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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경고 (74/88)


#74. 경고
2023.07.15.


에르제는 마치 어떤 의무감에 사로잡힌 것처럼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멈추지 않았다.


“두 분은 무척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 보고 계셨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 1황자 전하와 공주님은 누가 봐도 심상치 않은 관계처럼 보였어요.”

“하…….”

칼리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 여자가 벨리아와 라울이 자신을 속이고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가?

에르제는 자신도 이런 얘기를 건네는 게 무척 괴롭다는 양 표정을 찌푸렸다.


“하지만 혹시라도 제가 오해한 거라면 공주님께서 곤란한 상황인 걸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제가 공주님을 구해주었는데 공주님께선 별일 아니라고 하셨고…… 그저 1황자 전하께서 자신을 오해한 거라고 하셨어요!”

에르제는 어딘가 화가 난 표정이었다.

그녀가 무엇에 그리 화가 났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칼리드는 기가 막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구해? 너 따위가?”

“……네?”

칼리드가 꼬았던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고는 천천히 에르제에게 다가갔다.


“내게 무엇을 바라고 이 이야기를 꺼낸 거지?”

칼리드의 목소리는 아무 감정도 들어 있지 않은 것처럼 고저가 없었으나, 오히려 그게 더욱 살벌하게 느껴졌다.

에르제가 떨리는 눈으로 칼리드를 바라보자, 칼리드가 조용히 에르제의 목을 한 손으로 가볍게 움켜쥐고 속삭였다.


“난 그대의 수많은 무례에도 벨리아의 손님이기에 참았어. 그런데 이건 선을 넘었군.”

칼리드가 공포에 질린 에르제의 표정을 보곤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벨리아에 대한 험담을 들어줄 사람으로 보이나?”

만약 그녀가 대놓고 자신을 유혹하려고 했다면 짜증은 나더라도 참아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얘기가 다르지. 자신도 닳을까 무서워 감히 손대기도 무서운 사람을 고작 이런 여자가 건드리려고 하다니.

칼리드가 에르제의 목을 쥔 손에 조금씩 힘을 주었다.


“저, 전하…….”

희게 질린 얼굴로 에르제가 칼리드를 부르며 애원했다. 숨이 넘어갈 듯 꺽꺽거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에르제의 모습을 구경하다 칼리드가 무심한 얼굴로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러곤 나지막이 속삭였다.


“너. 진짜로 죽여버리기 전에 다신 내 눈에 띄지 않도록 해.”

너무나도 평온한 그 말투가 오히려 더욱 잔혹하게 느껴져 에르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칼리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 * *

쾅!

큰 소리로 거세게 열리는 문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라울은 쌓여 있는 서류를 처리했다.

그에 칼리드가 비죽이며 말을 걸었다.


“이젠 아는 척도 안 해주나?”

“……무슨 일인데?”

라울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칼리드를 바라보았다.

칼리드는 자신의 손에 들린 무언가를 앞으로 내동댕이쳤다.


“……이게 뭐지?”

라울이 무감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보면 알잖아.”

시선을 슬쩍 내려 바라본 바닥에는 온몸을 결박당한 누군가가 끄응, 앓는 소리를 하며 쓰러져있다.


“형님께서 잘 아는 사람일 테니 직접 처리하라고 데려왔어.”

칼리드가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어때? 친절하지 않아?”

웃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라울은 그런 칼리드와 바닥을 번갈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모르기는.

본인이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심어둔 놈 중 하나 아닌가. 그것도 꽤 신경 써서 숨겨둔.

이 방의 주인이 앉으라고 말을 꺼내지도 않았지만, 칼리드는 태연하게 소파에 가 앉으며 거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아아. 목이 마르는데. 마실 건 없나?”

“……무례하구나, 칼리드.”

라울이 또 한 번 한숨을 내쉬며 시종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시종이 바닥에 쓰러진 자를 데리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무례한 건 내가 아니라 형님이지.”

