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전 전하가 싫어요.
(65/88)
65. 전 전하가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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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전 전하가 싫어요.
2023.06.13.
벨리아가 황제의 표정을 살폈다.
썩 좋은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벨리아는 멈추지 않았다.
“지금처럼 작은 상단이나 굴리면서 놀고 있기엔 2황자라는 이름이 너무 아깝습니다.”
거기에 더해 칼리드는 제국의 황자이기도 하지만, 로니카 왕국의 첫 번째 공주인 벨리아와 결혼할 사람이기도 하다는 경고를 슬쩍 건네어 보았다.
“흐음. 공주가 1황자와 결혼했다면 참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한참을 말이 없던 황제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의 눈빛이 처음보다 훨씬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의심을 받더라도 저걸 받아 가는 게 더 이익이니 물러서선 안 됐다.
벨리아는 황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하. 뭐, 공주는 칼리드, 그놈 하나 믿고 여기까지 왔을 텐데. 불안하긴 했을 거야. 그런데 왜 경비대장인가? 차라리 영지나 광산을 달라고 하는 편이 낫지 않겠나?”
황제가 물었다.
그러자 벨리아가 더욱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대답했다.
“어머. 영지나 광산이 더욱 부담스러우실 것 같아 가벼운 부탁을 드린 거였는데……. 혹시 그편이 좋았을까요?”
“그럼 원하는 영지라도 있는가?”
“기왕이면 부모님도 자주 뵈러 갈 수 있게 로니카 왕국과 가까우면 좋지 않을까요?”
마치 농담하듯 가벼운 어조였다.
황제도 마찬가지로 농담처럼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오가는 말들은 칼을 숨긴 날카로운 언어들이었다.
“서부에는 비어 있는 영지가 없는데 이를 어쩌나……. 그럼 동쪽은 어떤가?”
“동부는 로니카 왕국과 정반대이니 차라리 수도에 머물면서 2황자 전하가 경비대장을 하는 게 낫지요. 광산은 이미 금광을 가지고 있으니 크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벨리아가 여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 경비대장 자리를 내놓으라고.
“알겠네. 그래도 경비대장은 황자가 맡기엔 영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경비대를 통솔할 수 있는 권한을 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폐하.”
원하는 바를 얻어낸 벨리아가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그러자 황제가 손가락으로 턱을 매만지며 물었다.
“흐음. 기사단도 아니고 고작 경비대를 두고 무얼 하려고.”
황제는 퍽 궁금한 듯했다.
하지만 벨리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하며 그저 웃을 뿐이었다.
경비대장의 자리는 별 볼 일 없는 자리 같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벨리아에겐 더없이 중요한 자리였다.
더 높은 자리를 요구하는 것은 아직은 섣부른 판단이었기에.
게다가 한미한 자리 같으면서도 나중에 황제가 죽고 나면 수도를 먼저 장악하기엔 경비대가 가장 필요할 것이다.
‘……황제는 상상도 못 하고 있겠지.’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물론 그런 속내를 감추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황제를 향해 벨리아가 입을 열었다.
“칼리드 전하는 실무에서 많은 일을 해본 경험이 없죠. 그러니 과한 자리를 맡는 것도 오히려 부담일 거예요.”
“하하. 그런가.”
황제가 벨리아를 의심했다.
하지만 뭔가 확실하게 걸리는 게 없어 대놓고 의심을 하기에도 이상했다.
황제가 인심 쓴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공주가 원하는 것은 없는가?”
벨리아는 갑작스러운 황제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다, 환하게 웃으며 지금 이 순간 가장 원하는 것을 꺼내었다.
“저는…….”
* * *
황제의 집무실을 나오는 벨리아의 표정은 밝았다.
드디어 라울과 동일한 선상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라울에 비해선 한없이 부족해 보이겠지만, 오히려 영지나 광산을 받아내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지였다.
하지만.
‘샤네탄 대로의 개방이라…….’
벨리아가 우려했던 대로 제국에선 로니카 왕국의 샤네탄 대로 개방을 요구했다.
물론 공식적인 요구는 아니었다. 그저 로니카 왕국에 입김을 조금 넣어달라는 부탁을 해온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전 삶에서 샤네탄 대로의 개방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켰는지 똑똑히 보았던 벨리아였기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심장이 한없이 내려앉았다.
‘에둘러 말했지만, 로니카에선 샤네탄 대로를 개방할 마음은 없으니.’
벨리아는 부왕에게 말을 전하긴 하겠으나, 자신은 그저 공주에 불과하기에 답을 장담할 수 없다고 전했다.
황제는 그게 퍽 아쉬운 눈치였지만, 그건 벨리아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 부른 목적은 샤네탄 대로였어.’
앞서 원하는 것을 주겠다고 살살 꼬여내고는 샤네탄 대로의 개방을 부추기라고 하다니.
벨리아는 생각할수록 기가 막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러곤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데.
“벨리아 공주.”
오늘은 운이 좋지 않은 날인가.
하필 여기서 라울과 마주칠 게 뭔가.
벨리아는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라울 전하.”
“오랜만에 보는군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벨리아의 목소리에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 오는 라울의 곁에는 익숙한 이가 얼굴이 잔뜩 상기된 채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어째서 키네트라 남작 영애가 전하와 함께 있는지요?”
벨리아의 시선을 느낀 에르제가 볼을 빨갛게 물들인 채 벨리아에게 인사했다.
“벨리아 공주님! 다시 뵙게 되어 정말 너무 기뻐요!”
“오늘 도착했나 보군요.”
“네! 오는 길에 여기, 1황자 전하께서 길 안내를 도와주셨어요.”
라울이 길 안내를?
