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 겨울이 지나고 (78/88)


#78. 겨울이 지나고
2023.07.29.


어느덧 겨울이 찾아왔다.

하아, 하고 입김을 불었을 때 하얗게 김이 서리는 걸 보니 정말로 겨울이라는 것이 실감났다.

벨리아가 지내던 로니카 왕국에 비하면 제국의 겨울은 그다지 추운 날씨라고 할 수는 없었다. 로니카 왕국의 겨울은 뼈가 시릴 정도로 추운 나날들이 이어지니까.


“공주님. 불을 더 땔까요?”

“아니. 괜찮아. 지금은 그리 춥지 않으니.”

벨리아의 말에 다들 신기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혀 춥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단지, 아직은 버틸 만하다는 거랄까.


“그럼 담요라도 더 가져다드릴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연약해 보이는 그녀가 걱정되는지 시녀들이 물어왔다.

결국 벨리아가 웃으며 긍정의 답을 꺼냈다.


“으음. 그래 줄래?”

그러자 시녀 몇 명이 환한 표정으로 담요를 가지러 총총총 방을 나섰다.


‘올겨울은 꽤 알찬 시간이 되겠지.’

내년 겨울에 찾아올 폭설에 대비하기 위해 각 지역 진료소에서 시범적으로 보관하던 장작들과 모포, 식량들을 올겨울에 순차적으로 풀 예정이었다.

무척 다행스럽게도 현재까지 보관 중인 물품들에 이상이 생겼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물론 아예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건설된 진료소 몇 군데에서 습기가 생겨 모포들이 축축해졌다는 보고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관리인이 곧바로 상태를 확인해 전부 바짝 말린 후, 후속 조치를 곧바로 취한 탓에 빠른 수습이 가능했다.


‘정말 다행이야.’

올해 미리 대비하지 않았다면 무척 곤란한 상황이 생길 뻔했다.

그래도 예행을 한 덕분에 다가올 폭설에도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내년 겨울은 겪어본 적 없는 강추위라 더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만, 올해 한번 겪었던 일이니 그때도 무리 없이 대처 가능하리라.


“요즘 재미있는 이야기는 없니?”

벨리아가 남아 있는 시녀들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다들 조금이라도 벨리아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지, 우연히 들었거나 알고 있는 것들을 사소한 거라도 모두 꺼내기 시작했다.


“요즘 칸테리프 공녀가 1황자 전하와 함께 자주 파티에 참여한다고 들었어요. 두 분이 사이가 무척 좋아 보인다고 소문이 자자해요.”

“그러니?”

벨리아가 의외의 소식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울이 엘린 칸테리프와 자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인다니. 이미지라도 관리하는 건가.


“최근 공녀께서 표정이 무척 밝으시대요.”

라울이 자신에게 집중해주니 엘린의 기분이 많이 풀린 모양이었다.

그때 시녀 하나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동안은 1황자 전하께서 매번 공주님을 보느라고 약혼녀인 공녀께 관심을 안 주셨잖아요.”

“쉿! 그런 얘길 하면 어떡해!”

“아니, 다 아는 얘기잖아…….”

민감한 이야기였기에, 말을 꺼낸 자와 말리는 자끼리 투닥거렸다.

그러다 벨리아의 앞이라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죄송해요. 입방정이었어요.”

“저도 죄송해요…….”

벨리아는 시녀들의 투닥거림보다 그 이야기가 여기저기 자연스럽게 퍼져 있다는 게 더 황당했다.

최근엔 벨리아가 외출을 많이 줄인 탓에 라울과 마주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가끔 열리는 파티에서나 볼까.

칼리드가 신경 쓰여서 일부러라도 라울과는 우연히 만날 일도 만들지 않으려 노력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마주치면 일부러 모른 척 지나가 버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소문이 퍼지다니.


“나는 괜찮아.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조금 더 입을 조심해야겠구나.”

“죄송해요, 공주님.”

“반드시 명심하렴.”

흔치 않은 벨리아의 엄격한 모습에 시녀들이 고개를 숙였다. 자신들이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벨리아는 그들이 반성할 수 있도록 잠시 시간을 둔 이후 조금 풀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요즘 황후궁은 분위기가 어떠니?”

