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 그가 내겐 빛이었다. (70/88)


#70. 그가 내겐 빛이었다.
2023.07.01.



 
끝없는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를 되풀이했다.

그곳에선 처음에는 라울이, 그다음에는 에르제가, 마지막엔 칼리드가 자신의 비참함을 조롱했다. 벨리아는 늪에 빠진 사람처럼 그저 무력했다.


‘사랑에 눈이 멀어 자신의 나라마저 제국에 바친 희대의 악녀라…….’

라울이 남긴 말은 낙인처럼 기억에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그 모든 건 네가 망가뜨리지 않았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라울의 손을 잡은 순간부터, 사실은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가정이 진실이 되어 온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칼리드는 빼앗겼다고 말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던 걸 욕심내었을 뿐.’

적막하고 고요한 황후궁에서 벨리아는 홀로 서 있었다.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낡고 관리되지 않은 황후궁은 마치 벨리아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황후궁의 모든 곳에는 라울이 에르제를 데려왔던 그 순간, 자신이 먼저 그를 놓아주어야 했다는 처절한 후회가 상처처럼 가득 새겨져 있었다.


“벨리아.”

이방인 같았다.

그들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불행은 거름이 되고, 버림받은 이는 격리되어 천천히 나락으로 떨어졌다.

지옥이 있다면 이런 곳일까.

어째서 나는 행복해질 수 없는 걸까.

벨리아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벨리아. 제발…….”

차가운 바닥에 붉은 피가 흘러 이내 웅덩이가 되었다. 흐르는 핏물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그곳에는 차마 눈도 감지 못한 채 죽어 있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이 보였다.

바닥에 고인 것은 모두 제 몸에서 빠져나온 것들이었다. 벨리아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제발.

이 끝없는 악몽을 누군가 끝내주길.

심해에 가라앉은 것처럼 벨리아의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제발 울지 마, 벨리아.”

서늘한 감촉이 벨리아의 뺨을 훑었다.

그 순간 절망뿐인 이곳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이 너무나도 애틋해서 마음이 자꾸 아려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그 시선의 궤적만은 따스하고 밝게 빛났다.

벨리아는 그 빛을 따라가고 싶었다. 지옥 같은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제 곁에 달라붙은 저주와도 같은 말들을 뿌리치며 마지막으로 발버둥을 쳐 보았다.

그리고 겨우 그 빛을 붙잡은 순간.


“…….”

꿈이 아닌 현실로 돌아와 벨리아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뿌연 시야에 칼리드의 물기 어린 푸른 눈동자가 가득 들어찼다.


“……왜 울어요?”

잔뜩 쉬어 갈라진 목소리로 묻자 툭. 하고 눈물 한 방울이 벨리아의 뺨에 떨어졌다.


“응? 칼리드.”

“……그대가, 그대가 일어나지 않을까 봐 조금 무서워지더군.”

“그럴 리가 없잖아요.”

벨리아가 희미하게 웃으며 칼리드에게 손을 뻗었다.

그가 그 손을 잡아주며 자신의 뺨을 기대었다.

손바닥에 닿는 온기가 기분이 좋았다.


“……하루를 꼬박 앓았어.”

“오래 누워 있었네요.”

“과로였다고 해.”

그랬구나. 하고 벨리아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급한 일만 마무리하면 정말 쉬려고 했는데……. 어째 면목이 없네요.”

벨리아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지만 칼리드의 표정은 짐짓 심각했다. 조금 화가 난 표정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한쪽 눈을 찡그리곤 무겁게 입을 열었다.


“시녀들에게 물어보니 나와 함께 먹을 때가 아니면 식사도 잘 챙기지 않았다고 하던데.”

“음…….”

그렇게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벨리아는 변명을 도로 삼키곤 얌전히 그의 말을 듣기로 했다. 전부 자신이 걱정되어 하는 말인 걸 알고 있으니까.


“그대는 일과 멀어져 있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그대의 말대로 급한 일은 대부분 마무리가 되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대의 집무실은 당분간 폐쇄 예정이야.”

심장이 쿵, 떨어지는 말이었다.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몇 개 남아 있는데.

하지만 벨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알겠어요.”

최근 스스로도 굉장히 예민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쁜 일정으로 체력이 부족해지니 정신도 쇠약해진 것일지도 몰랐다.

에르제를 보면서 느낀 부정적인 감정들은 사실 벨리아의 내면에 꼭꼭 숨겨져 있던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그 두려움들이 약해진 틈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고 생각하니 쉬어야 한다는 칼리드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당분간은 그대가 좋아하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거나 간식을 챙겨 먹고 저녁이 되면 나와 식사를 해. 그리고 일부러라도 시간 내어 산책하러 자주 나가고.”

칼리드가 다정하게 벨리아의 머리를 쓸어넘기며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럴게요.”

“그래. 착하다.”

마치 심통 난 아이를 어르는 것처럼 부드러운 말투였다. 그게 우스워 벨리아가 푸흐흐, 하고 웃어버렸다.


“키네트라 영애는요? 어제 많이 놀랐을 텐데.”

“안 그래도 매시간 찾아와 그대의 안부를 묻고 있어. 하지만 그대가 내키지 않는다면 굳이 만나보지 않아도 좋아.”

벨리아는 자신이 싫은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그가 고마웠다.


