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 해독제 (77/88)


#77. 해독제
2023.07.25.


벨리아는 일을 마치고 칼리드의 집무실로 향했다. 어쩐지 다급한 발걸음이었다.

늘 나긋나긋하고 차분한 벨리아가 긴 복도를 뛰듯이 빠르게 가로지르자 2황자궁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이 모두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머, 공주님!”

“전하는 어디 있지?”

“지금 연무장에 계십…….”

집무실에 그가 없다는 소식에 벨리아는 끝까지 말을 듣지도 않고 빠르게 몸을 돌려 궁을 나섰다.

연무장이 왼쪽이었던가.

서둘러 연무장이 있는 곳으로 향하던 벨리아가 멀리서 칼리드의 모습을 발견하곤 천천히 멈춰 섰다.


“하아, 하아.”

조금 빠르게 움직였다고 가쁘게 숨이 찼다.

벨리아는 몸을 숙이고 무릎을 짚은 채 숨을 헐떡이다가, 호흡을 차분하게 고른 후 일어서서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슥슥 빗어 정리했다. 그의 앞에서 자신의 들뜬 모습을 보여주는 건 조금 부끄러웠다.


“후우…….”

좋아.

벨리아는 전혀 뛰지 않은 사람처럼 총총, 새침하게 칼리드에게 다가갔다.


“칼리드.”

칼리드는 검을 휘두르다 자신을 부르는 청량한 목소리에 동작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에 벨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은발이 찰랑거렸다.

칼리드가 그 모습을 보며 머리를 쓸어올려 땀을 닦아내곤 씨익, 웃었다. 훈련이 꽤 고된 편이었는지 그가 입고 있는 셔츠가 이미 젖어 살갗에 달라붙어 속이 훤히 비췄다.


‘왜 옷을 저런 걸 입고……!’

연무장에는 칼리드와 몇몇 기사들만 있을 뿐이었지만 벨리아는 그의 이런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칼리드는 들고 있던 검을 곁에 있는 기사에게 건네곤 벨리아에게 다가왔다.


“뛰어 왔나? 아직 몸도 좋지 않으면서.”

칼리드가 벨리아의 얼굴을 보곤 걱정스럽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벨리아는 일단 부정해 보았다.


“그냥 조금 더워서 그래요.”

겨울을 목전에 둔 이 시기에 더울 리가.

자신이 말해놓고도 말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벨리아가 손으로 부채질하며 민망함을 감췄다. 티가 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곧바로 들켜버리다니.

벨리아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칼리드. 당신의 힘이 필요해요.”

“……여기서?”

그건 무슨 소리지?

의아한 벨리아를 보며 칼리드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태평하게 말했다.


“으음. 아무리 나라도 여기선 좀…….”

“네?”

뭘……?


“아?”

……설마?

벨리아가 깜짝 놀라서 양손을 뻗어 칼리드의 입을 막았다.


 


“한 마디만 더 해 봐요!”

겨우 진정된 벨리아의 얼굴이 다시 새빨갛게 변하자 칼리드는 웃음이 터졌다.


“진짜 부끄러움도 모르고…… 꺄악!”

칼리드가 불만을 표출하는 벨리아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그대로 그녀를 껴안아 번쩍 들었다 내려놓았다.

훈련을 막 마친 탓에 땀을 잔뜩 흘린 그의 몸에서 짙은 체취가 느껴졌다. 하지만 불쾌하긴커녕 괜히 몸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하하. 그래서 무슨 일이야?”

“아…….”

칼리드의 질문에 번쩍 정신을 차린 벨리아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해독제 개발이 완료됐어요. 이전에 말했던 거 기억하죠?”

칼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 폐하의 상태를 중화시켜줄 거예요. 그러니 반드시 전해야 해요.”

칼리드가 벨리아의 말에 씨익 웃으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이미 모두 준비돼 있으니까.”

  

* * *

공연장을 빠져나오며 드레스를 예쁘게 차려입은 엘린이 라울에게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최근 들어서 라울과 엘린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아지면서 이런 가벼운 스킨십은 익숙해졌다.


“전하. 오늘 공연은 어떠셨어요?”

“배우의 연기가 무척 좋더군요.”

게다가 대극장에서 열린 오늘의 공연은 라울이 직접 엘린에게 청해 함께 보러 온 것이었다.

엘린은 지금 이 모든 상황이 꿈만 같았다. 라울이 자신을 위해 노력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들떴다.

그렇게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다가 엘린이 최근에 들었던 이야기에 대해 물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키네트라 남작 영애가 황궁에서 머물렀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사교계에서 꽤 화제였는데. 전하께서도 남작 영애를 만나보셨나요?”

“아아. 물론이지요.”

라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누군가를 떠올리며 미소짓는 게 분명한 그 모습에 엘린의 표정이 잠깐 굳었으나 이내 화사하게 웃으며 물었다.


“어떠셨어요? 무척 사랑스러운 영애라고 들었는데.”

“사랑스럽다라…….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요.”

“아니었다는 말씀이신가요?”

엘린이 궁금하다는 마음을 얼굴에 잔뜩 드러내었다.

사교계에서 한동안 에르제 키네트라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 화제였던 적이 있었다. 그 벨리아 공주가 황궁까지 초대한 사람이라니.

엘린도 따로 키네트라 남작가를 알아보기까지 했다. 그런데 고작 꽃 농장을 운영하는 귀족 가문의 여식이라는 사실에 대체 그녀가 어떻게 벨리아 공주의 초대를 받게 된 것인지 궁금했었다.

