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불쾌한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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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불쾌한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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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불쾌한 선물
2023.06.27.
벨리아는 어이가 없었다.
자꾸만 제게 기이한 관심을 보이는 라울이 본능적으로 꺼림칙했다.
막상 연인이 되었을 때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진정한 사랑이었다며 처참하게 버린 주제에. 이제 와선 아무리 공을 들여도 제 손에 들어오지 않으니 그게 분하고 신경 쓰이는 모양이지?
“……하.”
꼴에 무례라는 건 알고 있었는지 티아라와 함께 동봉한 편지가 우스웠다.
벨리아는 편지를 빠르게 읽어내려간 후 이를 악물며 그 편지를 구겨버렸다.
“공주님. 황자 전하께서 보낸 물건이라 거절할 수가 없었어요. 정말 죄송해요.”
“아니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 괜찮아.”
그가 보낸 티아라는 총 세 개였다.
세 개의 티아라를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고 벨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반짝이는 티아라들을 보니 조금 심란해졌다.
‘우연일까.’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전 삶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주는 걸까.
‘어떻게 이것들이…….’
이전 삶에서도 라울은 제게 세 개의 티아라를 선물하곤 하나를 고르게 했었다.
그리고 벨리아는 이 중 성녀의 축복이 깃들어 있는 티아라를 골랐었다.
물론 이 세 가지의 티아라 모두 잉고트 제국의 황실에서 아주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었다.
“세상에! 공주님 이건 여제 카를리나님이 즐겨 사용했던 티아라잖아요! 초상화에서만 보던 걸 실제로 보다니……!”
“이건 성녀 아렌님이 직접 신력을 부여한 ‘태양의 환희’예요.”
시녀들은 벨리아의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티아라를 보고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것들은 모두 얼핏 들어도 대단한 역사가 담겨 있는 값진 티아라들이었으니까.
“황비 전하께서도 이것들은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하셨어요. 이걸 어떻게…….”
“이것들 중 하나를 결혼식에서 착용하신다면 분명 사교계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거예요.”
알고 있었다. 분명 이 중 하나를 사용한다면 자신의 입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미 제국민들 사이에서는 칼리드에게 호의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걸 발판 삼아 사교계에도 그 분위기를 퍼뜨리려 했지만,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오만한 귀족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쉽게 바꾸려고 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황비조차 사용하지 못했던 엄청난 역사가 담겨 있는 티아라를 2황자의 결혼식에서 사용한다면 사교계의 관심은 자연스레 결혼식으로 향할 것이고 그 관심은 이윽고 결혼식의 주인공인 칼리드에게까지 닿을 것이다.
‘그 관심을 이용한다면 여론을 바꾸는 작업이 무척 수월해지겠지.’
하지만 라울이 선심 쓰듯 보내준 이 티아라들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대체 어떤 꿍꿍이가 있을 줄 알고.
“……우선 이것들은 다 돌려보내야겠구나.”
게다가 애초에 눈여겨보고 있던 티아라가 있었다.
지금의 황후가 황제와 결혼하며 제작했던 커다란 자수정이 박혀 있는 티아라였다.
“그리고 논란이 일지 않도록 오늘 중으로 티아라를 선택해서 폐하께 말씀을 드려야겠어.”
“편지지를 가져올까요?”
“아니. 굳이 답장을 쓸 필요는 없지. 그저 도로 돌려드리고 성의는 감사했다고 말만 전하렴.”
시녀는 곧바로 티아라를 조심스레 상자에 도로 담고는 그것들을 꼼꼼하게 챙겨 들고 나갔다.
이 정도의 일은 그저 해프닝에 불과하다.
라울이 제게 결혼식에서 사용할 티아라를 보냈다는 것을 아는 이는 아직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 바로 현 황후의 티아라를 사용하겠다고 결정한다면 라울의 호의를 거절한 것에도 명분이 생기고, 그가 보낸 선물에 고민하는 시간도 매우 짧았으니 악질적인 소문이 퍼지는 것도 막을 수 있다.
‘그렇지만 뭔가 찜찜하단 말이지.’
