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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질투나 (67/88)


#67. 질투나
2023.06.20.



 


“그걸 왜 그대에게 요구하지? 늙은이가 노망이라도 난 건가.”

사실 샤네탄 대로의 개방처럼 중대한 사안은 로니카의 국왕과 직접 이야기를 나눠야 할 일이었다.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벨리아에게 꺼냈다는 것은 이미 로니카의 국왕과 이야기를 나눴으나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저 로니카 왕국에 얘기 좀 잘해보라는 식이었어요. 괜히 찔러나 보는 것 같아요.”

칼리드는 의자에 깊이 등을 기대었다.


“……곧 정복 전쟁이 시작될 거라는 건가.”

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도 최대한 늦출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봐야죠.”

황제는 로니카 왕국을 넘어서 야쿰 왕국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야심 속에는 로니카 왕국까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전 삶에선 벨리아가 1황자비로 자리를 잘 잡아가는 것처럼 보였기에, 차기 황후의 모국을 침공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게다가 처음 샤네탄 대로를 개방했을 땐 정말로 양국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긍정적인 효과가 많이 일어났으니까.


‘그래서 방심했어…….’

그 모든 것들이 익숙해지고 아무도 제국을 의심하지 않을 때.

황제가 된 라울은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황후를 가둬두고 로니카 왕국을 침공했다.

일부러 벨리아에게로 전해지는 모든 정보를 차단했고, 벨리아는 자신의 나라가 무너지는 그 순간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벨리아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번엔 그렇게 두지 않을 거예요.”

그래. 잊지 말아야 했다.

의식적으로라도 계속 자신을 채찍질해 조금도 흐트러지지 말아야 했다. 한순간의 방심이 나락으로 향하는 지름길이 될 테니까.

그러니 아무리 지금 즐겁고 행복하더라도.


‘……잠깐의 행복에 취해 목적을 등한시할 수는 없어.’

황제가 샤네탄 대로의 개방을 요구한다는 것은 그 모든 일의 시작이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시간을 끌 방안을 마련해야 해요. 적어도 내년 겨울을 지날 때까지만이라도 버텨야 하니까.”

유례없는 한파가 찾아와 혼란에 빠진 제국을 빠르게 안정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만들어질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버틴다면 제국이 영토 확장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기 전, 본격적인 황위 쟁탈전이 일어날 것이다.


“아, 그리고 개인적으로 원하는 게 있냐고 물으셔서 하나 말씀드리긴 했는데…….”

그때 벨리아가 뺨을 긁적이며 난감해하다 입을 열었다.


“화내지 말아요?”

“화 안 내. 내가 그대에게 화를 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칼리드의 다정한 말에 벨리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으음. 우리 결혼식에 황후 폐하와 함께 와달라고 했어요.”

“……뭐?”

“상의해야 했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놓칠 순 없잖아요.”

벨리아는 열심히 변명해 보았다. 그러면서 슬쩍 칼리드의 표정을 살폈다. 예상과는 달리 그는 생각보다 그 사실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벨리아가 의아해하자 칼리드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개인적인 감정을 끼워 넣을 만큼 어머니께 남아 있는 게 없어서.”

그러고는 황후와 황제가 결혼식에 함께 나타났을 때 얻을 수 있는 이득을 빠르게 계산한 칼리드가 물었다.


“그걸 들어준다던가? 황제라면 분명 거절했을 텐데.”

칼리드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벨리아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내키지 않아 했지만, 우리의 결혼식에 신국의 대신관께서도 오시는데 황후 폐하께서 자리에 없다면 이상하지 않겠냐고 했죠.”

오호. 하고 칼리드가 감탄했다.


“신국을 끌어들인 건 정말 잘한 일이야.”

“맞아요. 뭐든 핑계 대기에 너무 좋은 이름이죠.”

벨리아가 즐겁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어쨌든 로니카 왕국과 신국에 흠 잡히는 결혼식은 하고 싶지 않다고 그랬더니 승낙해주더라고요.”

“그 늙은이라면 체면이 상하는 건 못 견딜 테니까.”

칼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못마땅했겠지만 벨리아의 요청을 결코 거절하지 못했으리라.

쾅!

그때 어디선가 큰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우당탕탕 요란스러운 소리가 뒤따랐다. 처음 들렸던 소리는 벽을 타고 공간이 울릴 만큼 커다란 소리였다.

소란스럽지 않고 늘 차분한 2황자궁에서 이런 큰 소음이 들린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손님이 온 것 같더군.”

“아. 맞아요. 키네트라 남작 영애가 오늘 황궁에 도착했어요. 방금 들린 소리가 심상치 않던데 잠깐 나가봐야겠어요.”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흘리며 벨리아가 상황을 살피러 밖으로 나가려는데 하녀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전하.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벨리아는 칼리드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눈짓한 후, 혼자서 조용히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여긴 괜찮아. 그렇지만 무슨 소리인지 확인을 해 봐야겠구나.”

“그…… 손님께서 침대에서 떨어지며 난 소리예요.”

침대?

벨리아는 의아한 표정으로 한 손을 들어 뺨을 감쌌다.


“키네트라 영애가 다치진 않았니?”

“네. 큰일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구나. 알려 줘서 고마워.”

에르제가 배정해 준 방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던데.

아무래도 한껏 신나 하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 모양이었다.

벨리아가 피식 웃어버리곤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별일 아니었어요.”

“그래?”

칼리드가 턱을 매만지다 말했다.


“미안하지만 키네트라 남작 영애는 그대가 온전히 신경 써야 할 것 같아. 요즘 할 일이 많아 여유가 없군.”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그런데…….”