“……그럼 오늘만요.”

벨리아가 응석 부리듯 말했다.


“내일 상태가 좋아지면 함께 정원에서 차라도 마셔야겠어요. 전에 약속했었거든요.”

“그대가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해.”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너무 깊이 와버렸어.’

칼리드에게 마음을 주지 말았어야 했다.

처음에 다짐했던 대로 그를 사랑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운지.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감정은 이전처럼 돌아갈 수가 없었다.


“다 좋으니까 제발 무리하지만 마.”

그에게서 빛이 났다.

어둠 속에서 빛을 쫓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넘어지고 다치더라도 앞을 밝혀주는 빛을 포기하는 건 불가능하다.

벨리아의 세상에선 칼리드가 빛이었다.

그가 자신을 지옥에서 꺼내 줄 구원자였다.


“무리하지 않을 거예요. 음, 그리고……. 아마도 이젠 다 괜찮을 것 같아요.”

벨리아가 사르르 눈을 접으며 웃었다.

어쩐지 이제야 미련 없이 에르제와의 인연을 끊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황비 전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놓아라! 감히 나를 막는 것이냐! 내 아들을 만나러 온 것이니 당장 비키거라!”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평온하던 라울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곁에서 시종이 안절부절못하며 줄곧 눈치를 보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괜찮다. 어마마마를 안으로 모셔라.”

라울의 허락이 떨어지고 문이 열리자 황비는 평소의 우아한 태도가 전혀 보이지 않는 과격한 모습으로 라울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네가 비고에서 티아라를 꺼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사도 없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꺼내는 그녀의 목적에 라울이 피식 웃어버리곤 농담처럼 한껏 가벼운 어조로 답했다.


“꺼내었다 다시 도로 집어넣었지요.”

하지만 그 태도에 황비는 더욱 화가 나 소리쳤다.


“로니카의 공주에게 주려고 말이냐? 네가 제정신인지 모르겠구나!”

“물론 제정신입니다.”

라울은 업무를 보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가서 편하게 앉았다. 그러곤 시종에게 손짓했다.


“어마마마께서 목이 많이 마를 것 같으니 차 대신 물을 가져오도록 해.”

“예. 알겠습니다.”

그 기막힌 태도에 황비가 하, 하고 헛웃음을 크게 내뱉었다.


“네가 요즘 정말로 이상해진 것 같구나. 전혀 이성적이질 못해.”

“고작 비고에서 티아라를 꺼냈다고 이리 달려오신 어머니보다는 제가 더 이성적이라 생각하는데 이상하군요.”

라울은 고작 티아라 때문에 이리 자신을 피곤하게 하는 황비가 조금 짜증이 났다.

거만하게 다리를 꼬며 황비를 아래로 내려 보던 라울이 입을 열었다.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이리 찾아온 이유를 말씀하세요, 어머니.”

“네가 그 공주에게 여전히 목을 매고 있다는 사실을 온 황궁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 칸테리프 공녀와 약혼까지 했으면서 대체 어쩌려고 자꾸 이러느냐.”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땐 그리 마음 쓰지 않는 것 같더니 왜 이제 와 미련이 남았어. 로니카의 그 계집이 네게 어떤 수작이라도 부린 게냐?”

황비의 말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라울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비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벨리아가 제게 어떤 수작을 부렸다고?

그랬다면 이리 안달 내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네가 꺼내어 갔다는 것들의 목록을 듣고 내 얼마나 기가 찬 줄 아느냐! 이 어미도 한번 사용하지 못했던…….”

“이러니저러니 하셔도 결국 그게 분하셨던 것 아닙니까. 안 그렇습니까?”

황비가 이리 난리를 치는 것처럼 벨리아도 제 선물을 받고 조금은 흔들렸을까. 차갑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과 끔찍하다는 표정이 언제면 바뀔까.

라울은 제 어미인 황비를 눈앞에 두고도 끊임없이 벨리아를 떠올렸다.


“어머니에게 그 티아라들은 과분하지요. 하지만 벨리아에겐 당연한 것들입니다.”

“대체 그게 무슨……!”

라울이 꼬았던 다리를 풀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러곤 경고를 섞어 황비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저는 벨리아를 황후로 만들 생각입니다. 그러니 어머니께서도 언동을 조심해 주시지요.”

황비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너,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 네겐 칸테리프 공녀가…….”

그러나 라울은 황비의 말을 무시하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가만히 창가에 기대서서 정원 너머의 2황자궁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저곳에서 벨리아를 끌고 오고 싶다는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참아야 할 때다.


“그리 말씀하지 않으셔도 황제가 되기 전까진 칸테리프 공녀에게 잘 대해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머니.”

라울의 목소리가 이전과 같이 다정해졌다.

그에 황비도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겐 공작가의 힘이 필요해. 폐하의 가호가 있어도 귀족들의 힘을 얻지 못하면 소용이 없으니까. 알고 있겠지?”

“물론이지요.”

그러니 제 곁에 엘린 칸테리프가 서 있는 것도 참고 있는 게 아닌가.


‘아쉽게 됐어. 벨리아가 ‘태양의 환희’를 머리에 올려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는데.’

라울은 피식 가벼운 웃음을 흘리곤 노을에 물들어 붉어진 2황자궁을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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