도대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걸까.
뭘 바라서 자꾸만 이렇게 대놓고 수상한 행동을 하는 거지?
벨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면 지난번에 자신을 붙잡고 보였던 기이한 집착도 이상했다.
‘게다가 뜬금없이 이전 삶과 똑같은 티아라를 보낸 것도 수상해.’
죄다 이상한 것투성이었다.
‘설마.’
벨리아가 떠오른 생각을 부정하려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아닐 거야.’
요즘 한껏 예민해져서 그런지 말도 안 되는 가정이 떠오르곤 한다. 벨리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혹시 라울도 자신처럼 이전 삶의 기억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의심이 들다니.
“…….”
하지만 헛웃음도 금방 멈춰버렸다.
억지로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혹시 모르니 기회가 있다면 떠보는 것도 좋겠지.’
벨리아는 자신의 이런 예감을 흘리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평소보다도 과하게 예민한 것도 맞다.
하지만 만약에 이 예감이 사실이라면 그게 더 곤란하지 않겠는가.
마냥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기엔, 이미 과거로 회귀한 자신이 여기에 있었다.
‘처음 로니카 왕국에서 만났던 라울은 분명히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어.’
그러니 그가 자신처럼 회귀했을 거라는 생각은 지워버렸었다.
하지만 지금의 라울이 조금 이상한 것도 사실이니까.
‘차라리 뭐든 의심하고 보는 게 나아.’
벨리아는 서둘러 펜을 꺼내 들었다.
우선은 이전보다 더 신경써서 라울의 행적을 감시해야 할 것 같았다.
* * *
벨리아는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중앙궁의 비고를 찾았다. 황제에게는 미리 이야기해 둔 터라 출입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곳에서 벨리아는 황실이 보관하고 있는 보석들과 귀중품을 꼼꼼하게 살펴 결혼식 당일 착용할 목록을 작성했다.
처음 생각과 변함없이 황후의 자수정 티아라를 고른 후 그와 어울릴 귀걸이와 목걸이까지 골라두었다.
“공주님.”
아까 오전에 라울에게 티아라를 돌려주고 오라고 얘기했던 시녀였다. 그녀의 손에는 티아라가 들어 있는 고급스러운 상자 세 개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건…….”
“티아라와 함께 공주님의 전언을 전했더니 1황자 전하께서 티아라는 그대로 비고에 도로 가져다 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고스란히 가지고 이곳으로 온 거겠군.
벨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다른 말은 없었니?”
“네. 그저 공주님께서 무슨 말을 전하라 하였냐고 물으시고는 그 이후엔 별다른 말씀 없이 그저 가보라고만 하셨습니다. 1황자 전하께선 공주님께서 거절하실 거라고 이미 예상한 것 같은 표정이었어요.”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지?
벨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시녀의 손에 들려 있는 상자들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상자들을 아무리 노려본다 한들 뭐가 보일 리는 없었다.
벨리아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상대의 작은 행동마저 지나치게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제 행동이 스스로도 고단하게 느껴졌다.
“……그렇구나. 고마워. 그럼 티아라는 관리자에게 전달하렴. 나는 마저 골라야 하니 일을 마치고 나면 2황자궁으로 먼저 돌아가도 좋아.”
벨리아는 시녀에게 고생했다고 전한 후 다시 비고를 둘러보았다.
그러곤 혹시라도 결혼식 당일 제가 고른 물건들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대체할 장신구도 지정해둔 후 비고를 빠져나왔다.
‘지친다…….’
휴식이 필요한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는데 이렇게 매 순간 날이 서 있다면 오래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오늘 많은 일을 처리했다. 드레스 초안을 결정했고, 급히 보내야 하는 초대장도 어느 정도 마무리했으며, 결혼식에 사용할 장신구도 모두 결정했다.
벨리아가 숨을 크게 내쉬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이미 타는 듯한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미 생각해둔 티아라가 있으니 금방 고르고 나올 줄 알았는데 막상 비고를 나오니 생각보다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벨리아는 서둘러 2황자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삐 발걸음을 놀렸다. 그리고 얼마 걷지 않았을 때 중앙 정원에서 익숙한 인영을 발견하고 벨리아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아…….”
