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산 넘어 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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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산 넘어 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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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산 넘어 산이었다.
2023.06.17.
2황자 궁으로 돌아온 후 벨리아는 곧바로 에르제를 찾았다.
이전에 에르제가 보낸 곧 출발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는 받아보았다. 그래서 그녀가 도착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고, 미리 하녀들에게 에르제가 이용할 방을 준비시켜둔 참이었다.
벨리아는 내부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이윽고 에르제가 머물고 있을 방문 앞에 멈춰서서 똑똑, 두 번 노크했다.
“안에 있나요?”
방 안에서 어수선한 기척이 느껴졌다.
“네, 네!”
문이 천천히 열리고 에르제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에르제는 방문객이 벨리아임을 확인하곤 쭈뼛거리며 문을 활짝 연 후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공주님.”
“실례할게요.”
벨리아는 천천히 방 안을 살폈다. 시녀들이 세심하게 잘 준비해 둔 모양이었다. 에르제가 이곳에서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을 것 같았다.
“방은 마음에 드나요?”
“아, 네! 너무 마음에 들어요.”
“급히 준비하느라 부족함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요청하세요.”
“아뇨! 정말, 정말로 과분할 정도로 좋은 방이에요…….”
에르제가 양손을 모아 감탄했다.
실제로 지금의 에르제라면 이런 방은 처음 겪어보았을 테니 놀랄 만도 했다.
벨리아는 창가에 멈춰 서서 바깥 풍경을 잠시 감상했다.
풍광이 좋았다. 이곳에서 2황자궁의 정원은 보이지 않았지만, 멀리 중앙 정원이 한눈에 들어와 황궁을 구경하고 싶다는 에르제에게는 안성맞춤인 방이었다.
“사실 제가 요청을 드렸을 때 허락해주실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충동적으로 꺼낸 말이기도 했고, 제가 과분한 요청을 드렸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요.”
에르제가 벨리아의 곁으로 다가와 말을 이었다.
“무례했던 절 배려해주셨다는 걸 알아요. 덕분에 창피당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그녀의 표정에선 악의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순수하게 황궁을 구경하고 싶었던 것뿐이라는 듯.
숨겨진 속내가 있진 않을까 의심하며 벨리아가 에르제의 태도를 살폈다. 그때 에르제가 입술을 한 번 꾹 물더니 비밀을 털어놓듯 입을 열었다.
“실은 저희 농장 근처에도 진료소가 지어졌어요. 많은 사람들이 공주님께 감사하고 있어요. 이런 변두리까지 세심하게 신경 써 주시는 분이라면 분명 멋있는 분이라 생각했고요.”
에르제의 볼이 붉게 물들어 상기되어 있었다.
검고 탐스러운 머리카락과 흰 피부. 그리고 반짝이는 커다란 눈.
객관적으로 봐도 어여쁜 아가씨였다.
“공주님께서 여는 바자회에 저희 꽃을 납품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정말 잠도 못 이루고 기뻐했었답니다. 그래서 샤핀 남작님이 몸이 안 좋아지셨다고 했을 때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먼발치에서 바라만 봐도 좋으니 언제고 한번 꼭 만나 뵙고 싶었거든요.”
“키네트라 남작 영애…….”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그렇게 불릴 만큼 대단한 가문도 아니고요. 남작가이기는 하지만 영지도 없고 그저 꽃 농장을 하고 있는 이름뿐인 귀족인걸요.”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는 에르제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이전 삶에서 벨리아가 보았던 에르제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그때의 에르제는 제가 가진 것을 빼앗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라울의 앞에선 제 앞에서와는 전혀 다른 가식적인 태도로 자신을 모함하기 일쑤였다.
저 사랑스럽고 순수한 외모는 여전해서 당시엔 모두가 그녀가 하는 말이 거짓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을 비난했었다.
“그래요, 에르제.”
벨리아가 차분히 에르제의 이름을 부르자 무척 기쁜 듯이 에르제가 미소 지었다.