“갑자기 찾아와 이러는 게 무례하지 않다고 말할 참이냐?”

라울이 내키지 않는 얼굴로 칼리드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칼리드가 발로 테이블을 밀어 차며 아주 낮고 험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는 형님이야말로…… 양심은 어디다 팔아먹었지? 응?”

라울은 칼리드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동생과 결혼할 여자에게 추근대는 건 너무 한심하지 않나?”

어젯밤 그 여자를 집무실에서 내보내고 나서도 도무지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감히 벨리아와 자신의 사이를 이간질하려 했던 에르제 키네트라에 대한 분노였지만, 그 분노는 이윽고 라울을 향했다.

아무런 일도 없는데 제게 와서 그런 말을 했을 리는 없었다. 해서 그날 온실에 함께 갔던 시녀를 불러 자초지종을 들었더니 실제로 라울과 벨리아, 그리고 에르제 키네트라가 함께 온실을 산책했다고 하지 않는가.


‘제 입맛에 맞게 바꾼 건 있겠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는 거겠지.’

칼리드의 고개가 약간 삐딱하게 꺾였다.


“벨리아가 탐이 나겠지. 뭐, 그럴 만도 해. 워낙 예쁘고 사랑스럽고 매력이 철철 넘치잖아. 그렇지?”

“……비꼬러 온 거냐?”

“비꼬기만 하려고 여기까지 수고롭게 왔겠어, 내가?”

칼리드의 얼굴은 싸늘했다. 그는 테이블을 손으로 짚고 몸을 앞으로 숙여 라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경고하러 온 거야.”

칼리드는 라울을 향해 목울대를 울리는 잔뜩 긁히고 탁한 소리로 경고했다.


“난 잃을 게 없지만, 형님은 아니지. 지금 가진 그 모든 것을 포기할 마음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 부나방처럼 뛰어들지?”

그러면서 입가에 비웃음을 걸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여태 참아주니까 만만했나 봐?”

마음 같아서는 저 재수 없는 얼굴에 주먹이 먼저 나갈 것 같았지만, 괜히 일을 키우면 벨리아가 속상해하겠지. 칼리드는 인내심을 한계까지 끌어모아 꾹 참아냈다.


“네가 참지 않아도 달라질 건 없어.”

하지만 그런 칼리드의 마지막 남은 신경을 라울이 건드렸다.


“지금이야 네가 이긴 것 같겠지. 하지만 말이야…….”

라울은 아주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애초에 그녀는 내 것이었어.”

칼리드는 라울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잠깐 말을 잃었다.


“……망상도 정도껏 해. 돌아버리기라도 했나?”

일단 벨리아를 대하는 태도부터 글러 먹었다.

벨리아는 물건이 아니다. 함부로 갖고 말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큭…….”

라울이 재밌다는 듯 웃는다.

칼리드는 벨리아가 라울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고 했던 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벨리아의 이야기를 할 때 라울의 눈빛은 평소와 전혀 달랐다. 소유욕과 집착으로 가득한 눈동자였다. 혼탁하고 어두웠다.


“칼리드. 넌 모르겠지. 네가 그녀에게 손을 뻗기 이전부터 내 것이었다. 내가 먼저였어. 그건 당연한 사실이고, 변하지 않는 진실이야.”

“……미쳤군.”

“그래. 미쳤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라울이 소파 등받이에 기대며 여유롭게 팔짱을 꼈다.

마치 자신이 승리자인 것처럼.


“넌 아무것도 몰라.”

칼리드는 그런 라울의 행동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봐, 형님.”

그래도 평소엔 똑똑한 척은 하더니 왜 이렇게 멍청이가 되었을까.


“내가 괜히 여태까지 가만히 있었던 건 줄 알아?”

힘이 없어서 참은 게 아니라,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라울이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근처에 계속해서 첩자를 숨겨두는 건 그래서가 아니었나.


