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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칼리드를 좋아하나요? (73/88)


#73. 칼리드를 좋아하나요?
2023.07.11.


벨리아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그런 벨리아의 옆으로 쪼르르 가까이 다가간 에르제가 눈치를 흘깃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공주님. 아까는 조금 곤란해 보이시던데 괜찮으신가요?”

에르제가 연못이 있다고 소리쳤던 건 의도적이었던 게 분명했다. 그녀의 태도에서 곤란해하는 벨리아를 구하고 싶었다는 마음이 확연히 느껴졌다.

하지만 좀 전의 상황은 남에게 보여줄 만한 광경이 못 되었기에 벨리아는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럼요.”

“제가 괜히 1황자 전하와 함께 가자고 해서……. 저 때문에 불편한 자리에 억지로 오게 되신 거라면 정말 죄송해요.”

오히려 그녀가 이렇게 자신을 신경 쓸수록 더욱 불편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음은 고마워요, 에르제.”

벨리아는 억지로 밝은 표정을 만들었다.


“하지만 정말 별일 아니었답니다. 라울 전하께서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이에요. 그러니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네에.”

에르제의 표정이 조금 침울해졌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벨리아는 흘깃 시선만 움직여 라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는 아까 그 자리에 서서 이쪽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몸을 돌려 홀로 온실을 빠져나갔다. 차라리 잘 되었다.

라울이 기분이 상했든 화가 났든 그건 벨리아가 신경 쓸 일이 전혀 아니었다.


“온실은 마음에 드나요?”

벨리아의 물음에 에르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끊임없이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인공 연못의 가장자리에 쭈그려 앉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마법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지 모르겠어요. 제가 알고 있는 세상의 이치가 고작 한 줌의 지식일 뿐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답답하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해지네요.”

“그대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을 필요는 없어요. 그렇기에 마탑의 마법사들이 존재하는 거니까.”

벨리아가 손가락을 뻗어 부드러운 나뭇잎을 쓸어내렸다. 라울이 떠나간 지금, 온실에는 벨리아와 에르제뿐이었다.

라울과의 신경전으로 이미 진이 빠진 상태였지만, 이곳에 오기 전 시녀들이 꺼냈던 말도 쉬이 넘길 수는 없었다.

벨리아는 주저앉아 연못을 구경하는 에르제의 곁에 나란히 서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며칠 전, 그대가 칼리드의 방에 몰래 들어갔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 그건……!”

갑작스러운 화제에 놀란 에르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다급히 해명하려 하였으나 벨리아는 가만히 말을 이어나갔다.


“수상한 점은 없었다고 조사한 이들이 얘기했으니 그건 사실이겠죠. 하지만 그 행동은 지금 당장 그대를 황궁에서 내쫓아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엄청난 잘못이에요.”

“……죄송해요.”

칼리드가 일을 크게 만들지 않으려 했던 것은 순전히 저를 위한 게 확실했다. 벨리아가 직접 초대한 손님이기에 칼리드도 참았던 거겠지. 하지만 그렇기에 벨리아는 그냥 넘어갈 순 없었다.


“칼리드를 좋아하나요?”

“네? 그, 그게 무슨…….”

에르제는 당혹스러워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날카롭게 관찰하며 벨리아가 다시 한번 물었다.


“그대가 칼리드를 좋아해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묻고 있는 거예요.”

“아니, 아니에요……!”

파르르 떨리는 입술, 불안한 눈빛.


“저는……. 저는 그저…….”

“뭐. 이유는 상관없겠죠. 칼리드도 덮으려는 일을 제가 뒤늦게 캐묻는 것도 우스울 테니. 하지만, 에르제.”

벨리아의 목소리가 서릿발처럼 싸늘했다.


“저는 그대의 모든 무례를 다 참아줄 만큼 너그러운 사람은 아니랍니다. 그대에게 호의를 베푼 제가 실망하지 않도록 남은 시간 행동을 조심해 주세요.”

“네에……. 죄송해요.”

풀 죽은 에르제의 모습을 한동안 가만히 내려보다 벨리아가 이내 평소와 같은 상냥한 얼굴로 말했다.


“시간이 늦었군요.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요.”

이후 온실을 나와 2황자궁으로 돌아가는 길.

벨리아와 에르제,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중앙 정원을 지나쳐 2황자궁까지 걸어가는 긴 시간 동안 적막에 삼켜진 곳에는 오로지 발소리만 저벅저벅 울렸다.

* * *

에르제는 익숙해진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달빛이 들어와 늦은 밤이었지만 복도는 그리 어둡지 않았다.

타닥, 타닥 경쾌한 걸음 소리가 그녀의 기분을 대변하듯 울려퍼졌다.

푹신한 슬리퍼, 부드러운 감촉의 잠옷, 포근한 이불, 호화로운 궁전, 창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정원. 이곳의 모든 것들은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아름답고 설렜다.

어쩐지 공기마저 제가 사는 곳과 다른 것 같은 느낌.


‘이런 곳에서 계속 머물 수 있다면 정말 좋을 텐데.’

에르제의 발걸음이 천천히 멈춰섰다.

중앙궁과 1황자궁이 한눈에 들어오는 테라스로 나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에르제가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았다.

여긴 환상과도 같은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제가 누리는 모든 것들은 마치 금방 사라져버리는 신기루처럼 결코 제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자꾸만 욕심이 생겼다.


‘억울해…….’

벨리아 공주는 모든 것을 가졌다.

상냥하고 자상한 1황자도, 과묵하지만 다정한 2황자도. 동화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멋진 황자님들은 모두 벨리아 공주를 보며 애정을 구걸했다.

