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 이면 (71/88)


#71. 이면
2023.07.04.


달콤한 크림을 잔뜩 올린 디저트들이 가지런히 놓인 화려한 그릇들과 장인의 손으로 직접 꽃잎을 섬세하게 그려놓은 찻주전자와 찻잔.

테이블의 가장자리는 꽃 장식으로 사랑스러움을 더했고 티타임을 진행하는 동안 곁들일 수 있도록 상큼한 과일까지 준비해두었다.

화려한 상차림에 에르제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났다.


 


“우와……!”

마치 이런 건 처음 본다는 표정이었다.

그에 벨리아가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편히 앉아요, 에르제. 부족하거나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얘기하고요.”

“정말 이렇게 예쁜 디저트들은 처음이에요.”

“부디 입맛에 맞길 바랄게요.”

“황궁에서 먹는 식사는 전부 맛있었어요! 정말이에요.”

이젠 에르제를 보고 있어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기분이었다.

아주 조금 씁쓸한 마음은 남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전처럼 그녀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마다 의미를 부여하며 힘들어하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전부 칼리드 덕분이었다. 그가 자신을 과거의 잔재에서 구원해주었다.

벨리아는 에르제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날은 많이 놀랐죠?”

“네?”

“제가 몸이 많이 안 좋았었나 봐요. 본의 아니게 그대에게도 곤란한 상황을 만든 것 같아 마음이 쓰이는군요.”

“아니에요! 저는 그저 공주님이 걱정되어서…….”

에르제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어색하게 아래로 향했던 시선을 들어 올려 벨리아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몸은 이젠 괜찮으신가요?”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계속 제 안부를 물었다고 전해 들었는데……. 걱정해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에르제.”

에르제의 뺨이 발그스레하게 붉어졌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이며 배시시 웃음 짓는데, 그 순박한 모습은 과거의 기억으로만 에르제를 바라보았던 벨리아에겐 어쩐지 신선한 기분이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요?”

“황궁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구경도 하고……. 미술품들도 많이 볼 수 있었어요. 맛있는 것도 많이 먹었고…….”

에르제는 그동안 황궁을 누볐던 일들을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는지 에르제가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정원을 산책하다 1황자 전하를 자주 마주쳤어요.”

자주 마주쳤다라…….

그건 과연 우연일까?


“그때 전하지 못했던 감사 인사도 하고 조금 얘기를 나누었는데…….”

벨리아는 에르제의 말에 집중했다.


“1황자 전하께선 소문처럼 모두에게 다정하신 분인 것 같았어요. 저에게도 그리 잘해주시니 괜히 감사하고 기쁘더라고요.”

“1황자 전하께서 잘 대해주시던가요?”

“네! 원하는 만큼 황궁에 머물러도 된다고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원하는 만큼?

벨리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제 손님도 아닌 에르제에게 원하는 만큼 머물라는 말을 건네는 건 라울도 에르제에게 어떤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당한 의문을 품으며 벨리아가 에르제에게 물었다.


“에르제는 황궁에 더 머물고 싶나요?”

“……아. 그게…….”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니 이곳에 더 있고 싶은 모양이었다.

벨리아는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조금 더 머물라는 말을 꺼내진 않았다. 전보다 불편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계속 함께 있고 싶은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1황자 전하께서 에르제를 무척 좋게 보신 모양이에요. 그런 말씀을 쉽게 하진 않으시는 분인데.”

벨리아가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가볍게 말하자 에르제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 아니! 그, 그건 아닌데…….”

“후후. 1황자 전하께서 배려를 많이 해주셨나 보군요.”

“……좋은 분이신 것 같아요.”

부끄럽다는 듯 내뱉는 에르제의 말에 벨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라울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는 게 불편했는지 에르제가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2황자 전하께서도 정말 다정하시잖아요. 공주님을 보살피는 모습에서 저는 정말 감동했어요.”

“그랬나요?”

“전하께서 공주님을 정말 많이 좋아하시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이것은 에르제가 꺼내기엔 주제넘은 말이었다.

벨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응수했다.


“고마워요. 하지만 그건 그대가 제게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군요.”

“아,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정말 죄송해요…….”

에르제가 쭈뼛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기분 좋게 티타임을 같이 하자고 불러놓고 나무란 게 마음이 쓰인 벨리아가 분위기를 바꾸며 밝게 물었다.


“그럼 앞으로 남은 시간은 무얼 하며 보낼 예정인가요?”

“우선 내일 수도 중심가를 구경하고 돌아올 예정이에요. 제가 사는 곳은 근처에 농장밖에 없는 작은 도시라 번화가를 구경할 기회가 잘 없거든요.”

“근처에 유명한 식당도 많으니 꼭 들러보도록 해요. 대금은 걱정하지 말고요. 동행하는 시녀에게도 미리 얘기해둘게요.”

“와아. 감사합니다, 공주님!”

에르제는 안 그래도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벨리아가 아니었다면 혼자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거라며 솔직하게 털어놓는 모습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존심은 챙기려는 여느 귀족 영애들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문득 라울이 이런 색다른 모습을 보고 그녀에게 빠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벨리아가 피식 웃음 짓고는 슬슬 자리를 마무리하려는 찰나. 에르제가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저어, 염치없지만 공주님께 뭐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벨리아가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러자 에르제가 조금 속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제 1황자 전하께 황궁 후원에 온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오늘 그곳에 가보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저 혼자서는 들어갈 수 없다고 얘기하시더라고요…….”

“아. 그렇네요. 온실은 황족들이 이용하는 장소라 허락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죠.”