“응?”

벨리아는 칼리드에게 에르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고 싶었다. 혹시 그녀를 보고 있으면 어떤 새로운 감정이 느껴지진 않느냐고. 조금 신경이 쓰인다거나 혹은 자꾸 눈길이 가진 않느냐고도.

하지만 갑작스럽게 그녀에 대해 물으면 칼리드는 분명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아까 에르제도 칼리드가 아닌 라울에 대해 더 궁금해하는 눈치였어.’

둘의 접점이 없는데 미리 고민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벨리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어버리곤 말을 돌렸다.


“아니에요. 레이디 에르제는 제가 신경 쓸 테니까 당신은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을 해요.”

“……말하고 싶지 않은 걸 억지로 묻진 않겠어. 그런데 벨리아. 그대가 스스로 어려운 길을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남작 영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곧바로 내쳐도 좋아. 그대는 그래도 되는 위치야.”

칼리드가 다정하게 말하며 벨리아의 뺨을 손가락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그는 벨리아가 일부러 에르제를 황궁으로 들였다는 사실을 아는 듯 보였다. 그게 그리 좋은 의도가 아니라는 것 또한.

칼리드가 제 속내를 훤히 들여다본 것 같은 기분에 벨리아가 민망한 웃음을 흘렸다.

그가 제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에르제는 라울에게 관심이 있어 보였다. 칼리드는 그녀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 여태 했던 생각들은 온전히 과한 상상력이 불러온 기우가 분명했다. 그러니 벨리아는 쓸데없는 걱정은 털어버리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편히 가라앉히려는 찰나, 칼리드가 입을 열었다.


“그럼 다시 돌아가서. 라울이 정확히 뭐라고 했지?”

황제와 에르제에 대한 이야기로 겨우 말을 돌렸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보다.

칼리드가 잊지도 않고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에 벨리아는 조금 곤란해졌다.


‘으음. 어쩐다…….’

아무래도 완전히 피해가긴 어려울 것 같은데.

결국 벨리아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자기를 거절하기 위해 당신의 손을 잡았냐고 묻더라고요.”

“하…….”

칼리드는 한 치의 예상도 빗나가지 않는 라울의 태도에 화가 났다.

운명이란 정말 있는 걸까?

라울이 자신이 쌓아온 평판마저 외면할 정도로 누군가에게 이렇게 집착하는 건 처음 보았다.

벨리아가 말한 이전 삶이 어떤 영향을 끼치기라도 한 걸까?

사실은 라울과 벨리아가 이어져야 했는데 자신이 끼어들었기에 운명이 이들을 강제로 엮으려고 하는 건 아닐까?

칼리드는 자꾸만 맴도는 온갖 생각에 미칠 것 같았다.


“그런데 제가 단호하게 이야기해뒀어요.”

의기양양한 벨리아의 말에 칼리드가 되물었다.


“뭐라고 했는데?”

“거절한 이유는 단순히 당신이 싫어서라고요.”

잘했죠? 하며 벨리아가 웃는데 칼리드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러니까 이젠 정말 신경 쓸 필요도 없어요.”

오늘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이라고 라울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겠나.

하지만 칼리드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벨리아는 그런 칼리드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칼리드가 벨리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질투나.”

방금, 뭐라고……?


“그대가 라울과 함께 있었다고 생각만 해도 돌아버릴 것 같아.”

칼리드의 목소리가 점점 낮고 어두워졌다.


“칼리드…….”

“그러니 그 녀석이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다 이야기해줘. 응? 벨리아.”

그가 이렇게 날것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모습에 안심이 되었다.

에르제를 이용해 그를 시험하려 했던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졌다.


“내가 없는 곳에서 그 녀석이 그대에게 어떤 수작을 부렸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못 참겠어.”

칼리드의 눈빛이 위험했다.


“그댈 여전히 좋아한다고 하던가?”

벨리아는 그의 시선에 사로잡혀 옴짝달싹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몸이 긴장에 굳어버린 듯했다.

겨우 침을 꼴깍 삼키고는 대답을 꺼내었다.


“……아뇨.”

“그럼 그댈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했나?”

벨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무언가를 꾹 참아내듯 칼리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 젠장.”

자신의 감정을 도저히 주체하지 못하겠는지, 칼리드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벨리아는 그 모습에 현혹된 듯 무심코 손을 뻗어 그를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그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


“진정해요, 칼리드.”

이런 사람이 변할 거라고?

라울은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의 찌푸려진 눈가에는 분노가 어려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습을 지켜보는 벨리아의 입가엔 자꾸만 미소가 번졌다. 정말 어떻게 되어 버린 걸까.

그의 질투는 불편하고 버거웠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큰 희열이 번졌다.


“그대가 라울과 함께 산책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가 자신에게 집착하고 질투하고 안달을 낼수록.

만족스러운 충만감이 느껴졌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를 정도로.”

그렇게 말하며 칼리드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미처 숨기지 못한 열망이 넘실거렸다.

그가 욕망을 더는 숨기지 않는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대가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있지? 다 잡힌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멀어지는 기분이야.”

아무리 가지고 또 가져도, 항상 부족하고 모자라기만 했다.

칼리드는 벨리아를 놓아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그녀가 제 품에 있다는 이유로 이 상황에 만족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벨리아를 라울에게 빼앗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칼리드.”

칼리드가 초조해하며 자신을 옥죄어오는 것에 벨리아는 웃어버렸다.


“불안한가요?”

그러곤 라울이 자신에게 물었던 질문을 그대로 칼리드에게 되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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