라울은 잠시 고민하다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분명 그녀는 사랑스러운 이였지만…… 그보다 더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으니까.”

엘린은 지금 라울이 지칭한 사람이 벨리아라고 확신했다. 아무리 외면하고 싶어도 라울이 아직도 벨리아 공주를 잊지 못했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들려왔으니까.

그래서 저도 모르게 표정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그녀의 불편한 기색을 알아차린 라울이 걸음을 멈추고 엘린을 마주보았다.


“왜 그런 표정을 짓나요, 엘린?”

걱정스러운 얼굴로 라울이 엘린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진 엘린이 웅얼거리며 서운함을 표출했다.

그녀 나름대로는 당당하게 말을 하려 했으나, 코앞까지 다가온 라울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말이 자꾸만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아직도 벨리아 공주에게 마음이 남아있으시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때 라울이 엘린의 말을 단호하게 끊어내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제가 말한 사람은 엘린, 그대예요.”

“네?”

“저와 벨리아 공주에 대한 여러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거 압니다. 어찌 되었든 제가 이전에 청혼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제 약혼녀는 벨리아 공주가 아니라 엘린이에요.”

“전하…….”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기에 엘린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울은 엘린의 손을 정중하게 붙잡았다.


“한동안 그리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던 점, 사과하죠. 분명 많이 서운했을 거예요. 하지만 앞으로는 예전과 같은 일은 없을 겁니다. 그로 인해 그대가 상처받을 일도 없게 할 거고요.”

라울이 붙잡은 엘린의 손을 들어 올려 손끝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 모습에 엘린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그러니 날 믿고 따라와 줄 수 있겠어요, 엘린?”

“……물론이에요. 제겐 전하밖에 없는걸요.”

라울은 수줍게 대답하는 엘린에게 손을 내밀며 다시 에스코트했다. 돌아서는 라울의 표정에는 그림으로 그린 듯한 근사한 미소가 어려있었지만, 그의 눈동자만은 한없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 * *

벨리아는 진료소로 향하는 길에 우연히 스친 라울의 마차에 미간을 좁혔다.

맞은 편에 앉아 서류를 살피던 레이첼이 그런 벨리아의 모습에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물었다.


“공주님. 표정이 좋지 않으세요.”

“아니에요. 그저 조금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요즘 너무 무리하셔서 그래요. 오늘은 저 혼자 와도 되는 일이었는데…….”

실제로 오늘은 그저 몇 가지 확인만 하러 온 것뿐이었기에 굳이 벨리아까지 대동할 필요는 없었다.


“한동안 제가 손님맞이를 하느라고 뜸했으니 한번 들를 때가 되었어요.”

“그래도요.”

벨리아는 그저 말없이 미소 지으며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실 오늘 레이첼과 동행한 이유는 바로 해독제를 받기 위함이었다.

그러고 나면 칼리드가 미리 황후궁에 잠입시킨 시녀를 통해 황후에게 해독제가 전해질 예정이었다.


‘황후 폐하의 젊었을 적 인연이라…….’

지금의 황후가 테사 공녀였던 시절.

모든 부분에서 뛰어난 그녀였지만 기사 가문인 테사 공작가의 후계답게 특히나 검술에 출중한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사교계에서는 테사 공녀의 무용담이 주된 대화거리일 만큼 모든 이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고.

그때 테사 공녀가 도움을 주었던 이들이 많았는데, 이번에 황후에게 해독제를 전해주는 역할을 맡은 시녀가 그때 도움받았던 이의 손녀라고 들었다.


‘인연이라는 게 참 신기하기도 하지.’

황후조차 잊고 있던 인연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도움을 잊지 않았다.

칼리드가 그들을 어떻게 찾아내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가 확실히 믿을만한 사람들이라고 장담했으니 우선 믿어보는 수밖에.


“도착했어요, 공주님.”

레이첼이 진료소에 도착했음을 알리자 벨리아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이후 레이첼은 원래 해야 했던 일을 하러 떠나고, 벨리아는 최종으로 지하 창고를 확인하겠다고 얘기한 후 관리인과 함께 지하로 내려갔다.


“이것인가요?”

벨리아는 지하에 마련된 제조실에서 전달받은 해독제를 꼼꼼하게 살폈다. 생각보다 수량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추가로 제작될 때까지 임시로 버틸 만큼의 양은 되었다.


“생각보다 배합이 까다로워 처음 말씀드렸던 것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솔직히 해독제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정말 고생했어요.”

황후궁에서 몰래 약을 빼돌릴 수는 있었지만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기에 분석이 제대로 될 수 있을지에 대해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걱정을 깨부수고 끝내 해독약을 만들어내었다.

회귀하자마자 루네스와 손을 잡은 것은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추가로 보내주셨던 독이 해독되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효과는 확실하게 나타났습니다.”

칼리드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가장 중요한 열쇠를 지금에서야 손에 넣은 기분이었다.

벨리아는 상자에 들어있는 해독제를 소중히 품에 안았다.


“이 약은 앞으로 계속 만들어주세요. 그리고 혹시 해독제를 이런 방식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한지 확인해주시겠어요?”

“그게 무엇인지요?”

“그러니까…….”

벨리아가 자신이 생각해 온 것을 조심스레 관리인에게 전달했다. 모든 설명이 끝나고 관리인은 턱을 매만지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예 불가능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행이군요. 그럼 부탁할게요.”

벨리아는 그에게 긍정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딱딱하게 굳었던 표정이 풀리고 환하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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