“앞으로 황궁을 구경하고 싶다면 배정된 시녀에게 이야기하면 돼요. 그녀가 항상 동행해 줄 거예요. 황궁에는 그대가 갈 수 없는 곳, 가면 안 되는 장소가 있기에 반드시 시녀를 대동해서 움직이도록 해요.”
에르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바쁜 일이 많아서 초대해놓고 늘 살피지 못해 미안해요. 대신 조만간 같이 티타임이라도 하지요. 장소와 시간은 제가 시녀를 통해 전할 테니.”
그것만으로도 기쁜지 에르제는 무척 환한 웃음을 지었다.
“와아! 좋아요!”
“그럼 혹시 더 궁금한 게 있나요?”
설명은 끝났다.
벨리아는 에르제를 중요한 손님처럼 대할 마음은 없었다. 그녀가 황궁에 머물 일주일 남짓한 시간 동안 한두 번 만나 차를 마시는 것으로 초대한 성의를 다했다 할 생각이었다.
그때 에르제가 흘깃 벨리아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가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양새였다. 벨리아는 고개를 갸웃 움직이며 물었다.
“제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요?”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괜찮아요.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봐도 좋아요.”
벨리아의 허락에 에르제가 입술을 여러 번 달싹거리다 눈을 꼭 감은 채 입을 열었다.
“그럼…… 그으, 아까 1황자 전하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은데……. 그런데 제가 찾아갈 수는 없잖아요…….”
그 물음에 벨리아의 눈에서 이채가 반짝였다.
에르제가 라울에 대해 궁금해하는 걸 보니 인연은 인연인가 싶다가도 한편으로 괘씸하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아까 상황이 상황이라 인사도 못 드리고 온 게 마음에 걸려서요.”
“그렇군요. 그 이야기를 제게 하는 건 대신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하는 거라 생각해도 될까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에르제가 우물거리며 배시시 웃음 지었다.
“으음, 그게……. 공주님께서 1황자 전하와 무척 친해 보이셔서…….”
습관인 모양인지 에르제가 말끝을 흐리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에르제가 한 말을 정정하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지만 벨리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곧 가족이 될 예정이니 잘 지내고 있지요.”
“아아…….”
에르제의 표정이 오묘했다.
오지랖일지도 모르지만 미묘한 표정의 에르제를 바라보며 벨리아가 조용히 한마디 던졌다.
“1황자 전하께서는 이미 칸테리프 공녀라는 약혼녀가 있답니다. 그러니 지금의 관심이 그저 처음 보는 이에 대한 호기심이길 바라요, 에르제.”
“아,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단호한 벨리아의 모습에 에르제가 빠르게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벨리아의 말속에 숨겨진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정말 오해예요. 저는 정말 그분께 아무런 마음도 없어요!”
“그럼 다행이고요. 저도 혹시나 해서 얘기한 것이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진 마세요.”
“네에…….”
오해를 받았다고 생각해서일까.
에르제의 표정이 시무룩해졌지만 벨리아는 할 말을 마쳤다는 듯 몸을 돌렸다.
“부디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즐거운 추억을 많이 만들기를 바라요.”
* * *
오늘은 물먹은 솜처럼 몸이 너무 무겁고 힘들었다.
황제와 라울과 에르제.
불편하기 그지없는 이들을 한 명도 아닌 세 명이나 연달아 상대했더니 온몸의 힘이 쭉 빠진 기분이었다. 결혼식 준비를 마저 해야 하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벨리아는 소파 등받이에 한쪽 팔을 기대고 몸을 지탱했다.
자꾸만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엉키고 꼬였다.
‘라울은 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 거지?’
칼리드에게 어떤 위해를 가하려는 계획이 있는 걸까?
그가 의미심장하게 건넸던 말들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리아.”
분명 상태가 조금 이상했는데.
“벨리아.”
“어……? 언제 왔어요?”
