렸다.
“왜?”
“우선 네가 너무 어려.”
“성년식만 치르면 그땐 괜찮아?”
“……클로제. 그는 네가 싫다고 도망간 사람이잖아.”
“무슨 소리야. 데릭은 나 싫다고 도망간 게 아니야. 내가 어려서 그렇지.”
클로제가 양손을 턱에 받치곤 부루퉁하게 말했다.
똑똑.
그때 차분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벨리아. 들어가도 되나?”
칼리드의 목소리였다.
클로제는 그게 신호라도 된 것 마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선 데릭한테 연락 오면 나한테 좀 알려줘, 언니. 나도 내가 어린 거 알고 있어. 그러니 무작정 쫓아다니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러곤 클로제는 문을 열어 칼리드에게 밝게 인사하곤 방을 나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를 모르겠다.
아연한 표정의 벨리아가 멍하니 방을 나서는 클로제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클로제가 데릭을 좋아한대요. 그런데 그걸 눈치챈 데릭이 클로제를 피해서 도망쳤나 봐요.”
어쩐지 진이 다 빠진 듯한 벨리아의 목소리에 칼리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당황한 벨리아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칼리드는 아랑곳 않고 벨리아에게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왜 웃어요?”
벨리아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그에 칼리드가 미소 어린 얼굴로 태연하게 말했다.
“루네스의 마스터라면 지금 여기 와 있을 텐데?”
“네?”
벨리아는 깜짝 놀라 칼리드의 가슴을 밀쳤다. 그러곤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벌떡 일어났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안 그래도 그 얘기를 해주려고 왔던 거였는데. 겸사겸사 꼬마 공주한테 인사도 할 겸.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었군.”
칼리드는 태연하게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깐……. 그가 왜 여기에 있어요?”
데릭이 지금 제국에 있다는 건가? 아니면 혹시 황궁에 와 있다는 뜻일까?
벨리아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입을 벌리곤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마스터한테 부탁한 게 좀 있거든.”
“당신이요?”
무슨 일이길래 정보 길드의 마스터가 직접 움직이지?
벨리아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무튼, 이렇게 고민하고 있기보다는 차라리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낫지 않아?”
칼리드가 그렇게 말하며 씨익, 미소 지었다.
* * *
벨리아는 진료소에 문제가 생겨 급히 둘러보고 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칼리드와 함께 황궁을 나섰다.
데릭이 제국에 있다는 그의 말을 들었을 때도 어이가 없었지만, 그가 지금 진료소에서 치료사로 위장해 머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더 기가 막혔다.
그리고 실제로 진료소 지하에서 데릭의 얼굴을 발견했을 땐 화가 나기보단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듣고 싶군요.”
벨리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러나 데릭은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올 뿐이었다.
“하하. 공주님. 오랜만입니다.”
“그대와 이렇게 편하게 인사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데릭.”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던 벨리아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분명 얼마 전 연락했을 때까지만 해도 제국에 언제 올지 모르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때도 이미 제국에 와 있었다니.
게다가 클로제의 편에 보낸 편지에는 지부를 옮기겠다고만 적혀 있었고.
“대체 무슨 상황인지 설명 좀 해줘요.”
벨리아는 칼리드를 보며 물었다.
데릭이 진료소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서둘러 이곳으로 오느라 아직 제대로 된 설명조차 듣지 못했다.
“으음. 그게…….”
“제게 왜 숨겼는지도 제대로 해명해야 할 거예요.”
자신을 속였다는 것에 분노하며 벨리아가 싸늘하게 말했다.
“일단 진정해, 벨리아.”
“이만하면 충분히 진정하고 있어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데릭의 얼굴을 보면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오를 것 같았는데. 오히려 막상 그를 마주한 그녀의 감정은 무척 고요한 상태였다.
칼리드와 벨리아를 가만히 지켜보던 데릭이 입을 열었다.
“칼리드 전하께서 요청한 일이 있어서 제국 북부에 다녀왔습니다.”
북부?
벨리아가 깜짝 놀라서 칼리드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