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원하는 게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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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원하는 게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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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원하는 게 있는가?
2023.06.10.
벨리아는 진료소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운영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일하는 자들끼리 손발이 잘 안 맞는다거나 분위기가 어수선하지 않을까 싶어 조금 걱정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와서 관찰해보니,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모두는 생각보다 훨씬 더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일하는 건 어때요?”
“다들 자기 일처럼 열심히 해주니까 문제가 생겨도 금방 수습되고……. 솔직히 말하면 예상보다도 더 수월합니다.”
진료소의 관리를 맡은 자는 데릭이 운영하는 정보 길드 루네스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그는 몇 안 되는 데릭의 정체를 아는 자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많은 것들을 준비할 예정이라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벨리아가 직접 관리하기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기에 데릭에게 길드원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했었다.
“레인에게 연락받았어요. 실마리를 잡았다면서요?”
벨리아는 얼마 전 받은 데릭의 편지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러자 그가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지었다.
“물론입니다. 이미 한참 전부터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데릭이 보내온 편지에는 벨리아가 그토록 기다리던 답이 들어 있었다.
해독제를 제조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았다고.
언제 연락이 오나 걱정했었는데, 타이밍이 아주 좋았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독촉하려고 했는데, 다행이야.’
지금 벨리아가 있는 이 진료소에서는 약제사들이 모여 해독제를 개발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었다.
“언제쯤 완성될 것 같나요?”
“흐음. 일단 진행되어 봐야 알겠지만, 수석 약제사의 말에 의하면 완성이 머지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요?”
“성분 분석은 끝났고 배합 비율만 잡으면 될 겁니다.”
그의 말에 벨리아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아슬아슬했다.
벌써 겨울이 가까워졌다.
황후의 수명은 앞으로 일 년도 남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그녀에게 해독제를 건네야 했다.
황제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서서히 황후의 수명을 연장할 것이다.
‘해독제를 거절하진 않을 거야. 황후도 칼리드를 위해 최대한 버티는 중인 것 같았으니까.’
벨리아는 이전에 만났었던 황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는 분명,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모자간의 사이를 좋게 만든다거나 할 생각은 없다. 그것은 벨리아가 주제넘게 나설 일이 아니기도 했으며, 황후가 칼리드에게 상처를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니 이쪽에서도 적당히 그녀가 원하는 바를 이뤄주면서 이득을 챙기면 될 것이다. 황후도 그것을 바랄 테고.
오직 그 정도면 된다.
“확실하게 완성되면 연락 줘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벨리아는 그와의 대화를 마치고 다시 진료소 내부를 살폈다.
저렴한 가격으로 고급 진료를 받을 수 있어서 제국민들 사이에서 꽤 반응이 좋았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대기표를 받아서라도 진료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벨리아는 그런 그들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지하실로 내려갔다.
“장작은 전부 채워두었습니다.”
“흐음…….”
지하 보관소에는 겨우내 사용할 장작이 빼곡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습도 조절을 위해 나름 여러 방법을 고안 중이긴 합니다만, 건물이 지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확실한 건 겨울을 나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창고를 관리하는 이가 벨리아에게 차분하게 설명했다.
“모포는요?”
“저쪽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지하실의 다른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곳에는 모포들이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습기에 취약한 물품이다 보니 사이사이에 종이를 깔아두어 습기를 방지할 생각인 듯했다.
“보관에 세심하게 신경 쓰셨네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공주님께서 다 제국민들을 위해서 하시는 일인데, 관리에 소홀할 수는 없지요.”
관리인은 뿌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식량도 매일 확인하고 있습니다. 육포나 건량 등으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아마 올겨울은 모두가 풍족하게 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요.”
벨리아는 지하 창고를 꼼꼼하게 둘러본 후 진료소를 나섰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 성실히 일하고 있어 마음이 놓였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종종 확인하러 오겠지만, 급한 일이 생기면 황궁으로 서신을 보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안에서도 벨리아는 서류를 놓지 않았다.
각 지역에 지어진 진료소도 여기와 마찬가지로 겨울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해당 지역의 기후에 맞춰 방법은 조금씩 달랐지만, 그래도 목표는 같았다.
‘물론, 전부 무료로 지급하는 건 안 돼.’
가난한 자들에겐 무료로 지급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무료 지급은 불가능했다.
치료 봉사는 놀고 있는 치료사들에게 일거리를 줌과 동시에 칼리드와 벨리아에 대한 평판을 쌓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숨겨진 목적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제국민들의 생활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정말 어려운 자들이 누구고 그들의 삶은 어느 정도인지.
완벽하게 파악하긴 어려울 수 있지만 벨리아가 시행하는 자선 사업을 악용하는 자가 있을 수도 있기에, 어느 정도 미리 조사하는 것은 필요했다.
‘치료사들과 마주쳤던 사람들은 섣부르게 거짓말을 하진 못할 테니까.’
어찌 됐건 치료사들의 봉사 활동은 여러모로 벨리아에게 이득을 가져오는 일이었다.
‘귀족들의 후원도 늘어났어.’
바자회 이후로 귀족들이 자선 사업에 관심을 많이 두기 시작했다.
“으으!”
벨리아가 팔을 뻗어 쭉, 기지개를 켰다.
이대로 황궁으로 돌아가면 결혼식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초대장 송부, 장소 대관, 드레스 맞춤…….
할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황후에게서 도움을 바랄 수 없었기에 모든 것은 벨리아가 직접 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황비에게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제일 먼저 초대장을 보낼 명단을 꾸리고…….’