감히 그들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자신이 절대 가질 수 없는 마음을 양손에 쥐고 저울질을 하는 벨리아 공주가 어쩐지 야속했다.

특히 오늘은 더했다.


‘정말 억울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다.

우연히 중앙궁 앞에서 1황자를 마주쳤고, 무엇을 할 예정이냐 묻기에 대답을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노려보는 시녀들과 떨떠름한 얼굴의 벨리아 공주를 잊을 수가 없었다.

산책하던 내내 마치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움츠러들던 자신과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벨리아 공주만을 바라보던 1황자.

그리고 이 순간이 지긋지긋하다는 듯 무심한 표정의 벨리아 공주.


‘게다가 내가 공주님을 도와줬는데…….’

그랬는데도 어째서 자신에게 그렇게 싸늘한 태도로 일관할 수가 있나.

게다가 앞으로 조심하라는 협박까지.

실제로 겪어보니 제가 알고 있던 상냥한 벨리아 공주와는 전혀 달랐다.


‘……전부 속고 있어. 오늘 있었던 일도 2황자 전하께선 전혀 모르겠지.’

에르제는 오늘 벨리아와 라울이 나눈 대화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전에 느꼈던 그 미묘한 분위기. 그리고 그들의 대화.

몇 번이고 칼리드에게 위험을 경고하려 했지만 번번이 벨리아 공주가 마음에 걸려 돌아오고 말았다. 하지만 더는 아니다.

에르제의 눈빛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그녀는 몸을 돌려 테라스를 빠져나왔다. 그러곤 자신이 머무는 방이 아닌 반대쪽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 * *

똑똑똑.

보좌관이나 시종들도 다 물러간 늦은 밤.

그 시간까지 여전히 업무를 보고 있던 칼리드의 집무실에 작은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지?”

벨리아는 아닐 것이다.

조금 전까지 벨리아가 곤히 잠든 모습을 지켜보다 집무실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참이었으니까.

그럼 대체 이 시간에 누가…….


“저, 전하. 에르제 키네트라입니다.”

찾아온 자의 정체를 알게 된 칼리드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오늘 저 여자와 함께 온실을 갔다 온 후부터 벨리아의 표정이 무척 어두웠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하지만 벨리아는 애써 웃으며 별일이 아니라고 얘기했다. 그 표정을 보니 도저히 캐물을 수 없었다. 벨리아가 아무것도 묻지 않길 바라는 눈치였으니까.


‘……짜증나는군.’

가뜩이나 벨리아가 저 여자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당장 내쫓아버리고 싶었다.

틀림없이 이전 삶에서 벨리아와 좋지 못한 인연이 있는 자일 것이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으니.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벨리아의 이름으로 초대한 손님이야.’

칼리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냉담한 칼리드와 눈이 마주친 에르제가 당황했는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러곤 눈동자를 굴리며 중얼거렸다.


“아, 그으…….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칼리드가 문가에 기대어 서서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해보라는 듯 턱을 까딱 움직였다.


“그게……. 중요한 얘기예요. 여기서 말씀드리긴 힘들 것 같은데…….”

“그럼 듣지 않도록 하지. 가보도록 해.”

가볍게 축객령을 내린 칼리드가 몸을 돌리려는 찰나.

에르제가 칼리드의 등 뒤에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벨리아 공주님과 1황자 전하에 관한 이야기인데도요?”

또렷하게 들려온 그 말에 칼리드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칼리드는 인상을 쓰며 다시금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에르제는 수줍게 웃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으음. 오늘 온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전하께서도 꼭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더없이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다.

하지만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는 들어봐야 할 것 같다.


“……들어와.”

 

 
칼리드의 허락이 떨어지자 에르제가 그의 곁을 조심스럽게 지나치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곧이어 칼리드가 붙잡고 있던 커다란 문이 쾅,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혔다.

에르제는 집무실을 둘러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태도였다.

그 꼴이 보기 싫었던 칼리드가 집무실에 놓인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며 말했다.


“앉아.”

“네에.”

에르제가 종종걸음으로 걸어와 살포시 칼리드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 할 말은?”

“네?”

“벨리아와 형님에 대해서 내가 꼭 알아야 할 게 뭐지?”

칼리드가 곧바로 본론을 묻자 에르제가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맞잡고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러다 한숨을 포옥 내쉬곤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이걸 전하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래도 전하께선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쓸데없이 서두도 길었다.

칼리드는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들어나 보자는 심경으로 그저 지긋이 에르제를 지켜보았다.


“1황자 전하께서 공주님께 마음이 있다는 건 처음 뵈었을 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오늘…….”

에르제가 큰 결심을 하는 것처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곤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1황자 전하께서 공주님을 붙잡고 사랑한다고 말씀하는 걸 들었어요.”

“……뭐?”

칼리드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그 표정을 지켜보며 에르제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공주님께선 그런 1황자 전하를 뿌리치지 않으셨고요.”

그녀의 말을 계속 듣고 있으려니 피가 차갑게 식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칼리드는 에르제의 말을 끊지 않았다.

에르제는 정말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는 것처럼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2황자 전하 대신 1황자 전하를 선택할 만큼 대단한 걸 자신에게 줄 수 있냐고 물었어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내 앞에서 계속 헛소리를 할 생각인가?”

칼리드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 물었다. 그러자 에르제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정말이에요! 공주님께서 1황자 전하께 북방에서 자라는 꽃을 선물해 줄 수 있냐고 얘기하는 걸 똑똑히 들었어요!”

순간 칼리드가 멈칫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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