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좋은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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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좋은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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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좋은 소식
2023.07.22.
착잡했다. 입안이 썼다.
칼리드를 마주 볼 면목이 없었다.
“벨리아. 고개 들어. 왜 그러고 있어.”
벨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칼리드는 벨리아가 앉아 있는 자세 그대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푹 숙이고 있는 머리 위에 쪽쪽 가벼운 입맞춤을 하며 속삭였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야. 그대는 호의를 베풀었고 저 여자가 호의를 배신한 거지.”
“……처음부터 호의가 아니었잖아요.”
“뭐 어때. 그거야 그대와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인데.”
칼리드가 씨익 미소 지으며 벨리아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고 들어 올렸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대의 복수를 위해 손을 잡은 사이잖아. 더 나쁜 짓도 벌일 생각인데 이 정도에 상처받지 마, 벨리아.”
“하지만 당신에게도 피해가…….”
“그대는 나 때문에 겪지도 않을 황제의 냉대를 겪고 있잖아. 게다가 망나니 황자와 결혼한다고 모두가 그댈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내가 그 사실에 늘 죄책감을 느끼며 그대에게 미안하길 바라?”
“……아뇨.”
칼리드와 시선을 맞춘 벨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에 칼리드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난 지금도 그 여자를 이곳에서 곱게 내보내 주지는 못하겠다는 생각뿐이야. 그리고 그대의 복수엔 그 여자도 포함되어야 하잖아. 그렇지?”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벨리아가 바라보자 칼리드는 안심하라는 얼굴로 웃었다.
“그대는 아무 신경도 쓰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사지 멀쩡하게는 내보낼 테니 그리 걱정하진 않아도 돼.”
그렇게 말하니 더욱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미 이 사건은 자신의 손을 떠났다. 칼리드의 방에 에르제가 들어온 모습을 기사들과 시종들까지 보았다. 이젠 자신이 수습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더 이상 에르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작은 흔적조차 마주하기 싫었다. 이대로 제 삶에서 ‘에르제 키네트라’라는 사람은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었다.
벨리아는 칼리드의 손에 얼굴을 온전히 기대며 눈을 감았다.
“……미안해요. 부탁할게요.”
“응. 그러니 그대는 마음 편하게 쉬어.”
벨리아의 얼굴을 그대로 품에 안으며 칼리드가 말했다. 그녀에게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칼리드의 얼굴이 잔혹하게 변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는 벨리아를 가만히 안고 그녀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 * *
날이 밝고 에르제는 황궁에 왔을 때와 같이 간소한 차림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황궁에서 점점 멀어지는 마차를 창문으로 바라보며 벨리아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에 칼리드가 에르제를 찾아갔고 둘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대화를 나눴다. 이후 에르제의 방에서 큰 울음소리가 들렸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다.
그녀는 퉁퉁 부은 얼굴로 조용히 짐을 챙겨 벨리아를 찾아와 이만 돌아가 보겠다고 이야기했다. 미안했다는 말과 함께.
‘무슨 대화를 했을까.’
궁금했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벨리아는 커튼을 치고 돌아섰다.
이제 두 번 다시는 에르제를 만날 일이 없을 테니.
그녀와의 긴 악연은 끊어질 것이다.
‘그보다 소문이라니…….’
하지만 에르제와 엮이는 일이 없어졌다고는 해도, 어제 그녀가 말했던 소문에 관해서는 자꾸 신경이 쓰였다.
‘내가 라울에게 여지를 계속 남기고 있다고?’
소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원래 칼리드와 라울,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이런저런 말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칼리드와 자신의 사이좋은 모습을 보고 대부분 사그라들었다고 생각했는데.
“하아…….”
벨리아가 팔로 눈을 가린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쩜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
회귀하고 나서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항상 아슬아슬한 줄 위에서 겨우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벨리아는 손으로 얼굴을 한번 쓸어내린 후 책상에 앉았다. 칼리드는 벨리아에게 아무런 일도 하지 말고 쉬라고 했지만, 아예 놓아버릴 수는 없었다.
대신 이전처럼 무리해서 일을 하지는 않았다.
“공주님. 좋은 아침이에요.”
“레이첼, 어서 와요.”
때마침 레이첼이 환하게 웃으며 벨리아의 집무실에 들어왔다.
얼마 전 레이첼에게 자신을 도와줄 수 있겠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흔쾌히 그러겠노라 답했다.
칼리드의 추천도 있었고, 벨리아도 다른 누구보다 레이첼이라면 안심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기에 그녀가 제 제안을 수락해주었을 때 무척 기뻤다.
물론 극비인 일도 있었기에 레이첼이 모든 일에 관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레이첼은 우선 자선 사업 관련된 일에만 한정해 벨리아를 돕고 있었다.
“오늘은 궁이 조금 소란스럽던데. 무슨 일 있었나요?”
“키네트라 남작 영애가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라 그런가 봐요.”
레이첼은 집무실에 따로 마련된 자신의 책상에 놓인 서류들을 정리하다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군요.”
에르제가 있는 동안 레이첼도 며칠의 휴가를 받았었다. 그래서 그녀가 황궁을 방문하는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키네트라 남작 영애는 잘 지내다 갔나요?”
“글쎄요. 이래저래 일이 좀 있었어요.”
의미심장한 벨리아의 대답에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 움직였다. 그러곤 정리 중이던 서류를 적당히 책상에 올려둔 후, 벨리아가 앉아 있는 책상 근처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조금 야위신 듯도 한데……. 혹시 편찮으셨나요?”
“하하. 역시 레이첼은 못 속이겠어요. 사실 며칠 몸이 좋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정말 괜찮아요.”