언제 왔는지 칼리드가 벨리아의 곁에서 그녀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부르는 것도 못 듣지?”
“아…….”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니 이미 깜깜한 밤이 되어 있었다. 시간이 이렇게 흐른 줄도 몰랐다. 벨리아는 소파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무슨 일 있었나?”
흘러내린 머리를 정리해주며 칼리드가 다정하게 물었다.
벨리아는 칼리드에게 라울을 만났다고 이야기를 꺼내도 될까 잠시 고민이 되었다. 분명 기분 나빠할 텐데.
그래도 나중에 다른 이에게서 전해 듣는다면 더욱 기분이 좋지 않을 테니 직접 말을 꺼내는 게 나을 것이다.
“사실은 오늘 라울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렇군.”
그런데 칼리드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라울과 함께 있었다고 이야기했는데도 그리 놀란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혹시?
“알고 있었어요?”
벨리아의 눈이 커졌다.
“중앙궁에 사람이 얼마나 많다고 생각하지? 당연히 여기저기 소문이 나지 않겠어?”
“그런데 왜 모른 척해요!”
벨리아가 발끈했다.
하지만 칼리드는 벨리아의 뺨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라울이 상처 주는 말을 한 건가?”
그런 게 아니었다. 그저…….
그가 당신에게 해코지할까 봐.
이전에 보았던 그와 조금 다르게 느껴져서.
“……아뇨.”
벨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이야.”
“그냥, 조금 신경이 쓰여서요.”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칼리드가 물었다.
다정하게 벨리아를 어루만지는 손길과는 다르게 목소리에는 차가운 분노가 어려 있었다.
그의 일렁이는 감정을 눈치챈 벨리아는 괜히 이야기를 꺼냈나 싶어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그때, 칼리드가 조용하게 벨리아와 시선을 맞췄다.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건지.
이미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 있는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을 갖겠다고 얘기했다고?
아니면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그 어떤 말로 포장해도 그는 분노할 것이다.
“그냥……. 제게 거절당한 게 여전히 이해되지 않나 봐요.”
“정확히 뭐라고 했는데?”
그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오늘은 칼리드마저 평소보다 훨씬 집요했다.
벨리아는 또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벨리아.”
칼리드가 벨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뭔가 영 예감이 좋지 않은데.
벨리아가 서둘러 말을 돌렸다.
“그, 오늘 황제 폐하 만났는데. 그 얘긴 안 궁금해요?”
눈웃음을 지으며 묻는 벨리아를 가만히 바라보던 칼리드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얘기 했는데?”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에 벨리아는 속으로 작게 숨을 내쉬며 그에게 전해야 할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었다.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들어주겠다고 하길래 당신에게 경비대장 자리를 달라고 했어요.”
“경비대장?”
칼리드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네. 그랬더니 경비대를 통솔할 권한을 주겠대요.”
“늙은이가 나름 선심을 썼군.”
칼리드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 자리를 요구한 건, 나중 일을 대비하기 위해서인가?”
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 외곽을 통솔할 권한이 있다면, 최악의 상황에 닥쳤을 때 훨씬 유리한 지점을 점거할 수 있다.
황제는 자신이 곧 급사할 거라는 상상을 조금도 하지 못하고 있을 테니, 황위 다툼에 대해서는 크게 대비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황제가 뭐든 내어주겠다고 이야기한 것은 벨리아에게 아주 좋은 기회였다.
“그 늙은이가 갑자기 그런 얘기를 했을 리는 없고. 그대에게 뭔가 원하는 게 있던가?”
“비슷해요. 표면적으로는 제가 했던 자선 사업이 반응이 좋으니 보상을 주겠다는 식이었는데…….”
벨리아의 말에 칼리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나 황제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언가를 베풀 리가 없었다.
“결국 마지막으로 꺼내든 건 샤네탄 대로의 개방이었어요.”
그리고 그건 황제의 정복 전쟁을 일으키고자 하는 욕망을 그대로 투영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