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 공주님이 나빠요. (75/88)


#75. 공주님이 나빠요.
2023.07.18.



“칼리드. 이거 봐요.”

벨리아가 방으로 들어온 칼리드에게 눈을 예쁘게 접으며 편지 하나를 내밀었다.


“무슨 편지길래 그렇게 기분이 좋지?”

“어서 확인해 봐요.”

칼리드는 벨리아가 건넨 편지를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편지는 루네스에서 온 것이었다. 내용은 해독제의 완성이 머지않았다는 걸 알리고 있었다. 벨리아가 즐거워할 법한 이야기였다. 최근 해독제 개발이 늦어지는 것에 걱정이 많았으니까.


“다행이야. 계속 진행이 늦어지는 것 같다고 걱정했었잖아.”

“그렇죠? 이렇게 편지를 보낼 정도라면 완성은 금방일 거예요.”

칼리드가 편지를 촛불에 가까이 가져가 불을 붙였다. 그러곤 어느 정도 종이가 타자 빠르게 벽난로에 집어 던져 완전히 재가 되는 것을 지켜본 후 벨리아에게 다가갔다.


“황후궁에 사람을 몇 명 숨겨두었죠?”

“다섯 이상.”

“……그들이 부디 잘해주어야 할 텐데요.”

“차를 몰래 빼돌릴 실력이라면 걱정은 없을 거야.”

해독약을 제조하기 위해 몰래 빼돌렸던 황후의 찻잎. 그것으로 독의 성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때 미리 사람을 잠입시켜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앞으로 황후에게 해독제를 건네줄 아주 중요한 일을 맡게 될 것이다.

칼리드가 벨리아를 끌어안았다.


“그보다 오늘은 나 좀 안아줘, 벨리아.”

힘이 없는 칼리드의 목소리에 벨리아가 고개를 들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살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어제 라울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지?”

“아아. 들었어요?”

벨리아가 민망하다는 듯 웃으며 칼리드의 품에서 빠져나와 그의 손을 끌고 소파에 가서 앉았다.


“그게 사실…….”

“쉿. 잠깐만.”

칼리드가 설명을 하려는 벨리아의 말을 재빨리 막았다. 그러곤 잠시 소리에 집중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인들에게 밤에는 침실 주변에 오지 말라고 일러두었었다. 그들에게 굳이 자신들의 사생활까지 보여주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래서 사용인들은 아주 급한 일을 전해야 할 때가 아니라면 침실 주변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저 오가는 것뿐이라면 방 안에서 알아차리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여기서 문소리가 들릴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칼리드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말했다.


“누군가가 내 방에 들어간 모양이군.”

“네?”

그리고 이 순간 칼리드와 벨리아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오른 얼굴은 바로.

에르제 키네트라였다.

* * *

벨리아의 방과 칼리드의 방은 내부에서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이어져 있었다. 그러니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칼리드의 방으로 갈 방법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방에 무단으로 침입한 자는 방이 이어져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다.


“……칼리드.”

벨리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만약 침입자가 정말 에르제라면 어떡하지?

그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다시 칼리드의 방에 몰래 들어간 거지?


“괜찮아. 쉬고 있어. 내가 알아서 할게.”

칼리드가 작은 소리로 벨리아를 다독였다.

하지만 벨리아는 자신을 떼어놓고 가려는 칼리드의 손을 빠르게 붙잡았다.

이대로 그를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같이 가요.”

벨리아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앞장서서 칼리드의 방으로 통하는 문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손잡이를 돌리는 행동에 망설임은 없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칼리드의 침대에 걸터앉은 에르제의 모습이 보였다.

칼리드가 제 침실을 이용하지 않은 지 오래되긴 했지만, 그의 침대 위에 다른 여자가 앉아 있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에르제. 여기서 무얼 하고 있죠?”

에르제는 벨리아가 나타날 줄은 몰랐는지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낭패라는 듯 한숨을 내쉬곤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방이 이어져 있는 건 몰랐네요.”

벨리아와 칼리드가 등장한 문을 바라보며 에르제가 중얼거렸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벨리아를 차갑게 바라봤다.

에르제가 황궁에 온 이후 저런 표정을 지은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조금 낯설었다.

아니, 사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악의에 찬 탁한 눈빛과 비뚜름한 미소. 이전 삶에서 자신을 보던 에르제가 딱 저런 얼굴이었으니까.

칼리드가 차가운 표정으로 에르제를 내려 보았다.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면 죽여버리겠다고 말했었는데. 벌써 잊어버렸나?”

“전하.”

에르제가 천천히 칼리드에게 다가왔다. 맨발에 안이 훤히 비치는 얇은 모슬린 잠옷 차림. 누가 보더라도 저건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한 차림새였다.


“공주님이 나빠요.”

그녀는 칼리드의 정면에 똑바로 마주 서서 벨리아를 노려보며 말했다.


“저는 공주님을 진심으로 좋아했는데…….”

벨리아는 에르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공주님이 좋은 분인 줄 알았어요.”

“제가 어제 그대를 나무란 것 때문에 지금 이런 행동을 했다고 말을 하는 건가요?”

벨리아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나 에르제가 말을 하는 것보다 칼리드가 더 빨랐다.


“벨리아. 그대가 이야기를 나눌 필요도 없어. 바로 황궁에서 내쫓도록 하지.”

