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진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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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진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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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진혼
2023.06.06.
벨리아가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답변도 들려주지 않자 에르제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안 된다고 하셔도 정말 괜찮아요! 제가 무리한 요청을 드렸다는 거 저도 알아요.”
벨리아는 황궁에서 머물고 싶다는 에르제의 말에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왜 하필 그런 보답을 바랐을까.
드레스나 값비싼 장신구를 달라고 하길 바랐다. 혹은 이 기회에 사교계에서의 입지를 노려 자신에게 티파티에 초대해달라는 말을 꺼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진 했었다.
이전 삶에서 봤던 그녀의 모습처럼 욕심이 많은 자라면 자신에게 제 곁을 내어달라고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잠시 했던 것 같다.
로니카의 공주이자 예비 황자비인 자신의 측근이라면 남작 영애에겐 과분한 자리일 테니까.
그런데 황궁에서 며칠 머물게 해달라니.
“아, 그게에……. 제가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거든요. 그때 황궁에 가보고 싶다고 잠시 생각했었는데 원하는 걸 얘기해보라고 하시니까 저도 모르게…….”
에르제는 아까 눈을 반짝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던 모습과는 다르게 또다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벨리아는 가만히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뇨. 좋아요.”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에르제가 다시금 눈을 마주치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건 곁에 있던 칼리드도 마찬가지였는지 그가 벨리아의 이름을 놀란 목소리로 내뱉었다.
“벨리아?”
“제가 2황자 궁의 주인은 아니니 칼리드의 허락이 있어야겠지만, 괜찮죠?”
벨리아의 물음에 칼리드의 표정이 미묘하게 흐트러졌다. 하지만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그래. 그대가 원한다면.”
그는 벨리아가 원하는 걸 반대한 적이 없었다.
벨리아 또한 그가 허락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번만큼은 거절해주길 바랐는데.
‘대체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에르제를 황궁에 머물게 해 지켜보고 싶다는 마음과 두 번 다시 얽히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공존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칼리드는 변하지 않을 거라는 것.
그는 마지막까지 제 편일 거라는 것.
그 사실을 보란 듯이 증명하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 더 컸다.
“와아! 정말요?”
에르제가 가볍게 박수를 치며 밝은 얼굴로 기뻐했다.
자신이 황궁에서 머물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지 무척 놀란 기색이었지만, 기쁨을 감추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어렵고, 집으로 돌아가서 황궁에서 며칠 머물게 되었다는 사실을 키네트라 남작 부부에게도 전한 뒤 필요한 짐을 꾸려 오도록 해요. 언제든 그대가 방문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해 둘 테니.”
옅은 미소를 띤 채 벨리아가 말을 마치자 에르제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바로 돌아가서 부모님께 이 사실을 전하고 올게요! 정말 감사해요, 공주님!”
“그럼 곧 다시 만나도록 하죠.”
도박임을 안다.
고작 그의 마음을 확인해보고 싶다고 에르제를 황궁에 들이는 짓은 분명 바보 같은 행동일 것이다. 그렇지만 저도 모르게 칼리드를 의심하는 마음이 싹튼 걸 알아버린 이상,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그를 믿고 싶었지만, 자꾸만 불안했다.
사랑은 모두 부질없다고.
사람은 다 똑같다고.
신의는 배신당할 뿐이고 믿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게 당연하다고.
그렇게 라울이 제게 알려주었다.
하지만 칼리드는 그것은 틀렸다고 말했다.
자신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을 믿어달라고.
관계의 주도권을 모두 제게 넘겨주곤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직접 마주해서 과거의 잔상을 모조리 깨부술 것이다.
이젠 이 지긋지긋한 악연을 끝낼 때가 되었다.
벨리아는 차가운 눈으로 에르제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 * *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황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깊게 내쉬며 마차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몸은 정말 지쳤지만 한 달도 넘게 준비한 일이 전부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고생했어.”
칼리드가 옆으로 다가와 벽에 콩 기대고 있는 벨리아의 머리를 폭 감싸 안았다.
벨리아가 흐물거리는 몸을 그에게 기대었다.
“무리한 부탁을 해서 미안해요, 칼리드.”
멋대로 에르제를 황궁으로 초대한 일에 대한 사과였다.
칼리드는 제 궁에 누군가를 들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제 독단으로 일을 밀어붙였으니 분명 기분이 좋지 않을 터.
“나는 괜찮아. 어차피 나와 마주칠 일은 거의 없을 테고 그녀가 황궁에 그리 오래 머무는 것도 아니니까.”
칼리드는 어깨를 으쓱이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보다 그대는 키네트라 남작 영애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게 아니었나?”
“그래 보였나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칼리드의 눈엔 바로 보였나 보다.
벨리아가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맞아요. 키네트라 영애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제 마음에 들었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그리 썩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어요.”
“그런데 무슨 생각으로 황궁에 머무는 걸 허락한 거지? 혹시 뭔가 따로 생각하고 있는 게 있나? 이전 삶에서 만나봤다던가…….”
벨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 일은 정말 그녀 덕분에 큰 위기를 넘긴 거니까요.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요. 뭘 대가로 내놓으라는 게 아니라 그저 황궁에서 며칠 지내보고 싶다는 거잖아요. 어린 레이디가 꿈꿔 볼 수 있는 이야기죠.”
“벨리아.”
