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나는 그대를 내 황후로 만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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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나는 그대를 내 황후로 만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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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나는 그대를 내 황후로 만들 겁니다.
2023.07.08.
중앙궁까지 걸어가는 길이 오늘따라 짧게 느껴졌다. 생각이 많아서였을까. 복잡한 마음이 잘 정리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에르제는 오전에 수도를 구경하다 시간에 맞춰 돌아오기로 약속했다. 아마도 지금쯤이라면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온실을 구경하기 위해서 제 도움을 요청하긴 했지만, 시녀들을 통해 여러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후라 이것도 마냥 순수한 의도로는 보이진 않았다.
벨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손님께서 보이시네요. 그런데…….”
벨리아의 곁에 함께 따라오던 시녀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벨리아도 그녀와 같은 장면을 보고 있었다.
왜 지금 에르제가 라울과 함께 있는 거지?
“……황자 전하들을 두고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요.”
“그만.”
투덜거리는 시녀의 말을 막은 벨리아가 목소리를 낮췄다.
“확실한 일도 아닌데 자꾸 말을 보태지 말렴. 황궁은 언제나 입을 조심해야 하는 곳이야.”
“네, 공주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벨리아도 그렇게 말을 하긴 했지만 지금 상황이 어쩐지 마음에 걸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차가워진 눈빛으로 벨리아는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섰다.
“또 뵙는군요, 전하.”
“하하. 오랜만입니다.”
“……대화를 나누는 중이셨나 봅니다.”
“아아. 폐하를 알현하고 돌아가던 길에 키네트라 남작 영애를 마주쳤지 뭡니까. 들어보니 온실에 가려는 참이라던데…….”
“그렇습니다.”
떨떠름하게 벨리아가 대답을 마치자마자 에르제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공주님! 사실은 전하께서 제 얘기를 들으시더니 직접 온실을 안내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가요. 많이 바쁘실 텐데. 어쨌든 감사한 일이군요.”
“모처럼 황궁까지 온 손님이니 잠깐 시간을 내는 건 충분히 가능하지요.”
라울과 에르제가 나란히 서서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상황이 우스울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이번에도 그들의 사이에 괜히 엮이고 싶지 않았다.
“전하께서 시간을 내어주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돌아가 보도록 하지요.”
“네?”
“그대의 부탁은 온실에 가고 싶다는 것이었고, 그대 혼자서는 온실에 들어갈 수 없기에 제게 부탁한 것이었죠. 하지만 라울 전하께서 그대를 안내해 주겠다고 말씀하셨으니 저는 돌아가도 될 것 같군요.”
“고, 공주님!”
냉정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벨리아의 모습에 에르제가 잔뜩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아무리 봐도 의도적으로 어떤 일을 꾸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결국 그녀가 하는 행동은 제게 해로운 것들뿐이지 않나. 설령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지금처럼 라울과 마주친 상황에서 에르제에게 좋은 감정이 생길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함께 가시지요.”
“죄송합니다, 전하. 저도 바쁜 시간을 내어 온 거라.”
라울의 권유에도 벨리아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그러자 라울이 더 환하게 웃음을 짓더니 다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벨리아.”
라울이 부른 제 이름에 벨리아가 라울을 노려보았다.
그는 자신이 곤란하도록 일부러 저런 행동을 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에르제도 있는 이 자리에서 라울에게 무례하다 쏘아붙일 수는 없었다.
벨리아가 목소리를 낮췄다.
“언사를 조심해 주십시오, 전하.”
“여기까지 왔는데 공주를 그대로 돌려보내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않습니까.”
라울은 벨리아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얼굴을 대고 주변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게다가 손님과 약속한 건 벨리아 그대인데 이렇게 남들 다 보는 중앙궁 정문에서 보란 듯이 거절당하고 돌아간다면 꼴이 조금 우스워지지 않겠습니까.”
웃음기가 어려 있는 라울의 목소리가 소름 끼쳤다.
“그러니 이번엔 얌전히 내 말을 듣도록 하세요.”
벨리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 * *
“우와! 소문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워요!”