벨리아가 정말이냐는 표정으로 라울을 바라보자 라울이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부 사실입니다. 황궁에서 길을 잃었기에 제가 겸사겸사 도와주던 거죠.”
“……그런가요. 제 손님이 폐를 끼친 건 아닌지 괜스레 죄송스럽군요.”
“어려운 일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벨리아는 라울과 이렇게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황이 불편했다. 그래서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라울에게 이만 가보겠노라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라울이 더 빨랐다.
“잠시 저와 걷겠습니까?”
“네?”
“조금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벨리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필 이곳은 중앙궁이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죄송합니다. 저는 새로운 손님이 도착했으니 이만 손님맞이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벨리아는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고 적당히 돌려 라울의 요청을 거절했다.
하지만 라울은 못 들은 척 다시 물었다.
“오래 시간을 빼앗지는 않겠습니다. 손님은 제 시종을 통해 2황자궁까지 무사히 안내하도록 시키겠습니다.”
“……오해를 살 만한 행동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전하.”
벨리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라울은 물러서지 않았다.
“시종과 시녀를 대동해서 산책하면 되겠습니까?”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여기서 1황자를 뿌리치고 가버릴 수는 없다. 벨리아는 주변에서 자신들을 주목하는 것을 느꼈다.
“……알겠습니다. 길게 시간을 내지는 못합니다.”
이윽고 라울은 뒤에 서 있는 시종에게 에르제의 안내를 명했다. 에르제는 불편한 얼굴로 벨리아와 라울의 눈치를 보다가 시종이 그녀를 이끌자 조용히 그를 따라갔다.
“그럼 가실까요?”
라울이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무척 자연스럽게 벨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벨리아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의 손을 붙잡고 중앙궁에서 바로 보이는 정원을 걸었다.
이러면 라울도 괜히 문제가 될 만한 행동은 하지 않겠지.
시종과 시녀들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뒤따라왔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들리진 않겠지만, 누군가에게 오해를 살 만한 자리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가요.”
“벨리아.”
라울이 아련하게 벨리아를 불렀다.
하지만 벨리아는 단칼에 그의 감정을 쳐냈다.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 전하께 제 이름을 허락한 적 없다고.”
벨리아가 화났다는 것을 숨기지 않은 채 라울에게 말했다.
“제가 생각을 해봤습니다.”
라울은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니, 마치 벨리아의 말은 듣지 못한 것처럼 자신의 말을 꺼낼 뿐이었다.
“그대가 정말로 칼리드에게 마음이 있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라울이 벨리아와 눈을 맞추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나를 거절하기 위해 칼리드를 선택한 걸까.”
정답이었다.
하지만 벨리아는 내색하지 않았다.
괜한 빌미는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죠?”
“접점이 없지 않습니까.”
그의 표정은 무척 산뜻했다.
고민은 모두 끝났다는 듯 개운함만 남아 있었다.
이전에 보았을 때 전전긍긍하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이어놓은 관계가 얼마나 유지될 거라 생각하십니까?”
지금 그가 하는 모든 말이 자신을 흔들기 위해 던지는 말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니 조금도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그가 바라는 모습을 보여줄 생각은 없다.
벨리아가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며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자 라울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벨리아.”
라울은 벨리아에게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불안해하고 있군요.”
“…….”
“그 불안함은 칼리드가 변할까 불안한 걸까요, 제가 신경이 쓰이는 걸까요.”
벨리아는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전하. 뭔가 착각하시나 본데…….”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제가 신경이 쓰인다는 것은 변함없죠.”
라울은 어딘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전 계속 당신을 흔들 겁니다.”
벨리아가 아무리 거부하더라도.
미처 숨기지 못하고 자신을 끔찍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더라도.
“저는 그대를 포기할 마음이 없으니까.”
그가 말을 마치고 벨리아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그러곤 다시 다정하게 웃으며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등을 바라보며 벨리아가 싸늘하게 말했다.
“……약혼녀인 칸테리프 공녀에게도, 제게도 무례한 발언이군요.”
그러나 라울은 여전히 벨리아의 반응은 안중에도 없었다.
“어차피 제게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럴 리가요.”
“그대와 제가 운명의 인연인데 어째서 거부하는지 모르겠군요.”
인연이라니. 그저 악연이겠지.
벨리아의 한쪽 입꼬리가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그때 제가 왜 거절했는지 제대로 대답을 해드리지 못해서 이러시는 걸까요?”
벨리아가 끓어오르는 감정을 진정시키려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곤 단호하게 말했다.
“전 전하가 싫어요.”
벨리아는 이 의미 없는 대화를 얼마나 더 해야 하나, 하는 짜증이 올라왔다.
이만 돌아가고 싶었다.
“계속 그렇게 싫어하십시오. 어차피 이젠 상관없으니까.”
벨리아가 라울을 노려보았다.
“전 2황자의 약혼녀예요. 그리고 몇 달 뒤엔 2황자비가 되겠죠.”
그러니 정신 차려.
이전 삶에서도 하지 않았던 짓이 아닌가. 어째서 그가 이렇게나 자신에게 집착하는가.
벨리아는 이런 라울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이 알던 사람이 아닌 것만 같다.
“전하께서 제게 이러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 같으세요?”
동생의 여자나 탐내는 파렴치한으로 낙인찍히기 싫으면, 원래 하던 대로 대외적인 이미지나 신경 쓰라고.
벨리아는 그렇게 얘기했다.
그러나 라울은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이 절 어떻게 보는지는 이젠 중요하지 않아졌습니다.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대를 갖기로 결정했으니까.”
라울이 아주 화사하고 아름답게 웃음 지었다.
“그러니 되도록 덜 상처받고 덜 다친 채로 제게 오십시오.”
라울의 눈꼬리가 예쁘게 휘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벨리아에게 소름 끼치도록 끔찍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