“정말 그게 다예요, 칼리드.”
그에게 이전 삶에서 자신의 자리를 빼앗아 황후가 된 사람이 그녀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라울에게 죽임 당했다는 이야기로도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거기에 제게서 라울을 빼앗아 간 사람이 나타났다는 이야기까지 더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하찮은 자존심을 세우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칼리드의 앞에서 더 초라해지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에요.”
“……그래.”
벨리아가 에르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눈치챈 칼리드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돌아가면 당분간 푹 쉬어.”
“네. 아무래도 그래야겠어요.”
하지만 곧 겨울이었다.
벌써 한기를 담은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겨울을 앞두고 진료소 운영과 장작 보관상태, 보존 식량 등도 살펴야 했다.
‘게다가 해독제 개발도 늦어지고 있어…….’
해야 할 일은 산재해 있는데, 벨리아의 몸은 하나뿐이라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리하지 마, 벨리아.”
그런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칼리드가 벨리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무리하지 않아요.”
“그대는 지금 무리하고 있어. 이렇게나 눈에 훤히 보이는 거짓말이라니.”
칼리드가 고개를 저으며 진지하게 이어 말했다.
“그대가 하는 일을 조금 나눠서 할 수 있는 이가 필요해.”
벨리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본인도 슬슬 체감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혼자서 감당하기엔 일이 너무 많았다.
그때 칼리드가 벨리아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레이첼 카프리에.”
갑작스레 나온 이름에 벨리아가 칼리드의 품에서 벗어나 그와 눈을 마주쳤다.
“내 마음에는 안 들지만, 아무래도 그녀가 가장 적임자 같군.”
어리둥절한 벨리아의 표정에 칼리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자세한 건 돌아가서 이야기하지.”
* * *
“뭐라고요?”
벨리아가 깜짝 놀라 반문했다.
“그러니까, 카프리에 후작이 애초에 당신 쪽 사람이었다고…….”
슬쩍 떠보듯 이야기했을 때 후작이 영 반응이 없길래 아직은 시기상조인가 생각했는데, 이미 칼리드와 손을 잡았었다니.
“우리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기로 했으니 슬슬 드러내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럼 레이첼도 그걸 알고…….”
제게 일부러 접근한 걸까요?
벨리아는 차마 꺼낼 수 없던 뒷말을 꾹 삼켰다.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이해관계가 숨어 있었다면 조금 마음이 아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칼리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후작가의 장남 정도나 알지, 나와 후작과의 사이는 아무도 모르고 있을 거야.”
칼리드가 다리를 꼬며 단호하게 말했다. 어쩐지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벨리아는 자신이 생각했던 가정을 떠올린 후,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후작이 당신의 손을 잡은 건 언제부터였어요?”
“꽤 오래전부터야. 내가 성년식도 치르기 전부터니까.”
칼리드가 순순히 대답했다.
“하…….”
기가 막혔다. 어쩜 이렇게 끊임없이 숨겨둔 것들이 튀어나오는지.
벨리아는 이전 삶에서 카프리에 후작이 마지막까지 중립을 지켰던 이유를 깨달았다.
지지하고 있던 칼리드가 황위를 포기해버려서 어쩔 수 없이 중도로 남았던 것이었다.
“당신은 대체 어째서 황제가 되지 못했던 걸까요?”
벨리아가 한숨과 함께 의문을 토해내었다.
도대체 왜?
지금 드러난 그의 전력만 봐도 라울에게 허무하게 무너질 정도는 절대 아닌데.
“혹시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나요?”
벨리아가 묻자 칼리드가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글쎄?”
대답해 주지 않겠다는 듯 의뭉스러운 태도였다.
“……뭐예요.”
가뜩이나 에르제가 나타난 것 때문에 한껏 예민해져 있던 벨리아였기에, 칼리드의 태도가 괜히 서운해져서 투정을 부렸다.
그러자 칼리드가 벨리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와.”
“싫어요.”
“그럼 내가 가지 뭐.”
칼리드가 벨리아의 곁으로 와 앉았다. 그러고는 조금 고개를 숙여 벨리아에게 눈을 맞췄다.
“왜 그런 표정이야?”
“……제 표정이 뭐요.”
“사탕을 빼앗긴 아이 같은 표정을 하고 있잖아.”
그게 무슨!
벨리아는 발끈했지만, 그 어떤 이야기를 꺼내더라도 변명만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칼리드가 그런 벨리아를 보며 귀엽다는 듯 미소 짓다가 입을 열었다.
“그 시간 속에서 내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면…….”
칼리드가 벨리아에게 가볍게 입을 맞춘 후 말을 이었다.
“아마 그대 때문이 아니었을까?”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벨리아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낼 때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그, 농담하지 말아요…….”
“농담 아닌데?”
칼리드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벨리아를 양팔 가득 안았다.
“분명, 나는 그대와 적대하고 싶진 않았을 테니까. 어쩌면 라울에게서 그대를 빼앗아 오기 위해 수를 쓰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럴 리가요.”
“모를 일이지.”
칼리드가 하는 말은 죄다 꿈같은 이야기였지만 왠지 벨리아도 그의 말이 사실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그 시간 속에서도 허무하게 죽어버린 자신을 생각해주는 이가 단 한 명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분명 그 사실만으로도 홀로 스러져버린 제 영혼을 위로해 주었을 테니까.