그녀의 질문에 침울해졌던 시녀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 한 명이 대답을 꺼냈다.


“그으……. 황후 폐하께서 몸이 조금 안 좋으신 것 같아요.”

“……그래?”

“황후궁에 황궁의도 자주 방문하고 분위기도 전보다 더 가라앉아 있어요.”

벨리아가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래도 아주 위험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아요. 그냥 기력이 좀 떨어진 거라고 하녀들이 얘기하는 걸 들었거든요.”

“맞아요. 황후 폐하의 상태도 더 나빠지진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다행이구나.”

해독제가 제대로 전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모든 게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다. 벨리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렇게 타닥타닥, 타는 장작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벨리아가 생각에 잠겨 있는데, 칼리드가 시녀들이 가져오겠다던 담요를 대신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벨리아.”

2황자의 모습을 발견한 시녀들은 서둘러 그에게 인사를 하곤 모두 방을 나갔다.


“어, 칼리드? 오늘 경비대를 살펴보러 가기로 하지 않았나요?”

“이미 다녀오는 길이야.”

칼리드가 담요를 벨리아의 무릎에 덮어주며 말하자, 벨리아가 깜짝 놀라 창밖을 바라보았다.

언제 이렇게나 시간이 흘렀는지.

창밖은 벌써 검푸른 장막이 내려와 어둑해져 있었다.


“오늘은 어땠어요?”

처음 경비대를 통솔할 권한을 얻고 칼리드가 그들의 현 상황을 살펴보러 갔을 땐, 정말 막막하다며 한숨을 폭폭 내쉬었었다.

기사단이 아닌 경비대였기에 애초부터 기대치가 높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어느 정도의 기본 수준은 될 거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경비대는 그가 운영하는 용병단의 수준을 반의반도 따라오지 못했다.


“그래도 이젠 곧잘 시늉은 해.”

최근엔 칼리드의 부관인 아시드가 경비대에 상주해 그들을 봐주는 모양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경비대를 제대로 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시드를 경비대로 보낸 건 좋은 결정이었어.”

2황자의 직속 호위기사인 아시드가 직접 자신들을 봐준다는 것에 감격한 경비대원들의 사기가 무척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칼리드가 자신들을 통솔하는 것에 대한 반발도 거의 없는 데다 결속력도 훨씬 끈끈해졌고 전반적으로 무척 긍정적인 상황이었다.


“아시드 경이 고생이 많네요.”

벨리아가 쿡쿡 웃었다.

그러자 칼리드가 뚱한 표정으로 벨리아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벨리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칼리드가 되물었다.


“나는?”

“네?”

벨리아가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그와 시선을 맞췄다.


“나도 고생하고 있는데.”

아? 설마 자신도 칭찬해달라는 거였나?

벨리아는 그런 칼리드가 어쩐지 귀여웠다.


“알았어요. 당신도 고생했어요.”

“……진심이 느껴지지 않아, 벨리아.”

칼리드가 뚱하게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그의 커다란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 벨리아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한참 웃고 난 후 벨리아가 숨을 고르며 화제를 전환했다.


“그보다 해독제가 잘 전해지고 있는 것 같아요.”

벨리아는 아까 시녀들이 하던 이야기를 듣고 무척 안심한 상태였다.

황제의 사람임이 분명한 황궁의가 여러 번 오가는 동안에도 황후의 상태에 대해서 크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는 건 그녀가 눈에 띄게 쇠약해지진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틈을 내보이면 황제는 황후의 건강이 무척 좋지 않다는 식의 이야기를 퍼뜨린 후, 자연스럽게 황후를 죽음으로 내몰 것이다. 마치 제가 죽인 게 아닌 것처럼.


“솔직히 정말 걱정했었는데.”

처음 약을 전하던 날에는 들키면 어떡하나, 어찌나 조마조마했던지.

황후가 독을 마시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매우 소수에 불과했고, 그들은 그 독에 대한 해독제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해독제가 존재하는 독이 아니었으니까.


‘설령 황후의 상태가 좋아진다고 해도 우릴 의심하진 못할 거야.’