밝게 웃으며 말하는 벨리아에게 레이첼이 미간을 와락 구기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제가 전부터 공주님이 너무 무리하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었는데……! 조금 쉬시라고, 그렇게 얘기해도 전혀 듣지 않으시더니!”
쓰러졌다는 사실까지 알면 불을 뿜을 기세라 벨리아가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다가 멋쩍다는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으음……. 안 그래도 그 덕분에 칼리드에게도 많이 혼이 났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책상에 앉아 있는 건 뭐예요. 정말이지……!”
레이첼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더욱 잔소리를 퍼부을 분위기라 벨리아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레이첼의 손을 붙잡고 소파로 가 앉았다.
“하하. 알았어요. 그럼 차 마시면서 조금 이야기라도 나눠요. 오랜만이잖아요.”
결국 못 이기겠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던 레이첼도 벨리아의 맞은편에 앉았다.
곧 시녀가 따뜻한 차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놓아주었다.
벨리아는 따뜻한 홍차를 마시며 레이첼이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못하도록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자연스럽게 ‘소문’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쉬는 동안 잘 지냈나요?”
레이첼이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저야 뭐 늘 똑같았죠. 오라버니들은 같이 놀자면서 시도 때도 없이 자꾸 괴롭히고, 아버지도 제가 공주님 일을 도와주면서 외출이 잦아지니 서운했다고 눈치 주고…….”
카프리에 후작가가 레이첼에게 유별난 사랑을 주는 건 소문으로 들었었다. 화목한 집안이라 생각했는데 당사자에게는 나름의 고충이 있는 모양이었다.
“정말 지긋지긋하다니까요.”
“하하하. 그래도 화목해 보여서 좋네요.”
레이첼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어쩐지 벨리아도 가족들이 보고 싶어졌다.
결혼식을 보러 얼마 후면 가족들이 잉고트 제국을 방문할 예정이긴 했지만, 언제나 가족들에겐 애틋한 마음이 넘쳐났다.
“파티에 참여하는 것도 어찌나 참견이 심한지 몰라요. 옷이 너무 파였다는 둥, 왜 그렇게 꾸미고 가냐는 둥……. 제가 나이가 몇 살인데…….”
“아무래도 걱정되니까 그러시는 거겠죠.”
벨리아의 말에 레이첼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냥 제가 집에만 있기를 바라는 거예요. 제게 온 청혼서도 몰래 다 처리해버렸다는 걸 얼마 전에 알게 됐는데 정말 기가 막혔다니까요?”
레이첼이 씩씩 분노를 표출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벨리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카프리에 후작가에서 애지중지하는 딸인데다 레이첼의 나이면 진작 약혼자가 있을 법도 한데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게 이런 이유였다니.
“레이첼은 만나는 사람 없나요?”
벨리아가 눈을 반짝였다.
“있었으면 이미 그 사람은 아버지와 오라버니 등쌀에 도망갔을걸요?”
어째 머릿속으로 상상이 되는 상황이라 벨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자꾸 웃지 말아요, 공주님. 저는 정말 심각하다고요.”
“후작 부인은 뭐라고 하시나요?”
“그냥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차시며 일단 기다려보라고만 하시더라고요.”
그 말에 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레이첼에게도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았다.
“후작 부인이 나서면 금방 해결되겠군요. 분명 좋은 혼처를 알아봐 주실 거예요.”
“그럼 정말 좋겠는데…….”
레이첼이 찻잔을 만지작거리다 조용히 중얼거렸다.
“공주님과 전하를 곁에서 지켜보니까…… 저도 나중에 서로 많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졌어요.”
그 말에 벨리아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레이첼이 좋은 사람이니까 분명 가능할 거예요.”
“감사해요, 공주님.”
레이첼은 조금 부끄러웠는지 차를 마시며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벨리아가 찻잔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쓸어내리며 물었다.
“레이첼. 혹시 사교계에서 저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돌고 있는지 솔직하게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요?”
“소문이요? 으음, 글쎄요.”
“가령, 제가 1황자 전하에게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거나…….”
그 말에 레이첼은 벨리아의 질문이 무척 무겁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런 소문을 얼핏 들었던 것 같기도 해요. 그렇지만 그건 공녀 주변 사람들만 하는 얘기지 다른 이들 사이에선 그런 의견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어요. 공녀가 유독 공주님께 불만이 많잖아요.”
레이첼은 엘린 칸테리프를 떠올리며 어딘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공주님과 2황자 전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누가 봐도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었는걸요.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공녀가 공주님께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해서 크게 신경 쓸 필요까진 없을 것 같아요.”
“그래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혹시 무슨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벨리아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에 눈치 빠른 레이첼은 더 물어보지 않고 말을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맞다. 잠시만요.”
그녀는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서류 사이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어 벨리아에게 건넸다.
“오는 길에 공주님께 온 편지들을 분류하는 걸 봤는데, 마침 진료소에서 온 게 있어서 가지고 왔어요.”
“진료소에서요?”
벨리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편지를 개봉했다.
편지에는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가 착실하게 잘 되었다는 평범한 내용이 주를 이뤘으나, 중간에 아주 짤막하게 약 개발이 완료되었다는 내용이 암호로 적혀 있었다.
‘드디어……!’
벨리아의 표정이 단숨에 환해졌다.
그 모습에 레이첼이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좋은 소식이라도 적혀 있나요?”
벨리아가 편지를 잘 접으며 말했다.
“네. 월동준비가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에요. 올겨울은 부족함 없이 보낼 수 있을 것 같네요.”
“와아. 다행이에요!”
“그럼 오늘은 보육원 일만 마무리해보죠. 지원 규모나 방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운용 자금도 투명하게 관리해야 하니까.”
“네! 맡겨만 주세요.”
모든 일은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었다.
레이첼과 벨리아는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