어째서지?
왜 에르제와 칼리드가 저곳에서 같이 있는 거지?
거리가 멀어 그들의 말이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수줍게 웃고 있는 에르제와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들어주는 칼리드의 모습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묘한 기시감이 벨리아의 마음속을 엉망진창으로 휘저었다.
꽃같이 어여쁜 에르제가 해사하게 웃을 때마다 발밑에서 음습한 감정이 조금씩 벨리아를 잠식해나갔다.
한 발 한 발 그들에게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한계에 다다른 기분이었지만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에르제에게 또다시 열등감을 느낀다는 건 정말 비참할 것 같았으니까.
“칼리드.”
벨리아의 부름에 칼리드가 돌아보았다.
그러곤 그가 환하게 웃었다.
“공주님!”
에르제가 사랑스럽게 웃으며 저를 바라보았다.
“저는 결혼식 준비로 중앙궁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이랍니다. 둘은 어떻게 이곳에……?”
벨리아의 물음에 에르제가 눈을 접으며 답했다.
“아! 방금 중앙 정원을 산책하다 황궁으로 돌아오신 2황자 전하와 마주쳤어요. 마침 지난번 바자회에서 제 얘기를 잘 들어주셨는데 감사하다는 인사를 못 했던 게 생각나서 그 얘기를 하던 중이에요.”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깔끔한 설명.
하지만 벨리아는 마주 웃어줄 수 없었다.
악몽 속에서 그들이 입을 맞추던 모습이 떠올랐다.
따뜻한 눈빛으로 에르제를 바라보던 칼리드와 그런 그에게 안겨 있던 에르제의 모습이 환각처럼 자꾸만 그들에게 덧입혀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스쳐 가는 잔상은 바닥에서 싸늘하게 죽어가는 제 모습이었다.
“벨리아?”
속이 울렁거렸다. 미쳐가는 기분이었다.
분명 괜찮았는데. 단 한 번도 이전 삶의 잔상에 휘둘려 이토록 감정조절이 어려웠던 적은 없었는데.
벨리아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 오늘 조금 피곤했나 봐요. 그래서 인사는 전부 나누셨나요?”
에르제는 벨리아의 물음에 칼리드를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제 얘기를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전하.”
그러고는 벨리아를 향해 미소 지었다.
“이제 끝났어요. 깜빡하고 감사 인사만 쏙 빠뜨렸지 뭐예요. 하하.”
에르제의 맑고 고운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 웃음소리가 자꾸만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벨리아를 찔렀다.
“……공주님?”
에르제도 벨리아의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는지 걱정스럽게 벨리아를 불렀다.
칼리드가 벨리아의 파리해진 안색을 확인하곤 재빠르게 곁으로 다가가 부축했다.
하지만 칼리드의 손이 벨리아의 어깨에 닿는 순간.
타앗,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벨리아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
“벨리아……?”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벨리아도 제 행동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허공에 멈춰버린 칼리드의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건…….”
벨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칼리드가 곧바로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벨리아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그러곤 놀란 표정의 에르제에게 말했다.
“키네트라 남작 영애. 아무래도 벨리아가 몸이 많이 안 좋은 모양이야. 먼저 가보도록 하지.”
“아……. 네, 어서 공주님을 안으로 모시는 게 좋겠어요.”
어딘가 멍한 에르제의 목소리가 귓가로 들렸지만 벨리아는 자신이 칼리드를 뿌리쳤다는 충격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칼리드.”
“괜찮아.”
칼리드가 벨리아를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온몸이 차가웠다.
“괜찮아, 벨리아.”
벨리아에게 다정하게 속삭이며 2황자궁으로 돌아가는 칼리드의 걸음이 다급해졌다.
그런 그의 품에서 의식은 서서히 멀어졌다.
하지만 희미해져 가는 감각 속에서도 벨리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에르제를 황궁에 들인 건, 명백한 자신의 실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