황후와 첫인사를 나눴던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황후궁에 방문한 적 없었다.

그러니 벨리아나 칼리드가 황후의 음독을 알아차리고 해독제를 만들어 그녀에게 전하고 있다고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하리라.


“이제 슬슬 황후 폐하께서 우리의 결혼식에 참여한다는 소문을 퍼뜨릴 때가 된 것 같아요.”

황후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황궁은 시끄러워질 것이다.

여태 자신이 황후라도 된 양 고개를 치켜들고 다니던 황비도 공식적인 자리에선 황후의 아랫사람일 뿐이었다.

황제의 애정이 있어도, 황비는 황후가 아니다. 결혼식은 그 사실을 망각한 모두에게 황후가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자리가 되겠지.


‘또한 적통 황자는 칼리드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명확하게 알려주는 자리도 될 거야.’

아무리 황비의 입김이 세다고 해도, 적통 황자라는 이름의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다. 그동안 다들 당연한 그 사실을 잊고 있었을 뿐이다.

게다가 이번 결혼식에는 서부 귀족 연합의 수장인 테사 공작도 참석할 예정이었다.


‘테사 공작가가 서부 영지에서 주로 머물기에 다들 공작가의 위상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테사 공작이 자신의 기사단, 가신들과 함께 수도로 온다면 그가 제국 서부의 수장임과 동시에 오롯이 공작에게 충성하는 유일한 기사단을 거느리고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되겠지.

더군다나 벨리아의 외할아버지인 신국의 대신관과 로니카의 왕비도 방문한다.

서부의 테사 공작가와 신국, 로니카 왕국까지.

이 결혼식은 모두에게 2황자의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킬 계기가 될 것이다.


“우리의 결혼식은 무척 화려하게 진행될 거예요.”

그 어떤 결혼식보다도 호화롭고 성대하게 치러질 것이다.


“……얼른 결혼식이 끝났으면 좋겠어요.”

황자비가 되면 할 수 있는 게 더 많아질 테니까.

벨리아가 의미심장하게 후후, 웃음 지었다.


“나도 그래.”

그렇게 말하며 칼리드가 벨리아의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우리가 완벽한 관계로 묶이기를 바라고 있어.”

그는 벨리아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결혼하고 나면 그대를 향한 이 갈증이 조금은 채워질까?”

목덜미에 그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열기가 화르륵 올랐다. 벨리아는 몸을 돌려 칼리드에게 팔을 뻗었다.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시간이 너무 더디게 흘러.”

그와 마주 안은 채로 벨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 어떤 때보다도 간절함을 담아서.


“걱정하지 말아요. 우리가 바라는 것은 모두 이뤄질 거예요.”

 

  

* * *

그렇게 겨울이 끝나갈 무렵.

잉고트 제국에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들이 찾아왔다.


“언니!”

“벨리아!”

클로제와 헤럴드였다.

벨리아는 마차에서 내리는 그들에게 서둘러 달려갔다.


“오라버니! 클로제!”

벨리아가 가까이 다가가자 클로제의 코와 눈이 빨갛게 변했다.

이윽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흐윽. 언니이…….”

“그래, 그래.”

벨리아는 클로제를 안아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었다.

어쩐지 자신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보고 싶었어.”

“나도.”

편지로는 안부를 자주 주고받았지만, 그래도 막상 실제로 만나니 생각보다 더 반가웠다.


“벨리아. 오랜만이구나.”

클로제와 격한 인사를 나누고 있는 벨리아에게 헤럴드가 다가와 인사했다.


“오라버니. 잘 지내셨어요?”

“그럼. 나야 잘 지냈지.”

잠시 벨리아를 살피던 헤럴드가 안심했다는 듯 미소 지었다.


“얼굴이 좋아 보이는구나.”

헤럴드의 말에 벨리아가 씨익 웃어 보였다. 자신이 이곳에서 얼마나 지극정성의 대접을 받고 있는지 알면 분명 까무러칠 것이다.

어쩌면 헤럴드와 클로제는 자신들이 더 힘들었다고 투정을 부릴지도.

상상만으로도 즐거워진 벨리아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이제 정말로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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