겨울을 목전에 둔 시기라 바깥은 버석한 차가운 공기가 흘렀다. 하지만 이곳은 마력석으로 사시사철 같은 온도를 유지해서 그런지 훈훈한 온기로 가득했다.
황궁이 자랑하는 유리 온실은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로 가득 채워져 무척 푸릇푸릇 생기 있었다. 그런 생동감이 좋아서 벨리아는 이 온실을 무척 좋아했었다.
물론 지금은 전혀 아니었지만.
“황족에게만 개방된 곳이라 많은 이들이 즐길 수는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라울은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져 따라오는 벨리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네요.”
벨리아의 대답에는 성의가 없었다.
물론 라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신나서 온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에르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참 순수해서 어여쁘지 않습니까.”
벨리아는 대체 무슨 의도로 제게 이런 것을 묻는지 알 수 없었다. 에르제를 칭찬해 주기라도 바라는 것인가.
“……키네트라 남작 영애가 무척 마음에 드신 모양이군요.”
“하하. 질투입니까?”
“누가 들을까 무서운 소리군요. 제가 대체 왜요?”
“제겐 언제나 그대뿐입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계속하실 거라면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군요.”
짜증스러운 어조로 말을 끊어버린 후 벨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라울은 그런 벨리아에게 다가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표정은 따뜻했고 입가에는 다정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벨리아.”
지금은 라울을 매몰차게 끊어내고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벨리아는 짜증스러웠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며 지긋지긋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적당히 하시죠, 전하. 이럴수록 비참해지는 건 제가 아니라 전하예요.”
이렇게 못마땅한 마음을 꾹 참으며 그를 상대해주는 이유는 단 하나.
‘확실하게 알아봐야 해.’
라울이 정말로 이전 삶의 기억을 되찾았기 때문에 태도가 변한 것인지 확인해야 했다.
벨리아는 도박을 해보기로 했다.
“전하께선 저에 대해 무엇을 알고 계시죠? 고작 로니카 왕국에서 마주쳤던 그 찰나의 시간으로 저를 다 안다고 자부할 수 있으신가요?”
“그대의 전부를 알 수는 없겠지만 결국 그대가 제 손을 잡을 거란 사실은 확실하게 알고 있지요.”
“칼리드가 있는데 제가 왜 전하의 손을 잡을 거라 생각하시나요?”
라울이 무어라 말을 하려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꾹 입을 다물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벨리아는 한쪽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물었다.
“제가 칼리드 대신 전하를 선택할 만큼 전하께 엄청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교묘히 칼리드와 비교하며 비꼬는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라울의 입꼬리가 슬쩍 떨렸다.
“바라는 게 있습니까? 저라면 무엇이든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
벨리아는 지금의 라울은 모르지만, 그때의 라울이라면 반드시 알고 있을 사실을 교묘하게 말속에 섞었다.
“북방의 끝에서만 자란다는 ‘두이스타’를 제게 선물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두이스타는 대륙의 가장 북쪽,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산맥에서만 자라는 아주 희귀한 꽃이었다.
벨리아가 그런 꽃을 제게 선물할 수 있냐고 물은 것은 라울의 능력을 시험해보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벨리아가 굳이 이 꽃을 언급한 건 이유가 있었다.
‘네가 나를 그것으로 죽였으니까.’
독을 마신 후의 증상과 차에서 났던 그 특이한 향기, 그리고 몰래 황후의 차를 빼돌려 분석한 결과 알게 된 재료가 ‘두스이타’였다.
두스이타의 뿌리를 말려 우리면 그것은 아주 독특한 향을 풍기며 내장을 태워버리는 독이 되었는데, 바로 이 독이 라울이 벨리아에게 먹였던 차에 들어 있던 것이었다.
‘……라울이 모르는 척한다고 해도 그가 거짓말을 할 때의 습관을 나는 알고 있어. 정말 라울이 두스이타에 대해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확인해 보는 거야.’
사람을 풀어 알아보았을 때 황궁의 의약 제조실에서 일반적으로 제조되는 약은 아니었다. 제조법을 알고 있는 사람은 황제와 약을 제조하는 수석 약제사뿐.