칼리드가 저벅저벅 걸어가 구석에 놓인 종을 흔들었다. 청명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 사람들이 올 거고 넌 치욕스럽게 이곳에서 내쫓기게 될 거야.”

“저는…… 저는 전하를 위해서……!”

“나를? 그대가 무슨 자격으로?”

비아냥이 가득한 칼리드의 물음에 에르제가 분함을 참아내듯 덜덜 떨면서도 제 할 말을 이어갔다.


“고, 공주님께서 1황자 전하와 연인처럼 대화를 나누고…… 확실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건 두, 두 분을 사이에 두고 재고 있는 거잖아요! 저는 그게…….”

칼리드의 표정이 점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상대할 가치도 없군.”

“이미 소문도 다 퍼졌어요! 1황자 전하께서 공주님을 잊지 못하는 건 공주님께서도 여지를 계속 남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다들 그런단 말이에요!”

뭐?

벨리아가 악을 쓰듯 소리치는 에르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1황자 전하께서 ‘작은 오해’를 한 것뿐이라고 공주님의 입으로 직접 얘기하셨잖아요! 분명 2황자 전하와 약혼한 것도 1황자 전하의 질투를 일으키려는 행동일 텐데……. 1황자 전하께서 사랑한다며 황후로 만들어주겠다고 공주님께 말씀하신 것도 제가 전부 들었어요!”

“말이 지나쳐요, 에르제.”

“저는 여러 번 전하께 이 사실을 전해야 할지 망설였지만, 공주님을 위해서 계속 입을 다물었어요. 처음 제가 황궁에 온 날도 1황자 전하와 손을 붙잡고 산책하셨지요?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하신 거죠? 시녀들이 뒤에 있다고 둘이서만 보내는 시간이 부정되나요?”

“……억측이 심하군요.”

“억측이 아니라……! 그래요. 공주님께선 인정하고 싶지 않을 거예요. 알아요. 제가 공주님의 평판을 깎아내릴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정말로 그러려는 건 아니었어요. 그저…….”

에르제가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사랑스러운 얼굴로 속상하다는 듯이 울고 있는 에르제만 본다면 그녀의 편을 들어주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상기된 볼과 불그스름하게 물든 눈가가 그녀를 더욱 애처롭게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죄다 망상에 가득 찬 헛소리뿐이었다.


“저는 그저 2황자 전하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싶었던 것뿐인걸요…….”

에르제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칼리드의 옷깃을 붙잡았다. 하지만 칼리드는 불결하다는 얼굴로 그 손을 빠르게 쳐냈다.


“치워. 그리고 애초에 무엇을 위로한다는 건지도 모르겠군.”

차가운 칼리드의 말에 에르제가 황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 전하……. 저는 정말로……!”

“이 인내심이 전부 사라져서 그대를 그저 내쫓는 게 아니라 황족 모욕죄로 죽여버리기 전에 당장 입 다물어.”

“흐윽…….”

이윽고 시종과 기사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 에르제를 바라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다 이내 칼리드와 벨리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처분은 달게 받겠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차후 이야기를 나누겠다. 우선 이 여자를 끌어내.”

“예!”

기사들은 에르제의 양팔을 붙들고 그녀를 일으켰다.

에르제는 처연한 표정으로 칼리드와 벨리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나 칼리드는 가차 없었다.


“벨리아의 얼굴을 보아 날이 밝는 대로 내쫓도록 하지. 방에 가둬두고 내 명령이 있기 전까지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게 감시하도록.”

“예, 전하!”

 

* * *


 
한밤의 폭풍 같았던 소란이 지나고 고요한 새벽이 찾아왔다.

벨리아는 대체 무슨 일이 지나간 것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테라스의 의자에 발을 올려 무릎을 끌어안고 멍하니 바람을 쐬었다.


‘에르제의 부탁을 애초에 거절했어야 했나……?’

이 모든 일이 자신의 못난 마음으로 벌어진 사단이라 생각하니 죄책감이 자꾸만 가슴을 짓눌렀다.

에르제는 어째서 자신을 미워하게 된 걸까.

처음부터 자신을 미워했던 걸까.

과거와 다르다고 생각했던 건 자신의 착각이었던 걸까.

도저히 칼리드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벨리아.”

하지만 칼리드는 그런 벨리아를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그는 벨리아의 곁으로 다가와 담요를 어깨에 둘러주곤 빈 의자를 끌고 와 바로 코앞에 마주 앉았다.


“……미안해요.”

“뭐가?”

“제가 그녀를 황궁에 들이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 여자가 이런 행동을 할 거라는 걸 알고 허락한 건 아니었잖아.”

“그래도요. 이건 그저 제 욕심이었어요. 제 이기심으로 그녀의 부탁을 들어준 거였어요.”

울컥 서러운 감정이 올라왔다. 벨리아의 보라색 눈동자에 순식간에 물기가 어렸다.

벨리아는 한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리곤 무릎에 팔을 기대어 얼굴을 묻었다. 그러곤 여태 말할 수 없었던 비밀을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에르제는 이전 삶에서 저를 밀어내고 황후가 된 사람이었어요.”

칼리드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벨리아의 뺨을 타고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내렸다.

자신의 고집과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래놓고 오히려 스스로의 감정에 휘둘려 혼자 휘청거리다 쓰러졌다. 제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했다.

벨리아는 칼리드에게 제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더 깊이 파묻었다.


“그녀는 제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보란 듯이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벨리아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모든 게 다 저 때문이에요. 미안해요, 칼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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