“그런데 공주님과 함께라면 입장이 가능하다고 하던데……. 혹시 내일 오후에 같이 가주시면 안 될까요?”

갑작스러운 부탁에 벨리아는 조금 당황했지만,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 못 들어줄 것도 없었다.


“그래요. 일정을 조정해 볼게요. 함께 가요.”

그 이후에 에르제라는 이름은 제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름이 될 테니까.

벨리아가 평온한 표정으로 남아 있는 홍차를 마저 비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일 봐요, 에르제.”

  

* * *



“솔직히 말하면 저는 키네트라 남작 영애가 좀 꺼림칙해요.”

벨리아의 머리를 손질해주던 시녀가 뜬금없이 이런 소리를 내뱉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니?”

“그건 아니지만……. 애초에 황궁 구경을 하고 싶다고 부탁한 것도 좀 그렇잖아요.”

시녀들은 대부분 동의하는 표정이었다.

벨리아가 머리 손질을 멈추게 하곤 그녀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차피 곧 돌아갈 손님이잖아.”

“……며칠 전 황궁 정원에서 남작 영애가 1황자 전하와 함께 산책하는 모습을 봤어요.”

“그랬다고 하더구나.”

이미 에르제에게 직접 들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시녀는 그것과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1황자 전하 앞에서 아양이라도 떠는 것처럼 헤실헤실 웃고 있는 표정도 그렇고……. 자꾸 2황자 전하 집무실 근처를 기웃대는 것도 수상하고…….”

벨리아는 재빨리 손을 들어 시녀의 말을 멈추게 했다.

그저 지나칠 수 없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칼리드의 집무실 근처를 기웃대다니?”

벨리아의 질문에 다른 시녀가 불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본 것만 해도 세 번이에요, 공주님. 처음과 두 번째는 길을 잃었다고 해서 제가 다시 안내해드렸는데, 세 번째로 마주쳤을 땐 절 보더니 놀라면서 도망치더라고요.”

말투에 불만이 가득했다.


“나중에 길이 익숙하지 않았다고 변명했지만 전 그것도 이해할 수 없어요. 애초에 손님방과 전하의 집무실은 층도 다르고 거리도 한참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길을 잃었길래 그곳까지 갈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음…….”

그 말을 듣고 보니 이상하기는 했다.

벨리아가 짐짓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그 외에 또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었니?”

“아. 저도 하나 있어요.”

컵에 물을 따라 가져오던 또 다른 시녀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이번에 공주님께서 쓰러지셨을 때 말인데요. 손님께서 공주님의 안부를 물으러 자주 이 방 앞을 서성이곤 했거든요?”

칼리드에게도 그 얘기는 들었다. 자주 찾아와 자신의 상태를 묻고 갔다고. 그러나 시녀의 표정은 그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닌 듯 보였다.


“걱정되어서 자주 찾아오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저희도 공주님이 걱정되어서 계속 들여다보곤 했으니까요. 사용인들 대부분이 공주님 걱정으로 얼마나 침울했었는데요. 그렇지만…….”

시녀의 표정이 구겨졌다.


“손님께서 전하의 방에서 나오는 모습을 발견했을 땐 이건 뭔가 좀 꺼림칙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요.”

벨리아도 그 말에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칼리드의 방에서?”

“바로 옆방이라 헷갈렸다고 변명했지만 거짓말이에요. 이미 여러 번 공주님의 방 앞에서 전하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단 말이에요. 그리고 아무리 헷갈렸더라도 허락도 없이 방 문을 열어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당연한데 어째서 아무도 없는 전하의 방에 들어갔었는지……. 그건 정말 이상하잖아요.”

그 말에는 벨리아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칼리드의 방에 에르제가 몰래 들어갔었다는 사실은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에르제가 누군가의 첩자라면?

물론 모든 중요 서류는 집무실의 금고에 보관하고 있기는 했지만, 혹시라도 큰 사달이 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전하께선 이 사실을 알고 있니?”

“네. 그때 곧바로 말씀드렸어요. 바로 붙잡아서 몸수색도 마쳤고요. 하지만 수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전하께서도 공주님께서 괜히 신경 쓰신다고 일을 키우지 말라고 말씀하셨고요.”

“……그래. 하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였던 거지?”

“당연하죠. 전하의 집무실 근처를 서성였다는 것도, 전하의 방에 몰래 들어갔다는 것도 전부 다 뭔가 노리는 게 있으니까 하는 행동이잖아요. 어쩌면 황궁에 온 것도 황자 전하들께 잘 보이려는 속셈일지도 모르고요. 그냥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시녀의 말에 화가 잔뜩 묻어났다.

벨리아는 차분하게 시녀들을 다독였다.


“……수색했을 때 아무런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면 정말 실수일 수도 있으니 쓸데없이 의심하며 손님께 무례하게 굴진 말렴.”

“당연하죠. 저희는 절대 전하와 공주님께 폐가 되는 일은 하지 않아요.”

믿음직스러운 시녀의 모습에 벨리아가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 정말 그대들이 있어 든든해.”

하지만 의연한 겉모습과는 달리 벨리아는 아주 복잡한 심경이었다.

시녀들이 꺼낸 이야기들을 종합하면 에르제가 칼리드에게 다가가려는 모습처럼 보였으니까.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어떤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이따 만나면 잘 살펴봐야겠어.’

어제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던 순수하고 해맑던 에르제의 모습과 지금 시녀들을 통해 듣게 된 수상한 행동은 머릿속에서 전혀 어우러지지 않았다.

게다가 에르제는 라울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