타국에서 오는 손님들이 많았기에 미리 초대장을 보내 정확한 날짜를 전해야 했다. 그래야 그들이 제국까지 올 계획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하아…….”
어째 매일매일 쌓인 일을 처리하는데도, 그 무엇도 끝나지 않는 기분이었다.
내년 계획도 세워야 했다.
결혼식이 끝난 이후의 일들도 준비해야…….
“도착했습니다.”
벌써?
벨리아가 깜짝 놀라 창문에 달린 커튼을 슬쩍 걷어보니 정말로 황궁에 도착해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었더니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천천히 내리자 그 앞에 누군가가 정중한 태도로 벨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벨리아가 아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죠?”
황제를 직접 모시고 있는 시종장.
그가 벨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공주님을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의아했으나, 벨리아는 시종장의 뒤를 따라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벨리아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는지 시종장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이번에 공주님이 하셨던 자선 사업과 바자회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모양입니다.”
“그런가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이셨습니다.”
흐음.
자신이 묻지도 않은 말을 꺼내는 것을 보니, 정말 황제가 좋은 뜻으로 자신을 부른 게 확실한 것 같았다.
벨리아는 조심스레 황제의 의중을 예상해 보았다.
‘내게는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닐 것 같은데……. 무슨 속셈이지?’
라울의 평판이 떨어지고 칼리드의 위상이 올라갔다.
황제로선 분명 탐탁치 않은 일이었을 터.
게다가 오늘 벨리아를 부른 것도 갑작스러운 상황이었고, 칼리드와 함께 알현하는 것도 아니었다.
‘자선 사업이나 바자회는 핑계에 불과해.’
분명 무언가 더 있을 것이다.
벨리아만 따로 불러 내 이야기 해야 하는 것이.
이윽고 황제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천천히 열리는 문 사이로 화려한 방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 황제가 거만하게 앉아 있다가, 집무실에 들어오는 벨리아를 바라보곤 반색했다.
“오오! 벨리아 공주!”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하하하! 그런 딱딱한 인사는 관두시게. 공주는 짐의 며느리이기도 하지 않나.”
확실했다.
황제는 벨리아에게 원하는 게 있다.
“그리 편히 대해주셔서 영광일 뿐입니다.”
벨리아가 겸양의 말을 꺼내자 황제가 기뻐하며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최근에 제국에서 좋은 일을 많이 했다 들었네.”
“과찬이십니다.”
“아니야, 아니야. 제국민들 사이에서 공주에 대한 호평이 자자하다더군.”
황제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벨리아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럴수록 벨리아의 의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처음엔 두 아들 녀석들이 공주에게 청혼서를 보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오해하기도 했으나, 공주의 마음이 고와 제국에 와준 게 오히려 복된 일이다 싶어.”
황제의 칭찬이 점점 과해졌다.
“하하하. 이처럼 좋은 일을 많이 하는데 짐이 도와준 것도 없어 서운했을 테지. 그렇지 않나?”
“아닙니다. 제가 제국에서 이리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건 모두 폐하의 배려라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하! 정말이지. 참 마음에 들어.”
황제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혹시 원하는 게 있는가? 내 뭐든 들어주도록 하지.”
벨리아는 잠시 말을 아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벨리아의 머릿속에서는 수만 가지의 가정이 오갔다.
지금 이 호의를 받아도 되는 걸까? 혹은, 거절한다면? 속에 숨겨진 의미는 뭐지?
“사양하지 말게. 짐이 이리 무언가를 내주겠다고 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야. 그러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원하는 것을 말해보게.”
흔치 않은 일임을 알기에 더 신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래 끌 수는 없었다.
벨리아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그럼, 염치없지만 부탁을 한 가지 드려도 되겠습니까, 폐하?”
“하하. 무엇이든.”
황제는 벨리아가 어떤 부탁을 할지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어찌 됐든 이건 기회였다.
그러니 벨리아는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차후에 이로 인해 황제가 자신들을 경계하더라도 붙잡아두는 게 이득이다.
“내키지 않으시거든 그저 지나가는 소리로 치부해 주십시오.”
“대체 무슨 부탁을 하려고 이리 뜸을 들이는지 궁금할 지경이군. 칼리드에게 황제 자리를 달라고 할 작정인가?”
황제가 웃으며 물었지만, 말속에 뼈가 있었다.
벨리아는 고개를 들어 황제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곤 자신이 원하는 바를 꺼내었다.
“2황자 전하에게 경비대장 자리를 주십시오.”
벨리아의 말에 황제가 잠시 말이 없었다.
바로 안 된다고 하기엔 그리 대단한 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냥 흔쾌히 칼리드에게 던져주기엔 또 조금 거슬렸다.
과한 자리를 요구했다면 다른 것으로 회유라도 해봤을 것을.
“폐하께서 의도하신 바는 아니겠지만, 안타깝게도 칼리드 전하는 2황자임에도 황실의 일에서 많이 배제되어 있었습니다.”
황제의 침묵에 벨리아가 천천히 말을 꺼내었다.
“……저는 오로지 칼리드 전하를 마음에 품어 제국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선 제국의 황자로서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더군요.”
“끄응.”
표면으로는 외로운 타국에서 그런 그를 믿고 살기 힘들다는 투정으로 보일 테지만, 칼리드에게 아무런 업무도 주지 않은 황제를 비꼬는 것이었다.
하지만 벨리아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이리 제국을 위해 움직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 부군이 될 칼리드 전하도 무언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벨리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짙게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