“그 알량한 상단과 용병들, 경비대를 말하는 건가? 물론 그 외에도 뭔가 더 숨겨둔 게 있겠지. 하지만 말이야…….”

라울이 가볍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칼리드와 시선을 맞대며 당연한 사실을 읊어주듯 반듯한 표정으로 또박또박 전했다.


“넌 힘이 없어. 그러니 발버둥 쳐 봤자 거기서 벗어나지 못해.”

그 말에 칼리드가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내 대화를 이어갈 마음이 완전히 사라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좋아. 그런데 난 이제부터 형님의 것들을 하나씩 뺏어 올 생각이거든.”

여태 과분할 정도로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으니 좀 나눌 때가 되었지.

칼리드가 집무실을 나서며 미련 없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니 한번 잘 지켜 봐. 내가 빼앗지 못하도록.”

  

* * *

에르제는 호화로운 침대 위에서 멍하니 앉아 생각에 빠졌다.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에서 여태까지의 일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러나 자꾸만 찾아오는 절망에 에르제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자신을 외부의 적들로부터 방어하듯 몸을 둥글게 말고 엎드린 채 에르제가 중얼거렸다.
 

 


“나는 틀리지 않았어…….”

모든 행동은 전부 선의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이 비난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벨리아 공주님이 나빠. 2황자 전하가 있는데 1황자 전하와도 그런 대화를 나누다니.’

황궁에 온 첫날도 둘은 심각하게 대화를 나눴다.

꿈에 그리던 황궁에 오자마자 자신은 버려진 짐짝처럼 팽개쳐졌고, 벨리아 공주는 제게 냉담했다.


‘나는 공주님을 정말 진심으로 좋아했는데…….’

에르제는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벨리아 공주는 이 세상에 저렇게 생긴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게다가 말씨는 우아하고 행동은 고상했다. 저런 가녀린 몸으로 많은 일을 지휘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멋있게 느껴졌다.

가까워지고 싶었다. 벨리아 공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알던 공주님이 아니었어…….’

에르제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주먹을 꽉 쥐었다.

화가 났다. 그렇게 멋있는 2황자와 연인 사이이면서! 한 사람으로는 부족해서 1황자까지 제 손에 쥐고 싶었던 걸까?

황궁에 온 이후부터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바라보던 시선도 어쩌면 그들이 받을 관심과 애정을 빼앗길까 봐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쩐지 벨리아 공주의 이면을 훔쳐본 기분이었다.


“……오해가 아니었잖아.”

벨리아 공주의 입으로 곤란한 상황이 아니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저 1황자가 ‘무언가’를 오해했다고.

사랑한다고, 벨리아를 제 곁에 둘 거라고 1황자가 속삭이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그런데도.


“2황자 전하가 불쌍해.”

나라면 그렇게 두지 않았을 텐데.

나라면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을 텐데.

나라면…….

에르제의 내면에서는 벨리아에 대한 동경과 질투, 실망과 분노가 어지럽게 오갔다.

그리고 그 감정들의 종착점은 칼리드에 대한 연민이었다.


“2황자 전하께선 공주님을 너무 사랑해서 차마 현실을 믿을 수 없는 거야.”

내일 에르제는 황궁을 떠나야 했다. 황궁을 나서면 더는 그와 마주할 순간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그 전에 칼리드를 위로하고 싶었다.

제게 눈에 띄면 죽여버리겠다고 무섭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 또한 그가 너무 상처를 받았기에 나온 말일 것이다. 그는 다정한 사람이지 않은가. 그게 진심일 리 없었다.

에르제는 눈을 감았다.


‘힘을 내시라고, 내가 곁에 있어 드리겠다고…… 그렇게 말씀드리면 좋아하지 않을까?’

그렇게 그의 상처를 어루만져준다면 제게 마음을 열어줄지도 모른다.

내내 마음이 무거웠는데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은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해답을 찾은 에르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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