그렇기에 지금의 라울에게 이전 삶의 기억이 없다면 이름을 들어보았더라도 당연히 독과 연관 지어 생각하지 못할 것이고, 기억을 갖고 있다면 두스이타에 대해 모르는 척할 것이다.
“그대를 위해서라면 못 구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고작 ‘두스이타’라니. 벨리아.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귀한 것을 그대의 품에 안겨줄 수 있습니다. 칼리드가 그대에게 해줄 수 없는 것들도 저는 해줄 수 있어요.”
“……그 어떤 것이라도요?”
“물론입니다. 그대가 저를 거절하고 칼리드를 선택했던 것은 그 당시의 제 마음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대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까. 그러니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라울이 자존심을 굽히곤 벨리아에게 애원했다.
그가 모든 것을 내보이며 제게 매달리는 모습은 자신이 알던 라울이 아닌 것처럼 한없이 낯설었다.
“처음에는 그대의 배경에 눈이 갔습니다. 그래서 거짓으로 마음을 감추고 그대에게 다가갔던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칼리드를 선택하고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깨달았습니다. 그대를 향한 제 마음이 진심이었다는 걸.”
상황이 참으로 우스웠다.
그를 간절히 원했을 때는 그토록 매몰차게 자신을 버리고선, 그에게 모든 애정이 사라지고 복수심만 남아 있는 이때가 되어서야 그가 제게 진심이라는 말을 속삭이다니.
“여전히 의심스럽겠죠. 하지만 벨리아. 사람의 마음은 변하는 거라던 그대의 말이 맞았어요. 전 그대가 없으면 안 됩니다. 그대만이 제 곁에 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벨리아는 라울의 표정과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그가 거짓말할 때마다 한쪽 눈을 찡그리던 습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무언가를 감추려 할 때, 혹은 다른 꿍꿍이가 있을 때 왼쪽으로 살짝 기울어지던 고개도 지금은 전혀 미동도 없었다.
‘……내가 착각한 걸까?’
혼란스러웠다. 그렇다면 라울의 태도가 갑자기 변한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이전에 제게 부리던 욕심과는 성질이 전혀 다른 집착이 그의 눈빛에서 넘실거렸다.
이전 삶에 빗대어 생각했을 때 이맘때의 라울은 저렇게 섬뜩한 눈빛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그럴듯하게 잘 포장하는 사람이었지만 아직 때가 덜 묻은 맹수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오랫동안 왕좌에 올랐던 이처럼 노련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가.
‘그가 이전 삶의 기억이 있다면 ‘두스이타’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을 텐데…….’
라울조차 모르는 사소한 습관까지도 모두 꿰뚫고 있었기에 그가 거짓을 얘기하는 순간 단숨에 파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제가 아는 그의 습관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저 그토록 무시하던 칼리드에게 자신을 빼앗겼다는 사실이 그를 이토록 변하게 만든 걸까?
그때 라울이 벨리아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벨리아. 그대를 사랑해.”
“……하.”
사랑이라니. 기가 막혔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벨리아는 자신의 뺨을 쓸어내리는 라울의 손을 거세게 쳐냈다.
그러곤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라울을 그대로 무시하고 지나치려는데 그가 벨리아의 팔을 붙잡았다.
“진심이야.”
“……놓으십시오.”
“기다릴 수 있어. 길을 잘못 들었어도 돌고 돌아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게 될 테니까. 그댄 반드시 내게 돌아오게 되어 있고 난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어.”
“대체 무슨……!”
헛소리를 늘어놓는 라울을 보며 벨리아가 이를 악물고 화를 내려는데 에르제의 높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공주님! 저기 작은 연못이 있어요!”
라울에게서 비켜서며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자 환하게 웃으며 에르제가 다가오고 있었다.
에르제가 이 모습을 봤을까?
아니면 지금 나눈 대화를 들었을까?
벨리아가 짜증스럽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앞으로 제게 말 걸지 마세요. 그땐 이렇게 넘어가 주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곤 벨리아는 그대로 라울을 지나쳐 에르제에게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